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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숙] 인도네시아인이 한류 콘텐츠를 활용하는 법
[조연숙] 인도네시아인이 한류 콘텐츠를 활용하는 법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2001년 인도네시아에서 첫 한국 드리마가 방송된 이래, K-POP, 한국음식, 예능 등 한류 콘텐츠가 20년 이상 인기를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이 사용한 물건들을 구입하거나 K-POP 댄스를 따라 하던 일방적인 수용이었다. 최근에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카르타 롯데몰에서는 주말이면 K-POP 팬들이 모여서 K-POP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화장품을 구입한다. 자카르타 딴중바랏 지역에 위치한 이온몰(Ieon Mall)에 있는 K-POP 댄스 스튜디오에서는 시간당 강습료 8만 루피아 정도를 내고 K-POP 댄스 중 한두 동작을 1시간 가량 배우고 짧은 동영상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쇼핑몰에서 놀이기구를 타거나 영화를 보듯이 잠시 K-POP 댄스를 배울 수 있게 상품화한 것. 2024년 대선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정치 왕조를 만들려 한다는 비판에 대해 '정치는 이데올로기 경쟁인데 감정싸움으로 생각한다며 K-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며 K-드라마를 언급했다. 간자르 후보는 본인의 인기가 K-POP 스타만큼 되지 않느냐고 물었고, 아니스 바스웨단 후보의 지지자들은 '아니스 버블'(아니스@aniesbubble)이라는 엑스(구 트위터) 팬 계정을 중심으로 아니스를 홍보하는 트위터와 틱톡 게시물과 라이브 방송 그리고 커피트럭 같은 한류 팬덤 문화를 적극 활용했다. 대선 후보들조차 한류를 언급해야 할 만큼 한류 현상이 인도네시아 사람의 생활에 스며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한류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댄스 뮤지컬인 '사랑하면 춤을 춰라2 (사춤2)' 자카르타 공연을 마친 후 배우와 관객들의 기념촬영. 2023.9.24 [사진: 데일리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에서 한류는 고속 성장 단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최경희 연구교수는 '인도네시아 한류의 수용과 수행에 나타난 문화 경제적 상호작용 연구'라는 논문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한류가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고속 성장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한류현황지수와 한류심리지수로 구성된 한류지수가 인도네시아인을 대상으로 2015년 이래 계속 조사되었는데,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평균 이상의 높은 점수를 계속 보이면서, 한류의 대중적 인기와 함께 고속 성장의 단계를 보여 주고 있다. 2016년 이후 단 6년 만에 문화콘텐츠를 접촉하는 미디어 수단이 전통적인 TV에서 온라인과 소셜미디어(SNS)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인이 스스로 콘텐츠를 선택할 수 있는 수용자로서의 주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가 인기를 지속하고 성장하는 이유 최 박사는 한류 콘텐츠 자체의 우수성과 한국 측의 확산 노력과 함께 인도네시아가 내적인 변화의 단계라는 점을 주목했다. 인도네시아는 1999년부터 국가체제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의 개혁을 원하는 열망은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또 민영 방송사가 증가하면서 '검증된 해외콘텐츠'를 수입해 방영했는데, 2001년 한국 드라마의 첫 방송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또 IMF 이후 매우 어려운 인도네시아 경제 상황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고, 대회 기간 내내 거리응원을 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면서, 한국이 인도네시아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나라로 다가왔다. 2006년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전략적동반자관계를 수립하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도 한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창조경제’ 정책은 가장 뚜렷한 한류 수용 전략 인도네시아는 창조경제 전략을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경제 전략으로 선택하고, 문화적으로 지속가능한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 ‘창조경제’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이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디지털 콘텐츠 산업뿐만 아니라 관광산업, 공연예술 분야 증진을 위해 한국과 협력하고 있으며, 이것이 인도네시아에서 한류 콘텐츠가 지속해서 확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탕이 됐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2013년 한국과 ‘창조산업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다양한 창조경제 분야에서 협업, 교류와 투자 등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MZ세대와 무슬림과 한류가 만나서 이루는 상호작용 인도네시아 MZ세대와 Post-Z세대와 한류가 글로벌 문화현상으로 주목을 받고 변모하는 시점에서 글로벌화와 민주화의 형향을 받은 사람들로, 한류를 통해 ‘자기개성’을 발견하고 ‘자기개발의 수단으로서의 한류’를 체험한다. 최경희 박사는 이러한 경험이 새로운 인도네시아 청년 무슬림 세대의 시대성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무슬림 여성들은 종교와 취미, 종교와 엔터테인먼트를 구별하여 인식하는 태도를 보인다. K-POP 커버댄스에 참여하는 무슬림 여성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종교성’과 연관 짓지 않고, 오히려 세속화가 아닌 ‘자아실현’과 ‘더 나은 가치’에 대한 욕구이며, 그 ‘세계성’에 참여하는 통로로 K-POP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류, 다양성과 이슬람 가치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는 건국 이래로 문화다양성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인 특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한류와 이슬람적 가치가 상호작용해 만들어지는 문화적 혼종성을 발전시키는 요소로는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모두 공감하는 “아시아라는 정체성”, “다양한 종족(민족)성을 인정하는 인식들” 그리고 “한류 콘텐츠를 소비하는 지역소비자들의 주도성”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비해, “종교와 종족에 대한 폄하 인식 또는 차별적인 인식” 등은 문화적 혼종성을 생성하는 데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했다. 최 박사는 안도네시아에서의 한류는 현재 문화다양성을 지향하는 가치와 이슬람 가치 사이에 존재한다며, 인도네시아가 문화다양성 사회로 유지 확대되는 데 한류가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다만 이것조차 한류를 수용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선택과 실천의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 박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한류 콘텐츠가 인종과 젠더, 지역과 계층 문제에 대해서 풍부하고 성숙한 인식이 장착된 콘텐츠로 성장하고 문화다양성을 수용하는 글로벌 문화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했다. [끝] (한인뉴스 2024년 4월호에 게재됨)
[조연숙] 자카르타 한인의 공간, 꼼플렉과 쇼핑몰 그리고 코리아센터
[조연숙] 자카르타 한인의 공간, 꼼플렉과 쇼핑몰 그리고 코리아센터
[조연숙] 자카르타 한인의 공간, 꼼플렉과 쇼핑몰 그리고 코리아센터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들은 어떤 집에 살까? 한국인들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 한국인들의 역사성이 담긴 공간은? 주택단지와 아파트, 쇼핑몰, 코리아센터, 교회와 성당과 절, 한국슈퍼 등이 한국인들의 주된 공간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 산다면 가까운 거리에 공원과 산이 있어서 산책을 할 수가 있지만 자카르타에서는 좀 어렵다. 자카르타에서 경험한 공간과 앞으로 생겼으면 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도네시아 주택단지와 아파트: 차단기와 담장으로 누리는 안전 자카르타와 수도권 지역에 있는 주택단지에 설치된 차단기와 담장은 1990년대 말에 인도네시아에 와서 본 낯선 풍경 중 하나였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주택단지마다 입구에 차단기와 경비원들 그리고 단지 주변에 담장을 둘러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했다. 심지어 단지 입구에서 한 번, 다시 작은 단지로 들어갈 때 한 번 이렇게 차단기를 두세 번 거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 인도네시아에 확산하는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은 외부인에 대한 통제가 더 강하다. 위기가 발생하면 외부인의 출입을 더욱 제한한다. 1998년 5월사태 전후로는 동네 골목길도 주민들끼리 차단기를 설치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아예 설계부터 출입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주택단지는 더욱 통제가 심해졌다. 폭은 좁지만 사유지가 아닌 공용 도로와 골목길조차 외부인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한 점은 내 입장에서 당황스러웠다. 인도네시아 정치와 치안이 안정되면서 주택가와 주택단지 통행이 완화됐다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 한번 통제가 강화됐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주택단지와 아파트의 출입관리시스템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범죄와 프라이버시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주거환경을 제공한다. 또 물리적으로 외부로부터 분리된 공간을 되면서, 입주민들에게 영역성을 제공한다. 반면 지역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통행제한과 주변지역 단절 등을 야기하는 문제점도 있다. 자카르타 코리아센터 [한인뉴스 제공] 게이티드 커뮤니티, 거주자와 비거주자를 구별하는 공간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렇게 주변을 담장으로 두르고 차단기를 설치해서 출입을 제한한 주택단지를 꼼쁠렉(영어 Complex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이라 부른다. 우리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주거공간은 콘도미니엄이라 부른다. 이렇게 외부와 구별되는 공간과 그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를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라고 정의한다. ‘빗장 공동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빗장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낯선 느낌이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현대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시초는 미국의 ‘턱시도 파크’로, 1885년 미국 뉴욕에 직장을 둔 상류층을 겨냥해 근교에 사냥과 낚시 등의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최고급 리조트와 주변 건설된 주택단지로 구성됐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담과 게이트 설치가 용이해지고 경비원을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게 되면서 중산층 주거지만이 아니라 저렴한 아파트와 연립주택 같은 공동주택들도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됐다. 인도네시아 내 주요 주택단지와 콘도미니엄에는 주거용 건물과 더불어 쇼핑몰과 병원과 학교 등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운영되고, 사회·경제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살면서 상호작용을 한다. 목포대학교 고고인류문화학과의 홍석준 교수는 차단기와 담장이 내부의 주민들과 외부의 비거주자들을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정서적으로 구분하는 가시적 장벽 역할을 수행하면서 거주자 자신의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그는 차단기와 담장으로 이루어진 주택단지를 선택하는 이유로 공동체 추구, 안전 추구, 범죄에 대한 두려움, 타인(단지 외부자)에 대한 두려움, 질서정연함과 자산 가치의 보존, 단지 관리 서비스 제공 등을 꼽았다. 시티워크와 지하 물류 터널 인도네시아에는 쇼핑몰의 이름에 ‘시티워크’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깨끗한 바닥 그리고 2~4층을 터서 시원하게 보이도록 쇼핑몰 공간을 꾸민 곳으로, 공원을 대신해 쾌적하게 걸을 수 있게 했고, 복도 가장자리는 다채로운 컨셉의 식당과 카페 그리고 상점들로 채웠다. 자카르타 스나얀 플라자, 미드 플라자, 아시타몰 등 자카르타 시내 중심가에는 여러 건물의 지하를 연결해서 지하에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게 상가를 만든 곳도 있다. 자카르타의 토지가 제한적이고 땅값이 비싸고 건물이 밀집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쇼핑몰은 공원과 거리 등 시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대체하기 어렵다.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학교 교수는 여러 강의와 저서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더 많이 소통하면서 소셜믹스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정부가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카르타 남부에 위치한 뽄독인다몰은 주변 부촌과 아파트에 거주하는 고소득의 외국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주된 방문객이고, 뻐자뗀몰은 주변 주택과 아파트에 거주하는 중산층 소비자가 주된 방문객이다. 자리에 앉기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카페와 식당은 취향과 가격대 등 기호나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이 이용한다. 상업공간에 내재된 견고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설 수단이 필요한 것. 그는 "서로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를 때 선입견 없이 만나 사회가 융합될 수 있다" 며 "공원처럼 모두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설산업의 이해관계자들은 기존 도시에서 부족한 공간을 충당하는 방안으로 지하공간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유현준 교수는 서울에서 도심 공원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지하 물류 터널을 제안했다. 자율주행로봇이 드나들 수 있는 지하 물류터널을 개발해서 화물차 운행 감소에 따라 여유가 생긴 차선을 공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다. 서울의 서부간선도로는 기존 도로의 지하에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하나 더 만들어서 교통량을 분산시켰다. 서울의 통일로에 지하도로로 만들고 지상을 공원으로 쓰는 공약을 제안한 정치인들도 있다. 자카르타도 이런 방안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담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아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과 얼마나 교류하나? 아파트 또는 주택단지 밖에 이웃들과 얼마나 교류하나? 안전을 위해 만든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안전할까? 유럽과 미국의 연구자들은 고급 주택단지가 위치한 주변 이웃 마을과의 단절만이 아니라 주택단지 내 거주자 간의 단절로 인해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게이티드 커뮤니트의 폐쇄성으로 인해 담장 안에서 범죄가 증가하기도 한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주택단지의 담장이나 아파트의 보안검색대보다 이웃 간의 교류와 거주자들 간의 친밀한 공동체를 통해 범죄율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들면 1998년 5월사태 때 평소에 현지인 이웃과 잘 지낸 사람은 이웃들이 폭도의 공격을 막아준 반면, 현지 이웃이나 고용인에게 못되게 군 사람은 피해를 입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이 여럿이다. 인도네시아 한인들, 1인 가구 증가와 소통 기회 감소 자카르타에서 자연을 누리고 사람을 만날 공간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트랜드로 1인 가구의 증가를 꼽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사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한국과 달리 인도네시아는 산책하고 다른 이들과 만날 공원이 적고, 예전과 달리 오프라인 모임도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물가가 오르고 작은 카페와 식당이 문을 닫고 새로 생기는 식당과 카페는 고급화됨에 따라 개인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감소하는 추세이다. 원격근무와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는 일도 줄었다. 온라인에서 만나서 업무를 논의하지만, 예전처럼 한 사무실에서 함께 보내고 식사하면서 쌓을 수 있는 유대감은 갖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현준 교수는 화상통화가 된다고 손잡는 데이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오프라인 공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코리아센터와 한인회관 자카르타에는 한인과 관련된 대표적인 공간으로 한인회가 입주해 있는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영사동과 한국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코리아센터가 있다. 코리아센터에는 1980~1990년대에 설립된 회사들이 아직 있고, 이들의 사무실에는 설립 당시의 풍경이 남아있다. 교회, 성당, 절 등 종교시설과 한국학교도 있다. 하지만 종교시설은 포교가 목적이어서 종교가 다른 사람이 이용하기 부담스럽고, 한국학교는 시내에서 멀리 있어서 접근성이 떨어진다. 재인도네시아 한인회는 한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한인회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인회관은 다양한 한인들이 만나서 화합하는 소셜믹스를 이루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코리아센터는 개인 소유이고 영사동도 한국정부 소유로 되어 있어서, 현재 자리보다는 다른 장소에 한인회관이 세워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안은 기존의 코리안센터에 한인회관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코리아센터는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재건축할 수 있을까? 한국대사관과 한인회 사무실 부지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한국기업들이 구입해서 한국대사관과 한인회 사무실로 쓰고 있고, 1980~1990년대에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건물로 사용됐다.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코리아센터 건물과 주차장을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고, 시설은 지하로 옮기면 어떨까? 새로 생길 한인회관이 인도네시아에서 파편화된 개인으로 사는 한국인들이 소통하고 화합하는 장소이자 한국인의 역사성이 보존되는 공간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유현준 교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질서로 바뀌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100년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끝]
[조연숙] 한인뉴스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아카이브로
[유료][조연숙] 한인뉴스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아카이브로
한인뉴스 300호 특집판 [자료사진] 한인미디어, 한인들의 소통과 정체성 형성 기능은 여전히 유효해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1990년대에 온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식당과 상점에 가고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았을까? 자카르타국제한국학교(JIKS) 건설 후원금은 누가 냈을까? 한국 ‘평화의 댐, 건설 후원금은 누가 냈을까? 인도네시아 대학교에 처음 한국어과가 생길 때 후원금은 누가 냈을까? 1998년 5월사태 때 한국대사관과 한인회는 어떻게 대응했나?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는 한인 미디어는 한인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한인회와 대사관의 활동, 인도네시아 시사 뉴스, 인도네시아 생활 정보,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 소개, 한인들의 문학작품 등 다양한 뉴스를 보도한다. 한인 광고지는 한국 식당과 한국 마트 등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를 광고하는 매체지만, 그 광고들을 통해 한인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한인상공회의소, 대한체육회, 주요 산업협회, 한국학교 등도 각자 회보나 신문을 만들지만, 회원이나 구성원이 아니면 접근하기가 힘들다. 대중성과 접근성 그리고 공신력에서는 한인뉴스를 포함한 한인 미디어를 따라오기 힘들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와 <동남아한인연구 총서 인도네시아편>은 한인뉴스의 기록을 가장 많이 인용했고, 이어 데일리인도네시아와 한인포스트의 뉴스도 인용했다. 누구나 미디어를 만들 수 있지만 모두가 미디어가 될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운영하기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회에서 발행하는 한인뉴스는 1996년 7월 창간 이래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발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벼룩시장과 한울, 일요신문과 한타임즈는 이미 폐간했고, 종이로만 발행하는 여명(구 소망)과 교민세계도 이전(과거) 호를 확인하기 어렵다. 아쉽지만 온라인화 이전의 정보들이 사라졌다. 재인도네시아 한인상공회의소(Kocham)와 대한체육회 인도네시아 지회는 웹사이트를 운영하지만 회원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고, 일부 산업협회(신발·봉제·건설협회)가 회보를 발행하지만 역시 디지털화되어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남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기록이 1회성으로 휘발되지 않고 모여서 저장되고 도서관의 책처럼 구글의 정보처럼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인회에서 발행하는 한인뉴스를 아카이브(archive) 겸 플랫폼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카이브는 역사적 가치나 장기 보존의 가치를 지닌 기록이나 문서들의 컬렉션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기록이나 문서들을 보관하는 장소, 시설, 기관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회의(2013년 3월 8일))에서는 ‘아카이브’를 ‘기록 보관’, ‘자료 보관소’, ‘자료 저장소’, ‘자료 전산화’로 표현한다. 한인뉴스가 한인 기록소 또는 플랫폼이 되려면 한인뉴스 스스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게 웹사이트를 개선해야 한다. 종이잡지는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더라도 개별 뉴스는 실시간으로 보도해야 하고, 개인이 소식을 올리는 등 쌍방향 소통을 할 수 있도록 게시판 기능을 활성화 해야 하며,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밴드, 페이스북페이지,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정부기관과 한인단체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서 뉴스를 공유해야 한다. 원고료를 지불하므로써 원고의 질도 높여야 한다. 정부 기관과 한인들도 한인뉴스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한인뉴스는 기업들의 광고수입과 후원금으로 어렵게 운영하며, 컨텐츠는 무료 원고로 채운다. 재외동포단체와 연구자들은 해외 한인 미디어의 영세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와 한국대사관의 지원을 촉구한다. 또한 공신력이 있는 한인 미디어를 활용해서 정부 정책과 대사관 소식을 알릴 것을 권한다.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의 한동섭 교수는 재외한인언론이 정보 제공과 한인사회 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외동포언론의 고유한 기능으로 고국과 거주국의 소식 보도, 동포사회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 자연재해나 소요사태 등 위기 상황시 신속한 정보 전달(위기관리), 차세대 정체성 강화를 위한 한국어 교육, 재외동포를 위한 의제 설정, 동포사회 발전을 위한 여론 형성, 거주국 주류 사회에 한국 알리기, 재외동포 네트워크 형성 등을 꼽았다. 1945년에 포로감시원으로 왔던 조선인들은 소통과 교육의 수단으로 <조선인민보>를 발행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1972년 거류민회를 설립하고 1975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거류민회보를 발간했다. 인도네시아에 한국기업과 한국인이 급증하면서 1995년 교민세계와 여명, 1996년 한인뉴스가 창간했다. 이어 1997년 K-TV, 1998년 벼륙시장과 한울, 1999년 데일리인도네시아, 2002년 일요신문, 2003년 한타임즈, 2005년 한나프레스(한인포스트), 2006년 인도웹, 2007년 OKTN, 2012년 자카르타경제신문이 설립됐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미디어와 웹사이트, 뉴스 생산자와 공급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한인포스트 밴드와 인도웹 및 카카오톡 단체방에서는 개인이 직접 소식을 전달하면서 쌍방향 소통을 한다. 2013년부터는 한인 유튜버들이 등장했고, 2021년 온라인 미디어 인니투데이가 창간했다. 한인미디어는 자연재해, 정치·사회적 소요사태 등 안전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1997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인도네시아는 5월 사태와 수하르토 대통령 퇴진, 민주화 시위와 압둘라흐만 와힛 대통령 탄핵, 도심 테러 등 사회 혼란과 치안 불안이 심각했고, 이에 한국대사관과 한인회는 한인뉴스를 통해 인도네시아 상황과 대응 방안을 알렸고, 1999년 창간한 데일리인도네시아는 하루 두 차례 뉴스레터를 통해 시위와 자연재해 소식 등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해 한국인들이 대응할 수 있게 했다. 이후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한인미디어들은 웹사이트, 네이버 밴드,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인도네시아 상황과 자연재해 소식을 보도하게 됐다. 인도네시아에 새로 정착하는 한국인은 물론 인도네시아에 오래 체류 중인 한국인들도 언어장벽, 제도에 대한 정보 부재,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현지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한인 미디어는 이들에게 인도네시아 법, 제도, 정책, 문화 등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기능을 담당해 왔다. 이런 뉴스들이 쌓여서 역사의 기록이 되고 있다. 누구나 뉴스를 만들고 미디어가 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모두가 공신력과 지속성을 갖지는 못한다. 인도네시아 한인공동체의 아카이브로서 한인뉴스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두 고민하고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조연숙] 한국인과 재인니 한국인,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조연숙] 한국인과 재인니 한국인,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한국인과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인도네시아 거주 한인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민족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한국인, 한인,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다른 표현으로 재외동포와 교민? 해외에서 치르는 선거는 재외선거이고 이때 유권자의 명칭은 국외부재자이다. 이렇게 부르는 말에는 국적 차이처럼 개인이 처한 환경만이 아니라 개인을 바라보는 한국 정부의 시각도 반영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혈통을 가진 사람은 한인이라고 부르고, 이 중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그리고 인도네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은 한국계 인도네시아인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을 교민 또는 재외동포라고 부르지만, 해외에서는 스스로를 현지인과 구별해서 한국인이라고 부른다. 재외동포기본법 제2조에는 “재외동포”를 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 나) 출생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사람(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 국외로 이주한 사람을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 중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규정한다. 재외동포기본법은 2023년 5월 9일에 제정되어 2023년 11월 10일에 시행된 법률로, 재외동포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만들어 가는 것 함재봉 전 연세대학교 교수(현 한국학술연구원 원장)는 저서 『한국사람 만들기』 제1권에서 "'한국사람'이란 역사 60여 년에 불과한 미완성의 인간"이라며 "한국이라는 국가 역시 고전이 하나도 없는 나라다. 한글이 널리 사용된 것도 70년이 안 됐다. 새 나라에 새 말인 사실을 우리가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처럼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민족이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적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호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른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극복하는 방향이다. 진정한 '한국사람 만들기'는 이제 시작이다." 함재봉 교수가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고민하고 성장해 한국의 정치·역사를 연구하며 깨달은 사실이다. 함 교수는 “우리는 이미 단일민족의 신화를 넘어 다민족 사회”라고 정의하고, ‘한국사람’이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한두 가지의 변치 않는 본질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결국 민족의 정체성은 각 시대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함 교수에 따르면 '한국사람'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곳은 1962년 9월 22일 조선일보이다. 이전엔 ‘조선사람’이란 단어가 존재했지, 한국사람은 없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도 대한제국인이었다. '한국사람'이란 말이 생긴 지 약 60년이 됐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람만큼 세계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없다"고 덧붙였다. 언어, 풍습, 이념, 종교, 인종 등 어느 하나도 공통점이 없다며 한국사람의 본질이 아닌 '왜 이렇게 다양한지'를 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사람들은 고민했다. 국권 회복이 되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 상하이, 하와이, 도쿄 등 세계 곳곳에 퍼져 있던 이유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공산주의 등 국가의 다양성을 경험했다. 그게 우리의 20세기 초반 역사이다”라며 “하지만 해방 이후, 이들은 결국 '어떤 한국인이 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현재 남북으로 갈라서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이다"라고 말한다. 함 교수는 한국사람을 다섯 종류로 정리했다.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주의파 등이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는 한 사람당 하나가 아닌, 한 사람 안에 다섯 가지가 섞여 있는데, 문제는 이들이 정리되지 않고 서로 다르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함 교수는 "지금 한국은 인프라, 경제력 모든 걸 갖추고 있지만 문화적·사상적 측면에서의 한국사람은 없다.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함이 특색이 될 수 있다. 다양성을 이용해 새로운 걸 만들 수 있다. 독창적 문명이다.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고, 우리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한국사람 만들기.'이다"라고 말했다. 함 교수는 한국사람을 부르는 공통된 호칭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북한사람, 중국동포, 조선족, 고려인, 재일교포, 민단, 조총련, 재미교포 등. 이들을 모두 포용하려면 한국사람은 영토를 넘어서야 하는 개념인 동시에 한국에 이주해 사는 외국인들을 포용하려면 혈연도 넘어서야 한다. 같은 영토도 아니고 같은 혈통도 아니라면 한국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한국어?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2세대만 지나도 한국어가 쉽지 않고 3세대부터는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흔하다. 국내에 이주한 외국인들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는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한족’ 만들기 시작했고, 한국은 ‘통일신라’가 신라인 만들기를 시작한 후 고려인, 조선인, 한국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사람 만들기’가 한국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소속감을 느끼고 연대할 수 있는 수단이어야지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정치학자 겸 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서 ‘민족은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공동체일 뿐”이라고 썼다. “많은 국가가 민족의 이름으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민족, 민족성, 민족주의 같은 말은 정의조차 힘들다”라고 말한다. 앤더슨은 민족이 근대에 와서 생긴 개념으로, “역사적 숙명으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상상된 공동체인 민족은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닫혀 있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왕권이 약화하고 종교공동체가 붕괴하던 시기에 인쇄술이 발달하자 서로 교류한 적이 없던 이들이 신문과 책 같은 인쇄물을 통해 서로 같은 언어권임을 확인하면서 이 언어집단을 하나의 민족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민족은 때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고취하며, 잘 문명화된 민족주의는 삶을 안정되게 만든다”라며 하지만 동시에 “강한 수평적 형제애나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 내부로만 향할 뿐, 외부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라고 경계심을 높였다.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경계의 안과 바깥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국수주의나 인종주의로 빠지기 쉽다고 경고했다. 맺는말 재인도네시아 한국인은 국경을 넘은 한국인이고, 한국계 인도네시아인은 국적을 넘은 한국인이다. 국제결혼 부부의 자녀는 민족을 넘어선 한국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한국인 2세부터는 한국어를 넘어선 한국인이다. 이들은 한국을 바라보는 동시에 인도네시아도 바라본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함재봉 교수는 ‘한국사람 또는 한국인’이 공통점이 없는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된 공동체라고 말한다. 결국 한국인 또는 한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는 모두를 아우르는 다양성과 포용력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도 우리 스스로의 특징도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고민이 타인을 배제하고 구별하는 행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끝] 한국인만들기 [이미지: 데일리인도네시아]
[조연숙] 재외 한인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조연숙] 재외 한인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재외 한인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인도네시아에 있는 한식당 입구에는 여러 가지 한국어 신문과 광고지가 놓여있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한 현지 한인사회 내 신문과 광고지가 2010년대 초반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인터넷 보급으로 한국 뉴스를 인터넷에서 직접 보게 되고,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확산으로 정보와 뉴스를 습득하는 통로가 디지털로 바뀌면서 한식당 입구에 놓이던 한국어 신문과 광고지가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도네시아 한인 미디어들은 한인사회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보도하고 기록하는 일을 담당해 왔다. 한인회와 대사관 그리고 여러 한인 단체 활동을 알리고 한인들 시각에서 편집한 인도네시아 주요 뉴스와 사설도 다룬다. 배포 범위도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넘어 인도네시아 대학과 한국 주요 정부 부처 그리고 해외 한인회 등 다양하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서 전통적인 뉴스미디어로는 한인뉴스, 데일리인도네시아, 한인포스트, 자카르타경제신문, 인니투데이 등이 있고, 웹사이트로는 인도웹이 있다. 한인회와 한국대사관 그리고 민간기업과 개인들이 카카오톡, 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계정을 만들어서 직접 뉴스와 정보를 공유한다. 장한솔, 하리지선, 한유라, 이정훈, 황우중 등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한국인 인플루언서들이 있지만 이들은 한인보다는 인도네시아인이 주요 구독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 매체는 한인회가 발간하는 <한인뉴스>이다. <한인뉴스>는 1996년 7월 타블로이드판으로 시작해 6개월 후부터 책자 형태로 변경한 후 현재까지 한 회도 거르지 않고 매월 발행한다. 앞서 1975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거류민회 회보>가 발행됐고, 1994년 하반기에는 타블로이드판 형태의 <한인회보>가 발행됐다가 중단됐다. 현재 한인뉴스는 종이 책자 외에도 웹사이트를 운영한다. <데일리인도네시아>는 1999년 4월<스피드넷>이라는 이름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했고, 2009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해 지금까지 발행하고 있으며, 주간 뉴스레터 발행, 웹사이트, 밴드, 페이스북 페이지 등을 운영한다. <한인포스트>는 2005년 10월에 <한나프레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간했고,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한인포스트는 종이신문, 웹사이트, 밴드를 운영한다. <자카르타경제신문>은 2012년 5월에 창간호를 시작으로 종이신문을 발행했으나, 2020년 4월에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온라인 신문으로 전환해 자체 웹사이트와 밴드를 운영한다. 가장 최근에 시작한 <인니투데이>는 2021년 1월 창간했으며 공식 웹사이트 및 밴드를 통해 뉴스를 전달한다. 경제인단체에서 발행하는 협회지도 있다. 재인도네시아한국신발협의회는 <코파의 힘>, 재인도네시아한국봉제협의회는 <코가>, 재인도네시아한국건설협의회는 <창조>를 각각 타블로이드판 월간지로 발행한다. 한편, OKTN(KBS World)인도네시아와 K-TV가 고국의 소식을 영상 매체로 전달했으나, 미디어 환경의 대변혁으로 문을 닫았다. 미디어 환경 급변과 언론의 정체성 위기 미디어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언론과 언론인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콘텐츠 제작과 송출 기술의 발달은 단순히 언론사와 언론인의 급증과 경쟁 심화를 넘어서 언론과 언론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뉴스 취재, 제작, 전송의 기술적 진보는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기자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소형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할 수 있어서 사람이 가는 곳에 카메라도 간다. 드론을 활용한 무인 촬영으로 사람이 직접 못 가는 곳까지 카메라가 간다. 유튜버 혹은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1인 미디어 제작자들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상당수의 유튜버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수준의 정보를 동영상으로 생산해 내고 사실상 뉴스 콘텐츠를 제작하여 송출한다. 베트남전 때는 기자가 취재한 뉴스가 언론사를 거쳐서 시청자에게 도달하는 방식이었다. 걸프전 때는 미군이 브리핑한 내용을 취재기자단이 정리해서 시청자에게 위성으로 중계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우크라이나전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 드론과 보디캠(몸에 착용하는 카메라)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로 송출한 것을 시청자가 보고 있다. 기자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전문 직업인이 된 유튜버 중 일부는 기존 미디어의 뉴스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유튜버가 제작한 동영상, 유튜버가 주장하는 의견을 수용하여 세상을 인식한다. 언론사의 뉴스를 보고 세상을 인식하는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것. 대중매체가 의식적으로 현재 이슈에 대해 대중의 생각과 의견을 설정하는 의제(Agenda) 설정 기능, 프레이밍(Framing) 효과, 프라이밍(Priming) 효과를 유튜브가 대체하고 있다. 재외 한인공동체에서 한국어 미디어의 역할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의 한동섭 교수는 재외한인 언론이 정보 제공과 한인사회 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25일 세계한인언론인협회(회장 김명곤)가 서울에서 개최한 '재외언론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에서 발제자로 나서 ‘재외 한인 언론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재외동포에 대한 재외동포 언론의 기능에 대해, 한 교수는 정보 제공, 구심점 기능, 위기관리 기능, 교육 및 사회화, 재외동포들을 위한 의제 설정과 여론 형성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해외 한인 미디어들이 과거에는 고국 소식을 전달하는 기능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으나, 인터넷의 발전으로 재외 교포들이 직접 고국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된 만큼 이제는 현지에서 필요한 뉴스를 취사선택해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주한 국가에 새로 정착하는 동포들은 물론 현지에 오래 체류 중인 동포들도 언어장벽, 제도에 대한 정보 부재,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현지 생활이 어려울 수 있는데, 재외동포 언론이 현지의 법, 제도, 정책, 문화 등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인공동체 내에 한인회, 종교단체, 문화단체 등이 있지만, 재외동포언론은 이들 단체보다 접근성이 좋다며, 재외공관은 물론 한인회도 공신력 있는 재외언론을 주요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인 미디어는 자연재해, 정치 사회적 소요사태 등 안전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재외언론은 이민 후속 세대에 문화를 전수하고 한국어를 교육하는 기능과 함께 재외동포를 위한 의제 설정과 여론 형성 기능을 한다. 고국인 한국에 대해, 재외한인 언론은 이민자와 유학생 등 해외 체류 한인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서 한국 중심의 구심력을 강화하고, 재외 한인사회를 조직화하고 한국과 조직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다. 재외한인 언론은 한국 문화 소개와 한국어 교육 기능 그리고 한국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을 제고하게 하는 등 해외 홍보 기능도 있다. 거주국인 인도네시아에 대해, 재외한인 언론은 거주국 다문화·소수사회(한국 동포사회) 성장과 안정화 기능을 한다. 재외한인 언론을 위한 제언 한동섭 교수는 재외한인 언론사와 언론인에게 향후 지속성과 발전을 위해 ▲재외한인 언론 네트워크 활성화. * pool 형성. 취재 공조 및 기사공유 ▲현지 언론 및 한국 언론, 언론 유관기관과의 업무교류 활성화 ▲사업다각화 추진 ▲현지 공관 및 기업과 협력관계 활성화 등을 제안했다. 그는 재외한인 언론이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려면 충분한 인력과 기술력, 한국 정부의 지원과 업무협조가 필요하다며, 한국 정부에 재외한인 언론에 재정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재외 한국공관과 지원 및 공동 사업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현지 한국기업에는 재외한인 언론에 대한 재정지원과 광고 협조 등을 촉구했다. 한국이 이민 사회로 전환하고 있어서 현지화한 한인들도 역이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며, 고국에 대한 정보를 발굴해 주는 역할을 제안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조연숙]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회를 보며 “인도네시아 한인 기록소”를 떠올리다
[조연숙]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회를 보며 “인도네시아 한인 기록소”를 떠올리다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회를 보며 “인도네시아 한인 기록소”를 떠올리다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1부 익히고 가르치며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로 개인들이 공부하던 책과 명찰, 상장, 졸업앨범 등과 함께 교련복과 훈련 때 쓰던 총도 있다. [사진: 데일리인도네시아]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잘 드러낸다.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기증한 여러 서류와 사진 그리고 물품 등을 통해 1960~1980년대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 지폐와 영화포스터 수집품 중에는 내가 기억하는 것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한국전쟁 후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 활동들이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고, 후대와 국가의 미래를 위한 토대가 되었음을 전시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개인 기증품 전시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먼저 전시회를 살펴보자. 서울 세종대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상설기증관 입구에 들어서면, “1부 익히고 가르치며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로 개인들이 공부하던 책과 명찰, 상장, 각종 인증서 등과 함께 교련복과 훈련 때 쓰던 총도 있다. 문맹퇴치 교육을 받던 어른이 쓰던 영어노트는 너무 예뻐서 오히려 마음이 아렸다. “2부 여러분을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켜 드립니다” 코너는 1960~1970년대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철도와 택시와 관련된 사진, 제복, 승차권 등이 전시됐다. “3부 야무진 손 끝으로 옷을 지어드립니다” 코너는 같은 시기 양장점, 봉제공장, 의류판매점 등 의류업에서 활동한 종사자들이 기증한 재봉틀과 의상 관련 서적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4부 이방의 불모지에서 내일을 꿈꾸다” 코너에는 1960~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중동 사막으로 건너간 건설노동자들의 개인일기, 항공권, 비자, 여권, 양말 등 개인 물품과 사진들이 있다. “5부 할머니 손은 약손, 이젠 옛말”은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의 활동과 미국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벌인 결핵예방 운동 등과 관련된 포스터와 의료기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6부 “꾸준함의 힘, 당신의 취미도 역사가 됩니다” 코너에는 우표, 담배, 엽서, 영화 포스터 등 개인이 취미로 모으던 것들이 일정 시대와 분야를 설명하는 자료를 축적하는 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기증관에 대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근현대사 박물관으로, 과거는 물론 동시대의 유의미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의 면면과 시대적 흐름을 살릴 수 있는 사료로써 개개인의 추억이 깃든 자료들을 10년 이상 기증받아 모으고, 이들을 테마에 따라 재구성해 상설기증관에 전시하고 있다. 상설기증관에 대해, 박물관 측은 “동시대를 살아낸 이들에게는 공감의 창이 되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간접 체험의 장이 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개인이 기증한 물품과 자료들은 박물관 곳곳에 숨결과 이야기를 불어넣고, 비어 있는 역사의 조각을 맞추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나만의 기억’이 ‘모두의 추억’으로 공유되는 공간”과 “내 일이 내일이 되다” 등의 전시 제목에서 상설기증관의 역할을 추측할 수 있다. 앞서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은 상설기증관이 “기증 자료를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자, 기증자의 삶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여, 기증 문화 확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한 바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공공역사, 일반인에게 확장되는 역사 기술과 교육 수준이 상승하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요즘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에 국가와 대학교를 포함한 연구기관에서 주로 행하던 활동이 일반인에게 확장되고 있다. 공공역사는 역사학계와 전문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나 그 경계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역사 실천을 의미한다. 공공역사 현상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사 국정교과서 논쟁이나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영화·드라마 등)의 흥행 그리고 역사박물관에 대한 관심 등을 꼽는다.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와 관련된 역사 논쟁에서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지식과 활약은 전문가들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전시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한인 기록소/기증관/역사의집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는 장윤원 선생이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디딘 1920년부터 시작하면 100년 이상이 되고, 양국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1973년부터 해도 50년이나 된다. 통상 역사는 국가(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와 주요단체(재인도네시아 한인회)를 중심으로 기록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모든 한인의 이야기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쌓아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이제는 모아서 보존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인 기록소, 기증관, 역사의집, 박물관… 어떤 이름으로든지. 올해 초 열린 한-인니 수교 50주년 민간실행위원회에서 한인기록소를 설립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우선 나이가 들어서 세상을 떠나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사람들은 개인이 보관하던 기록과 자료를 새로 이주하는 곳으로 가져가기가 어렵다. 2020년에 재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를 편찬할 때도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과 자료들이 공식적인 기록에 빠진 부분을 채워주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자료들이 훼손되거나 소실되기 전에 이를 기증받거나 구입해서 모아야 한다. 개인의 자료들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고, 기온과 습도가 높은 인도네시아에서 부식되거나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는 방법 등을 배우기 위해 한국의 국가기록원이나 역사박물관과 협력할 수도 있다. 앞으로 꾸준히 자료가 모아지고 예산이 마련되고 운영할 인력이 확보되면 전시장을 갖춘 박물관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소장품 기증에 대한 기증자의 입장을 밝힌 전시해설에 따르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기증자인 전성열 씨는 “기증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고, 길홍묘 씨는 “추억이 담겨 있는 재봉틀을 기증이 가능한지 박물관에 한 번 의뢰해보자! 그렇게 기증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재연 씨는 “제가 수집한 소장품을 관람객들과 함께 공유하며 미래세대에게 우리 삶의 흔적을 전해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인들의 삶의 흔적을 기록해 전해주는 일이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맞는 시점에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끝)
[조연숙] “인도네시아어, 현지인처럼 못해도 괜찮아요”
[조연숙] “인도네시아어, 현지인처럼 못해도 괜찮아요”
“인도네시아어, 현지인처럼 못해도 괜찮아요” 언어가 삶이 될 때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김미소 에세이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022년 03월 30일 출간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수카르노하타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들려온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덩어리와 알파벳이지만 읽어지지 않는 글자를 보면서, 이런 게 ‘문맹’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를 보호해 주던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내 세계가 나를 둘러싼 몇몇 한국인으로 축소된 느낌이 들었다.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세계는 인도네시아어가 들리는 만큼 조금씩 열렸지만, 그때부터는 내가 인도네시아와 한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붕 뜬 존재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20대’ ‘여성’ ‘외국인’ ‘교수’ 책 <언어가 삶이 될 때>는 일본에서 ‘20대’ ‘여성’ ‘외국인’ 교수로 살아가면서, 저자 김미소가 그 나라의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기도 하지만, 어느 나라와 문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면서 언어와 함께, 언어로 세계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저자 김미소는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응용언어학 박사를 취득하고, 일본 다마가와대학에서 '공통어로서의 영어 센터' 전임 교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베트남 출신 새어머니와 함께 다문화 가정에서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고, 정규교육에서 이탈해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으로 1년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며 영어를 가르쳤고, 지금은 일본에서 비원어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없는 시간을 짜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답답함, 어떤 자료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는 막막함, 똑바로 말을 못 해서 오해받는 것 같고, 왠지 모르지만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쁨,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저자가 일본어 초보자가 되어 일본에 갑자기 뚝 떨어져 겪은 심정인데, 인도네시아에 갑자기 오게 된 한인들도 한두 가지는 겪었을 감정이다. 저자는 해외 이주에 대해 ‘다수 속의 소수로 사는 경험’이라고 정의하며, 스스로 새 나라에서 새 언어로 삶을 꾸려가면서 이주여성, 유학생, 이주노동자 등 여러 가지 위치에 서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환경에서 언어에 능숙해지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면서,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언어가 어떻게 삶이 되는지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편안한 모국어의 품을 떠나 낯선 단어와 음성 사이를 헤엄치며 저자는 “외국어 공부도 해외 생활도 경계를 넘어 다니는 일입니다. 편안한 모국어의 품을 떠나서, 낯선 단어와 음성 사이를 헤엄치며, 뭐든지 떠 있는 것을 잡아서 수면 위로 올랐다가 또다시 가라앉고 좌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입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언어, 정체성, 다양성, 차별 등을 경험한 이야기를 하며, 외국에서 현지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성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외국어 배우기를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것에 비유하고,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언어를 정복하거나 완성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모국어, 외국어, 외국인라는 표현도 쓰지만 제1 언어, 제2 언어, 비원어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외국어 학습을 책 속의 지식을 단순히 뇌 안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수준까지 가지 않아도 돼요” 외국어 완성 기준에 대해, 저자는 원어민처럼 말하는 수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외국어를 배워서 새로운 곳에서 자신이 만들어가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그 안에서 기쁘게 여행할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목표를 원어민처럼 말하기가 아닌 ‘해당 언어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냐’에 두어야 한다는 것. 외국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새로운 사회에 생존하고 동화되기 위해서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에서 오롯한 인간으로 서 있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주한 국가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수록 그리고 이주민 커뮤니티와 멀어질수록 현지 사회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언어는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은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미국에서 영어로 안 되는 전화라도 일단 준비해서 걸어보고, 실수하더라도 부딪쳐보고, 없던 취미 생활이라도 만들어서 사람을 만나고, 움츠러들더라도 저자가 하려는 말을 계속했다고 회상했다. 저자는 2019년 2월에는 취업도 계속 실패하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에도 계속 떨어지던 시기에도 “나는 반드시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 거야. 이렇게나 많은 실패를 쌓아왔으니까”라고 생각할 만큼 낙천적이다. “완벽한 영어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저자는 “완벽한 영어 같은 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한다. 영어에는 완벽함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규칙이 없고, 용례가 쌓여서 규칙이 만들어지고, 규칙 역시도 새로운 용례가 쌓이면서 계속 바뀐다는 것. 또한 영어 용례는 원어민이 쌓는 것보다 비원어민이 쌓는 경우가 훨씬 많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기도 하므로, 정확한 규칙을 지키기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해 상대와 협력하여 의미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한 사람이 처한 위치도 그가 언어를 배우는 데 고려할 점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이 환대받는 위치에 있는지, 멸시받는 위치에 있는지.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 더듬더듬 말을 건넸을 때 해당 언어를 쓰는 주변 사람들이 친절히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것 같은지, 혹은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거나 듣지 않으려 할 것 같은지. 말을 잘하지 못하거나 문화를 몰라서 무례를 저질러도 주변 사람들이 상냥하게 알려주거나 이해해 줄 것 같은지, 아니면 찬바람을 쌩쌩 풍기며 “너희 나라 애들은 다 그래?”하고 비웃을 것 같은지. 저자는 한국인이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하지만, 영어로 ‘경험’을 쌓은 적은 드물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언어로 쌓은 경험만큼 언어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영어를 배운다는 건 전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익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저자가 영어와 일본어에 대해 한 말을 인도네시아어로 대치해보고 싶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운다는 건 인도네시아인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익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 문화와 한국문화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내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 책을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 하지만 방향을 못 잡고 있거나 실패한 사람들에게 권한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책이 답하다6] 동남아시아에서 ‘뻐라나깐’의 역할과 의미
[책이 답하다6] 동남아시아에서 ‘뻐라나깐’의 역할과 의미
[책이 답하다6] 동남아시아에서 ‘뻐라나깐’의 역할과 의미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자카르타 구도심에 있는 유럽풍 건물에 중국식과 자바식을 섞은 인테리어, 해산물과 향신료를 많이 사용해서 중국식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을 ‘뻐라나깐’ 레스토랑이라고 부릅니다. ‘뻐라나깐(peranakan)’을 인도네시아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혼혈인’ 또는 ‘후손’이라는 뜻이 나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또는 ‘싱가포르를 포함해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 반도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과 현지 주민 사이에 형성된 혼합문화’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뻐라나깐의 정확한 의미는? 형성 배경은? 중국계 혼혈인만 부르는 호칭일까? ‘뻐라나깐’에 대해 책 <화교 이야기>(김종호 지음)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책> 제목: 화교 이야기. 중국과 동남아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저자: 김종호 출판사: 너머북스 출판일: 2021년 01월 29일 중국계 뻐라나깐 [이미지: 책 <화교이야기> 캡처] <묻고 답하기> (묻다) 뻐라나깐은? (답하다) 뻐라나깐은 외국(유럽, 아랍, 인도, 중국 등)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인과 그들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다. 뻐라나깐은 말레이어(멀라유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이(local-born)”를 의미한다. 뻐라나깐은 종족에 따라 중국계 뻐라나깐, 아랍계 뻐라나깐, 네덜란드계 뻐라나깐 및 인도계 뻐라나깐 등으로 부른다. (묻다) 뻐라나깐을 중국계 후손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답하다) 동남아시아로 온 이주자 중 중국계 뻐라나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중요성 역시 가장 큰 까닭에 중국계 뻐나라깐을 가리키게 됐다. (묻다) 혼혈이 아닌 중국계 후손도 뻐나라깐이라 부를 수 있나? (답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꼭 혼혈이 아니더라도 2세대, 3세대에 걸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현지에 동화된 중국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묻다) 유럽국가의 동남아시아 진출과 뻐라나깐 그룹의 의미 (답하다) 유럽 국가의 동남아시아 진출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혼혈 그룹은 크게 유럽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 중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 등이 있다. 국적 혹은 종족이 다른 부모를 가진 혼혈인은 두 지역 모두에 속하면서 또 그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특징으로 인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각종 문명의 교차로였던 동남아시아 역사 속 혼혈 그룹은 그 다양성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묻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계 뻐라나깐의 역할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는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했다. 여기서 중국인 남성과 현지인 여성의 혼혈인 중국계 뻐라나깐 그룹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가 작용하는데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시 말해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 또한 중국계 뻐라나깐은 중국인 그룹과 말레이 현지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특징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 말라카, 페낭 등 영국 식민정부가 통치하던 항구도시에 살던 중국계 뻐라나깐들은 일찍부터 영국식 교육을 받아서 영어에 능통하고 혼혈의 특성상 중국어(정확히는 푸젠 지역 등 중국 방언)와 말레이어 모두 구사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묻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인이 중국인에게 요구한 역할은? (답하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 정착한 중국인 이주자는 네덜란드나 스페인 상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고, 멕시코 은, 유럽과 서아시아산 물품, 동남아시아의 진귀한 물산(향신료 등)을 가지고 대륙으로 돌아가는 방식의 무역을 했다. 이를 위해 유럽인들은 유럽인이 장악한 도시와 도시에 공급되는 자원이 생산되는 현지 농촌에 중국인 이주자가 진출해 정착하길 원했다. (묻다) 이주자가 현지 여성과 결혼을 통해 얻은 것은? (답하다) 유럽인,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등은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무역을 행하면서 현지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현지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상업적 기회를 다양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중국인 남편을 둔 현지 여성은 외국인인 남편의 신분을 보장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직접 현지 사회와 남편 사이의 상업 협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고, 해외 교역과 같은 상업 분야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이후 그들 사이에 발생한 혼혈 그룹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았다. (묻다) 중국인은 언제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나? (답하다)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서 상거래를 한 시기는 당·송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 말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명 조정의 중앙권력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수천명 단위의 중국인이 상인을 중심으로 말라카, 바타비아, 마닐라 등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는 산업혁명 영향으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운영 방침을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진출하는 ‘무역’ 중심에서 내륙을 점령해 생산력을 늘리는 ‘착취’로 변경함에 따라 수만명 혹은 수십만명 단위의 중국인이 건너오게 된다. (묻다) 뻐라나깐으로 대표되는 중국인 구이민자는? (답하다) 대량 이민 이전, 중국 상인은 청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수가 동남아시아 땅에서 현지화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스페인의 식민정책 변화에 발맞추어 서구 제국이 조성한 플랜테이션 농장 및 광산을 대리 경영하거나 고리대금업을 동족인 중국인 혹은 원주민(말레이인 및 필리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면서 부를 쌓아서, 이들을 징세청부업자(Tax-farmer)라 부른다. 이 시기에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은 주로 푸젠성과 광둥성의 상인이다. (묻다) 또똑이라 불리는 중국인 신이민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중국인들이 광산과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수만명 또는 수십만명 단위로 이주한다. 이들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또똑(Totok)이라 불렀고, 영국령 말레이와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 등지에서는 이들을 싱커(Singker)라고 불렀다. 또똑은 중국에서 출생한 사람들로 미처 현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묻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해양부 동남아시아에서 외국인 공동체 운영 방식은? (답하다) 해양부 동남아시아는 유럽인이 진출하기 전부터 동서교역을 잇는 중요한 지역으로 해상교역이 활발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지역에 대규모 교역항이 설립됐다. 또한 다양한 지역에서 온 상인들은 천년이 넘는 매우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들만의 관행에 따라 교역을 했다. 각 항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인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머물다가 떠나기도 하고 정착하기도 하면서 외국인 공동체가 형성됐고, 이들은 각 공동체의 내부 규범에 따라 통제됐다. 예를 들어 이슬람 왕국이더라도 항구에서 교역하는 중국 상인, 힌두 상인, 불교 상인은 외부 활동은 이슬람 율법을 따라야 하지만, 각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각각의 내부적 관행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고, 이를 위해 각 공동체는 내부의 장을 뽑아서 운영했다. (묻다) 까삐딴(kapitan) 시스템은? (답하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급증한 신이민자를 통제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공동체의 대표인 까삐딴을 임명했다. 중국인 공동체의 경우는 무조건 그 그룹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가 까삐딴으로서 권력을 갖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까삐딴은 주로 뻐라나깐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뻐라나깐은 대부분이 일찍부터 정착하여 돈이 많고, 각종 언어에 능해 중개자로서 기능을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묻다) 구이민자와 신이민자의 관계 (답하다) 뻐라나깐으로 대표되는 구이민자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언어에 능숙하며 식민정책에 깊이 관여하여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이민자의 고용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신이민자의 경우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득권을 상징하는 뻐라나깐·구이민 그룹과 피고용인으로서 주로 중국인 공동체에서 빈곤계층을 이루어 있던 신이민자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골은 20세기 신해혁명과 중일전쟁, 공산주의 열풍 등의 격변을 거치며 충돌해, 말레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화교공동체 내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묻다) 뻐라나깐의 그늘은? (답하다) 중국계 혼혈 즉 뻐라나깐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은 20세기 해양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여 건국하는 과정에서 보였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강력한 반화교·화인 정서의 근간이 됐다. (묻다) 동남아시아 지역 항구도시들은 어떻게 건설됐나? (답하다) 유럽에서 온 상인들이 항구에 도시를 건설하고 무역을 행했다. 유럽인들이 지배하던 대표적인 도시는 바타비아, 말라카, 마닐라 등이다. 향신료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각종 천연자원 및 경작물이 유럽과 아시아 각 지역에서 인기가 많았다. 이에 16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이후 18,19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앞서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들이 무역을 하고 있었고, 여기에 유럽인이 참여하면서 경쟁이 극심해졌다. (묻다) 싱가포르에 유럽계 뻐라나깐들이 모여 살게 된 이유는? (답하다)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유럽인(네덜란드와 영국)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유라시안(Eurasian)이라고 부르며,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유럽 국가가 동남아 진출한 이후 건너온 직원, 선원, 군인과 현지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은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다가, 19세기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에게 살기 편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면서, 싱가포르로 대거 모여든다. 이들은 혼혈로서 동남아 지역사회에 깊이 적응하고 있었지만, 주로 유럽 제국주의 식민정부 아래에서 생존해 온 그룹으로 친서구적 특성을 꾸준히 유지했다. 유라시아인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네덜란드가 형성한 연합군에 소속되어 인도네시아인과 전쟁을 벌였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책이 답하다4]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
[책이 답하다4]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
[책이 답하다 4]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계 무슬림은 종교와 종족을 초월한 화합의 상징으로 여겨진 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인에게는 중국인이라고 배척당하고 중국인에게는 무슬림이라고 배척당하는 이중 차별에 놓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15세기 무렵부터 중국인 상인들은 무슬림으로 인도네시아로 오기도 했고 비무슬림으로 왔다가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중국계 공동체 내에서 무슬림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에 대해 <화교 이야기>에서 정리해 문답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책 소개> 제목: 화교 이야기 중국과 동남아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저자: 김종호 출판사: 너머북스 출판일: 2021년 01월 29일 <묻고 답하기> 묻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화교는 불교, 기독교, 유교만 믿을까?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도 있을까? 답하다) 인도네시아 화교 중에도 적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소수에 속하는 중국계에서도 무슬림은 드물기 때문에 소수 중에서 소수라고 불린다. 묻다)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은 언제부터 있었나? 답하다) 15세기 무렵부터 중국 남부 지역의 푸젠이나 광둥에서 건너온 중국인 상인들이 주요 거점인 자바섬 북부지역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무슬림 공동체에 스며들기 위한 전략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몇몇 중국인 상인은 지배계층과 혼인을 통해 이슬람화하면서 당시 자바 북부 이슬람 세력의 지배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묻다) 인도네시아로 간 중국인들이 이슬람화한 이유는? 답하다) 15세기 전후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 상인의 위력이 가장 셌고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슬람화가 가속되면서, 상당수의 중국계 상인이 결혼 및 개종을 통해 지역사회에 동화하고자 했다. 묻다) 15세기 전후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 상인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나? 답하다) 이슬람 상인은 유럽-서아시아-남아시아-동남아시아-동북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으로 ▲당시 이슬람 세력이 세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슬람 상인의 상업 및 금융 기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하여 있었으며 ▲동양과 서양의 상품을 교역하는 유일한 상인 그룹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상업 행위를 할 때 이슬람 법률에 기반한 상업 관행을 유지했고,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오랑 라웃(Orang Laut)이라 불리던 현지 해상민족과 중국인 상인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묻다) 15세기 무렵 형성된 자바 북부 항구도시의 역할은? 답하다) 현재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드막, 수라바야, 끈달 같은 항구 도시들이 15세기 무렵 형성된다. 이들 항구 도시들은 동서 교역의 주요 교통로인 말라카와 향신료 주산지인 말루쿠제도를 연결해 주는 중개지역 역할을 했다. 묻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화 과정은? 답하다) 자바와 수마트라 및 부속 군도, 보르네오섬 등 지역의 이슬람화는 13세기 후반을 그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도계 이슬람 상인이 직접 동남아시아에 이슬람교를 전파했고, 15세기 전후로 무슬림이 된 중국인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중국인들도 인도네시아와 무슬림들을 연결하며 이슬람을 퍼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6세기 즈음에는 자바섬 북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아랍, 인도, 말레이, 중국인 등 다인종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교역을 매개로 서로 다른 종족적 배경을 지난 상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 1572년 자바 최초의 이슬람국가 드막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바 북부 항구 도시들 간 이슬람 연합세력이 힌두교와 불교 중심의 마자파힛 왕국을 무너뜨리고 자바 지역을 장악한다. 이를 계기로 중부자바에는 마타람 술탄국, 서부자바에는 반뜬 술탄국이 형성되고 자바섬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묻다) 정화(쩡허) 제독의 남해대원정이 인도네시아에 미친 영향은? 답하다) 정화 제독의 남해대원정은 명나라 때인 1405년부터 7차례나 진행됐다. 정화는 동남아시아의 말라카를 거쳐 자바에도 머물게 되는데, 당시 자바 지역에 있던 중국계 이슬람교도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자바 지역과 말라카 주변 말레이 세계의 이슬람화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화의 이름을 딴 무슬림 사원이 팔렘방, 즘버르, 반자르마신, 수라바야 등 여러 곳에 분포한다. 정화사원은 중국의 도교사원처럼 지어진 이슬람 사원이고, 내부 종교행사를 중국어로 진행하는 등 화교로서의 정체성 강조하고 있다. 묻다) 19세기 이후 중국계 이슬람 공동체가 소수 그룹으로 급격하게 전락한 이유는? 답하다) 자바섬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정통 이슬람교의 확산, 반화교 정서, 민족주의 확산; 중국에서 이주하는 화교의 급증과 화교들이 본국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면서 현지화 노력이 약해진 점; 중국계 공동체와 원주민 공동체를 분리하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분할통치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묻다) 중국계 무슬림은 얼마나 되나? 줄어들까 늘어날까? 답하다) 중국계 공동체 내에서 무슬림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83년 통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전체 화교 220만 명 가운데 무슬림은 0.5% 정도였으나, 2010년에는 260만 명 가운데 5% (약 13만 명)로 늘었다. 중국계 가정 내에서도 구성원의 종교가 달라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3세대, 4세대 화교 후예는 현지 무슬림과 함께 교육받고, 생활하며 일하는 과정에서 현지화 하면서 개종하기도 하고, 혹은 결혼을 통해 개종하기도 한다. 묻다) 중국계 무슬림이 겪는 어려움은? 답하다) 중국계 무슬림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중국인이라고 배척당하고, 다른 중국계에게는 무슬림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는 이중 차별 속에 놓여있다. 심지어 무슬림임을 밝힐 경우 가족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어릴 때 개종을 하고도 감추며 사는 사람도 있다. 묻다) 중국계 무슬림은 어떤 정체성을 갖나? 답하다) 무슬림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는 먹지 않지만, 음력설을 쇠는 등 문화적으로 복잡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묻다) 중국계 무슬림은 어디에서 기도하나? 답하다) 중국계 무슬림들은 그들끼리 모스크를 짓고 중국어로 신께 경배를 드리는 등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계 무슬림 협회(Indonesia Chinese Muslim Association PITI)가 형성되는 등 그들 스스로 집단화, 제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묻다) 중국계 무슬림의 미래는? 답하다) 중국계 무슬림은 인도네시아 국가 통합과 조화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부상에 따라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국계이지만 무슬림인 이들을 중국-인도네시아 간 관계의 연결점으로써 상징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이들이 소수 중의 소수 그룹이라는 딱지를 벗을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끝)
[책이 답하다3] 제로 이코노미 /조영무
[책이 답하다3] 제로 이코노미 /조영무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독자가 묻고 책이 답하는 문답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주- ----------------------- 제목: 제로 이코노미, 모든 것이 제로를 향하는 한국 경제의 위기와 기회 저자 : 조영무 (LG경제연구원 경제 연구 부문 연구위원)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20. 12. 16 쪽수 : 284쪽 ----------------------- 제로 금리, 제로 물가 상승률, 제로 출산율… 모든 것이 제로를 향하는 ‘제로 이코노미’가 시작된다! “썰물이 빠졌을 때 비로소 누가 발가벗고 헤엄쳤는지 알 수 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이 말은, 지금 전 세계 경제 상황에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표현이다. 코로나 이후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는 어떻게 될까? 무엇을 대비하고, 어떻게 내 자산을 지킬까?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겪으며, 방역 관련 소식과 함께 경제 뉴스가 대대적으로 소비된 한해였다. 개인도, 기업도 ‘앞으로 경기가 어떻게 될까?’ ‘어디를 사고, 무엇에 투자해야 할까?’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런데 ‘서학개미’부터 ‘영끌 아파트’까지 투자나 재테크에 이토록 관심이 커진 데 비하면 팩트에 기반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 거시적 동향을 짚어주는 정보는 너무나 희소하다. 밑도 끝도 없이 뭘 사라는 재테크 유튜버들을 믿기도 불안하고, TV? 신문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단발성 분석만으로는 도대체 뭐가 뭔지,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 한국 경제, 대침몰인가, 대도약인가? 격랑 속 기회를 찾는 개인과 기업이 알아야 할 모든 것 LG경제연구원에서 지난 20년간 국내외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을 분석해온 국내 최고의 매크로 이코노미스트 조영무 박사가 ‘제로 이코노미’라는 파격적인 키워드를 내놓았다. ‘제로 이코노미’는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된 ‘매우 어둡고 혼란스런 경제 상황’을 일컫는 말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능가하는 ‘길고 혹독한 침체’를 의미한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급격하게 쪼그라드는 경제, 정부부채 폭증과 재정 건전성 악화로 인한 국가신용등급 강등 가능성, 급증하는 좀비기업으로 인한 경제성장률·경제역동성 저하, 취업 기회 를 잃어버린 ‘코로나 세대’가 부른 가계 빈곤화 등이 우리 경제를 ‘제로 이코노미’로 이끌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빨라지고 가까워졌다는 것이 조영무 박사의 진단이다. 조영무 박사는 올해 초 경제 관련 인기 유튜브 ‘삼프로TV-경제의 신과 함께’에 출연해 코로나 경제 전망을 내놓았는데, 놀랍게도 그 전망이 대부분 들어맞아 큰 화제가 되었다. 대충 때려 맞힌(?) 우연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예언도 아니었다. 국내외 정세를 종횡으로 꿰고 산업별 거시적 흐름을 읽으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전망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조영무 박사의 첫 단독저서로, 코로나 이후 다가올 ‘제로 이코노미’ 상황을 심도 깊게 분석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개인, 기업, 정부의 대응방안을 구체적으로 담았다. “누군가에게는 전례 없는 위기가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다!”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과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진 상황이 온다면? 젊어서 돈 모아 나이 들어 그 돈으로 살겠다는 노후계획이 다 소용없어졌다면? 기업 10곳 중 4곳은 좀비기업이 되어 멀쩡한 기업까지 쓰러뜨리는 상황이 온다면? ‘소비 협곡’에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로 경제성장의 동력마저 바닥난다면? 코로나 이후 이러한 가정이 모두 현실화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로 이코노미’는 한국 경제가 맞이할 새로운 국면이다. 앞으로는 완전히 달라진 프레임으로 경제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코로나 장기화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2024년 ‘소비 협곡’, 계속되는 ‘돈 풀기’와 ‘자산 인플레’ 상황에서 취해야 할 투자전략은 무엇인가? ‘누구를 살릴 것인가’의 고통스러운 선택의 순간에 선택받기 위한 기업의 대응전략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미래 상황에 대해 개인과 기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빠짐없이 담았다. 주식, 부동산에 관심 있는 개인은 물론이고 신사업 기회와 매출부진의 돌파구를 찾는 기업까지, 큰 흐름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할 것이다. 읽기 쉬우면서 경제 개념을 잡을 수 있는 책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제로 이코노미로 이행을 가속화시키는 ‘코로나19의 경제적 충격과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우리 경제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제로 이코노미의 모습과 특징’에 대해, 3부에서는 다가오는 어두운 미래를 피하기 위해 찾아야 할 ‘우리 경제의 활로’와 가계, 기업, 정부 각각의 ‘대응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다루는 모든 이슈들에 대해 해당 꼭지의 후반에 ‘대응 포인트’들을 별도로 제시한다. 저자는 “경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부담 없이 읽으며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는 ‘읽기 쉬운 책을 쓰는 것이 시작할 때 목표였다”라고 적었다. 경제를 어렵게 여기게 만드는 경제용어들을 최대한 풀어서 썼고 가능한 비유를 많이 활용해서, 책을 읽으면서 경제 용어의 개념을 잡고 경제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단순히 ‘제로 이코노미’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경계심을 바탕으로 ‘제로 이코노미’를 피해가거나 ‘제로 이코노미’에서 생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희망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했다. 이 책을 중간에 놓지 않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 묻고 답하기 질문)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답하다) 코로나19는 우리 경제의 제로 이코노미로의 이행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폭증한 기업과 가계 부채는 향후 빚 갚는 부담을 늘려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다. 급격히 악화된 재정 건전성과 정부부채 때문에 수년 내에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높다. 급증하는 좀비기업들은 경제 역동성과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릴 것이다. 저소득층에 집중되는 고용충격으로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 취업 기회를 잃어버린 청년층이 ‘코로나 세대’로 남게 되면, 그 악영향이 평생 지속되고 부모 세대를 포함한 가족 전체의 빈곤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산율, 경제 성장률, 물가 상승률, 금리 등 제로에 근접하는 시기를 앞당기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질문) 제로 이코노미(zero economy)’란? 답하다) 한국이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0명대 출산율, 0%대 경제 성장률, 0%대 물가 상승률, 0%대 금리 등 지표들이 제로로 수렴하는 현상. 인구가 줄면서 소비는 위축되고 경제는 쪼그라든다. 매출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가 사라진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못한다. 초저금리 하에 예금으로는 돈 불리기가 어려워지면서, 많이 풀린 돈이 쏠리는 부동산, 주식 등 자산가격은 오른다. 재테크와 노후대비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휩쓸리듯이 혹은 등 떠밀리듯이 ‘고위험-고수익’ 투자가 급증한다. 성장이 정체된 시장을 놓고 벌어지는 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질문) 한국의 제로 이코노미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어떻게 다른가? 답하다) 저자는 한국 경제도 점점 ‘제로’로 시작하는 경제지표들이 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고 본다. 우선 원화는 엔화 같은 국제통화가 아니다. 국제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지면 원화 가치는 급락하지만 엔화는 안전자산 대접을 받으며 도리어 가치가 오른다. 우리는 일본만큼 해외에 막대한 부를 쌓아두지도 못했다. 일본은 무역수지가 적자가 되더라도 해외에 축적해둔 막대한 자산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 덕분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역수지 흑자 유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출산율 하락 속도와 고령화 진행 속도는 이미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 경제가 일본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라고 보았다. 질문)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답하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더라도,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경제활동의 단절로 인한 손실은 언젠가는 만회되고 이전의 경제활동 수준을 회복하겠지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 우리가 사는 방식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제 성장세는 한 단계 낮아지고 양극화와 차별화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전례 없는 위기’가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다. 묻다)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 수출이 늘지 않을까? 답하다) 원화 가치가 급락해도 과거처럼 수출이 크게 늘어 경기가 좋아지기 어렵다. 과거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원화 가치 급락이 우리 경제의 빠른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아니라 외환위기여서 우리 수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자 수출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는 원화 가치 하락으로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더라도 수출이 크게 늘기 어려운 상황이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경제위기다. 코로나19가 지속될 경우 주요국들의 수요가 위축되어 우리 수출품이 다소 싸지더라도 수출이 크게 늘기 어려울 전망이다. 설령 코로나가 진정되더라도 향후 상당 기간 세계 경제 성장세가 부진할 가능성이 높다. 묻다) 우리나라 기업 ‘열 중 넷’이 좀비기업 된다고? 답하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나라 기업의 1/3은 이미 좀비기업이었고, 코로나19 충격이 더해져 조만간 그 비중은 40%에 달할 전망이다. 좀비기업은 경쟁력을 잃은 기업과 이러한 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자금 수혈이 겹쳐져 만들어진다. 시장 원리에 따른다면 더 이상 돈이 흘러 들어가지 않을 기업에 계속해서 돈을 대주어 죽지 않게 유지하는 것. 코로나19에 대응해 정책당국은 일단 기업이 망하지 않도록 대규모 자금을 수혈하고 있지만, 과거에도 위기를 겪을 때마다 좀비기업이 급증했다. 좀비기업은 다른 정상 기업까지 좀비기업으로 만들면서 경제의 역동성,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경제성장률을 갉아먹는다. 묻다) 코로나19로 인한 고용충격은 불평등하다? 답하다) 코로나19로 인한 고용충격은 저소득층에 집중되고 있고, 그 결과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소득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식당과 가게에서 종업원이 사라지고 있다. 대체로 숙박 및 음식점업, 도매 및 소매업, 대면접촉 서비스업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균 임금이 낮다. 코로나19로 인해 언택트 트랜드와 4차 산업혁명의 도입이 가속화되면서 향후 소득 양극화는 더욱 확대될 것. 소득 양극화 확대는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성을 키워 그 나라의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역사적으로 저소득층이 어려워지면서 심화된 소득 양극화는 극단적이거나 포퓰리즘 정치 세력의 득세로 이어진 사례가 많았다. 저자는 코로나19와 유사한 글로벌 팬데믹이었던 1910년대 스페인독감 이후 유럽에서 전체주의와 공산주의가 득세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코로나19 경제 충격 상황에서도 많은 나라의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성 정책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질문) 기업, 개인, 정부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나? 답하다) ‘대차대조표 불황’과 함께 ‘커다란 빚잔치’에 대비하라, 2024년 ‘소비협곡’이 우리 경제의 ‘보릿고개’가 될 수 있다. 노후대비를 ‘자산소득’이 아니라 ‘근로소득’ 중심으로 바꿔라, 향후 통화정책은 재정정책과 보다 긴밀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묻다) 미래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답하다) 과거의 자료와 숫자만을 보고 투자하는 것은 마치 ‘백미러만 보고 운전하는 것’과 유사하다. 미래에 대하여 투자하고 있다면 내 앞에 무엇이 있는가를 앞유리창을 통해 보면서 운전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관심과 인사이트는 투자, 진학, 취업 등 개인 차원의 중요 의사결정만이 아니라 사업 운영, 기업 경영, 국가 정책 결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끝)
[책이 답하다2] 팬데믹 제2국면 /우석훈
[책이 답하다2] 팬데믹 제2국면 /우석훈
[책이 답하다2] 팬데믹 제2국면 /우석훈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정리한 책을 소개합니다. 독자가 묻고 책이 답하는 문답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주- ----------------------- 제목: 팬데믹 제2국면: 코로나 롱테일, 충격은 오래간다 저자 : 우석훈 (경제학자. 성공회대 교수) 출판사 : 문예출판사 출판일 : 2021. 5.31 쪽수 : 236 ----------------------- 책 소개 팬데믹의 경제적 충격은 오래간다 우리는 지금, 보다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하다 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 발생 이후 1년, 우리는 어디쯤 와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 팬데믹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은 전체 기간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국가 그리고 개인의 대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자가 팬데믹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이것, 꼬리가 아주 길게 나타나는 롱테일(long-tail) 현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이제 막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한 ‘팬데믹 제2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백신의 보급이 곧 팬데믹의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의 경우는 질병으로서도 후유증이 오래가지만, 경제적인 충격도 못지않게 오래갈 것이다.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의 전체 기간을 제1국면부터 제4국면까지 네 단계로 구분하면서, 우리 사회가 팬데믹에 대한 보다 장기적인 전망과 패턴 분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팬데믹 제2국면>의 저자 우석훈은 경제생태학을 전공한 경제학자로 거의 매해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저서를 펴냈고, 성공회대학교에서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88만원세대>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등이 있다. 저자는 우리가 바이러스 없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며, 팬데믹의 경제적 충격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는 자동차산업, 해운업, 자영업, 문화예술계, 돌봄과 대학, 프리랜서, 재택근무, 가사노동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팬데믹이 가져올 경제적 충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앞으로의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팬데믹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변화를 ‘선진국 현상’으로 꼽는다. 코로나의 충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국 경제가 새로운 ‘코로나 균형’을 이루는 데는 대략 4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코로나 균형 속에서 한국은 선진국 최상위 그룹에 속하게 될 것이며, 국제적으로 더 잘사는 나라가 된다는 것. 하지만 이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팬데믹으로 인해 뜻밖의 호황과 지독한 불황이 공존하는 ‘팬데믹 양극화’가 지속될 것이고, 경제 생태계의 약한 고리들은 시장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것. 이 책은 경제라는 큰 흐름 안에서 국가의 정책과 연결해 우리 삶을 설명해 주고 앞으로 개인이 무엇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지,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등을 안내하는 책으로 에세이처럼 잘 읽힌다. (묻다) 팬데믹 직후가 아닌 백신이 나온 후에 책을 쓴 이유는? (답하다) 백신 접종이 시작된 후에 출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백신이 나와야 좀더 안정된 전망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백신 접종 이전에는 많은 것이 너무 불확실해서 논의가 피상적으로 흘러갈 위험이 높았다. (묻다) 책의 부제가 ‘코로나 롱테일, 충격은 오래 간다’이다. 팬데믹 충격이 얼마나 오래 갈까? (답하다) 팬데믹은 발생하고 나서 4~5년 후에야 어느 정도 충격이 가라앉는다. 사스 때도 그랬고 신종플루 때도 그랬다. 일부 국가는 궤도를 심하게 이탈해서 원래 자리를 아예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깊을 수 있다.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이 새로운 균형, 즉 ‘코로나 균형’을 만나게 되는 데 대략 4년이 소요될 것이다. (묻다) 코로나19 백신이 나왔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의 어디쯤 와있나? (답하다) 2021년 현재는 코로나 제2국면이이다. 강력한 바이러스가 다시 안 나온다는 가정하에 팬데믹을 4개 국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제1국면(2020년) 코로나 백신 개발 이전 ▲ 제2국면(2021년) 선진국 백신 보급기. 백신을 확보한 나라와 확보하지 못한 나라 간 국제적 갈등이 높아질 것. 상대적 빈곤감. ▲ 제3국면(2022년)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에 백신 보급. 경제조정기. 선진국 간 여행 가능. 여행수요가 일시적 폭발 ▲ 제4국면(2023년)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에도 백신 보급. 세계적으로 백신보급완료.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 종료를 선언할 수 있느냐가 관심사가 될 것. 이 시점에 팬데믹의 아주 긴 꼬리를 보게 될 것. 한국 경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코로나 균형’을 만나게 될 것. (묻다) 언제쯤 여행이 가능할까? (답하다) 팬데믹 3년 차가 되면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관광도 가능하겠지만 개도국 특히 저개발국가 관광은 어렵다. 베트남을 제외하면 동남아 국가들도 좀 어렵다. (묻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답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삶, 편안하게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일상이라는 의미에서 ‘이전’은 존재하지만, 경제라는 측면에서 ‘이전은 없다’. 한국은 그사이에 선진국 저 앞쪽으로 이동해버렸을 테니까. 돌아갈 2019년의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묻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나? (답하다) 코로나 균형은 한국을 선진국 중에서 제1그룹에 속하게 할 것이다. '코로나 균형' 시점에서 한국은 현재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비슷한 일본을 추월하고 프랑스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미국· 독일·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 등 몇몇 국가만 우리 앞에 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가 대응을 잘해서가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이 받게 되는 충격이 상대적으로 커서 그렇다. (묻다) 현재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답하다) 유래 없는 팬데믹의 영향,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디지털 전환, 그리고 빠른 속도로 선진국 선두로 가면서 발생하는 ‘선진국 현상’, 세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역동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묻다) 팬데믹 시대의 정치적 변화는? (답하다) ▲국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국가와 함께 국경이 돌아왔고, 국경을 넘어가는 게 이렇게 큰일인지 새삼 돌아보게 됐다.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가 개인의 일상성을 결정하는 순간이 왔다. 국가를 움직이는 방식인 정치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고 선거 참여율도 높아졌다. ▲한국에서는 모든 정부자금에 대한 결정권을 쥔 경제 권력이 강화됐다. ▲로컬(지방)의 전면화. 실제로 방역과 경제는 로컬단위로 움직인다. (묻다) 코로나 충격 후 산업의 미래는? (답하다) 코로나로 인해서 매우 좋아질 산업인 A형, 충격은 받지만 제자리로 돌아올 B형, 그리고 어떻게 해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C형으로 분류한다. A형 산업으로 화상회의 플랫폼 '줌' 등 비대면 활동 관련 인프라를 꼽았고, 태양광과 해상풍력 등 재생 에너지, 배달 증가에 따른 오토바이 택배와 대형 쇼핑몰의 물류창고화, 샤넬 등 명품 브랜드의 10대 대상 온라인 마케팅 등은 코로나 회복 후에도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C형은 항공산업과 여행산업이다. 세계화가 첨단이던 시대는 코로나와 함께 종료된다. (묻다) 한국의 방역 성공이 국제적 분업에 미칠 효과는? (답하다) 방역효과로 세계적 노동 분업이 한국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다. 심지어 본사를 한국으로 옮기는 기업도 나올 것이다. (묻다) 선진국 현상과 팬데믹은 한국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 (답하다) 부의 양극화와 소득의 양극화 등 선진국 현상과 뜻밖의 호황과 지독한 불황이 공존하는 팬데믹 양극화의 영향으로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외식이 감소하고, 자영법 비율이 선진국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다. 비혼과 솔로 현상 그리고 1인가족 중심의 삶이 늘면서 개인이 고립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성이 축소되고 획일성이 증가할 것이다. (끝)
[책이 답하다1] 아세안의 시간/ 박번순
[책이 답하다1] 아세안의 시간/ 박번순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아세안에 관한 책을 시리즈로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합니다. 평소에 가지던 의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발췌하는 형식으로 정리합니다. -편집자 주- ----------------------- 제목: 아세안의 시간 저자 : 박번순(고려대학교 경제통계학부 교수) 출판사 : 지식의날개 출판일 : 2019. 11. 쪽수 : 476 ----------------------- 책 소개 아세안 경제는 세계 경제에 어떻게 등장했으며, 오늘날 어떤 강점과 약점을 보이고 있나. 그리고 인구규모 세계 3위에 달하는 아세안 경제의 앞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세안의 시간』은 한국의 시각에서 아세안을 보는 전문적인 지역연구서이다. 박번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경제통계학부 교수가 1989년에 태국 연구를 시작으로 30여년간 한국과 동남아시아와 주변 지역을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를 담았다. 『아세안의 시간』은 한국 경제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동남아시아 경제의 어제와 오늘을 살피고, 동남아시아 경제의 빛만이 아니라 그늘까지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지속가능한 한국 경제의 발전과 신남방정책의 성공을 위한 안내서로 활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아세안의 기초 환경에서부터 천연자원, 주요 산업과 기업, 동남아 경제에 미친 화교 자본의 영향과 한국보다 앞서 진출한 일본 기업의 현황과 명암, 그리고 오늘날 활화산처럼 폭발 중인 베트남 경제, 아세안공동체의 출범과 미래까지 아세안 경제의 모든 주제를 총망라한다. 박번순 교수는 『아세안의 시간』에서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아세안 경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조와 특성을 살펴보고, 그동안 거의 다루지 않은 기업, 산업, 그리고 화교 자본까지 포함하여 분석하려 했다. 또한 아세안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는 등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아세안 경제의 모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한국과 아세안이 가까워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박번순 교수는 도전에 직면한 한국 경제에 새로운 시장과 함께할 친구가 필요하다며, 세계 4대 시장으로 떠오르는 블루오션 아세안, 대외의존도가 70%에 달하는 한국과 성장모델이 필요한 아세안은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번순 교수는 한국이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도 아세안과 가장 유사한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특히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국가로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 사람중심의 동아시아를 꿈꾸는 아세안의 미래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다고 섰다. 책이 답하다 (묻다) 지난 30여 년 간 한국과 동남아의 대외 정치와 경제 환경은 어떻게 변했나 (답하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빠르게 성장하여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 최대 경제국이 됐다. 일본은 한 때 산업기술력으로 서방 세계를 위협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노쇠한 국가로 전락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선도해 왔으나 이제 영향력이 감소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보통국가로 변화하려는 듯하다. 한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 고소득국에 진입했고 민주화도 이루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세계 유수의 생산국이자 교역국으로 거듭났다. 민주화 이후 창의와 혁신의 기반 위에서 탄생한 대중문화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인의 감성을 적시고 있다. (묻다) 동남아에서 다국적 기업은 (답하다) 다국적 기업은 주로 아세안의 제조업을 주도한다. 1960년대부터 진출한 일본 기업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P&G, 네슬레, 유니레버 등 소비재 분야에서 유서 깊은 서구기업도 있다. (묻다) 동남아에서 화교 기업은 (답하다) 아세안에서는 변변한 구멍가게도 다 화교들이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민간기업의 화교 운영 비중이 높고, 상장회사를 중심으로 본다면 대부분은 소수의 화교 가족이 통제한다. 화교기업은 식품, 유통, 금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제조 기술이 취약하고 경험이 일천한 상태에서 내수시장을 지향하고 동남아에 투자를 시작한 다국적 기업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묻다) 중국에 대한 동남아 화교의 역할은 (답하다) 동남아 주요국의 화교 자본가들은 중국이 개방할 때 중국에 투자했고, 중국 제조업체들이 동남아로 진출할 때는 현지 파트너가 되어 동남아 진출을 도왔다. (묻다) 동남아의 약점과 중국의 역할은 (답하다) 아세안은 취약한 역내 인프라와 국가간 인프라 연계성 부족이 약점인데, 일대일로(BRI)사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통한 막대한 중국의 지원금이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묻다) 아세안 사람들이 동북아 사람들에 비해 교육에 덜 적극적인 이유 (답하다) 아세안은 동북아보다 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아세안 사람들은 내세를 믿는다. 현실에 대한 순응도가 높고 마음의 안정을 더 깊이 누린다. 그 결과 동북아 국가에 비해서는 교육에 덜 적극적이다. 경제발전에 따라 싱가포르, 방콕, 호찌민 등의 중산층은 교육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농촌지역에서는 교육이 상대적으로 경시된다. (묻다) 아세안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 상대는 (답하다) 한국기업은 아세안 내구소비재 시장에서 일본기업과 경쟁해야 하고, 경공업 제품 시장에서 중국기업과 경쟁해야 하며, 서비스 시장에서 현지 기업과 경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세안 호텔산업 분야는 토착기업의 경쟁력이 높다.
[칼럼]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고리 만들어 연결하기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고리 만들어 연결하기 글: 조연숙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편찬위원 어린 시절 색종이를 오려서 하나를 고리로 만들고 다른 종이를 고리에 걸어 다시 고리를 만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고리목걸이가 된다.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고리처럼 연결되어서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이하 한인사)라는 무지개 빛 커다란 고리목걸이가 됐다. 한인사 집필을 시작할 때의 막막함이 원고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비추며 형체를 드러낸다. 한인사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한인의 삶을 시작한 인물과 계기 그리고 일제 식민시기에 온 한인과 대한민국 건국 후 인도네시아에 건너온 한인과의 연결 고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에게 고리의 시작은 100년 전 장윤원 선생이다. 장 선생은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해서 더 이상 조국이 그를 보호해줄 수 없게 되자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인도네시아에 와서 정착했다. 이어 약 20년 후 일본의 강압으로 조선인 위안부와 군속들이 인도네시아에 왔고, 장 선생은 일본 패망 후 그들이 귀국하는 과정을 도왔다. 다시 20여 년이 흐른 후 인도네시아에 온 한국인들은 장윤원 선생의 자녀인 장남해와 장평화 등의 도움을 받았다. 또 1940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와서 인도네시아에 남은 김만수와 유형배는 1962년 열린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대한민국 선수단을 지원했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맏형 역할을 하며 각자의 고리를 다음 고리에 연결시켰다. 전설처럼 이야기되던 한인사업가와 한인기업들의 개척기도 한인사에 모아 놓으니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인도네시아와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경제라는 큰 틀에서 움직인 모습이 보인다. 1968년 ‘한국 해외 투자 1호’ 한국남방개발(KODECO)의 원목 사업, 1973년 ‘한국 해외 생산 플랜트 수출 1호’인 대상(당시 미원)의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 건설, 1981년 ‘한국 최초 해외 유전 개발 사업’ 서마두라 유전 공동 개발, 1992년 우리나라 대외무상원조 기관인 코이카의 해외사무소 1호 설치, 한국산 고등 훈련기 T-50과 잠수함의 최초 수출국 등. 한국인들은 낯선 땅 인도네시아에서 없는 길을 만들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발전과 개인의 성공을 이뤄냈다. 1960년대 말 한국기업이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도 있고 사라진 기업도 많다. 한인사를 쓰며 어떤 기업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사라졌는지도 물었다. 인도네시아 원목산업은 원시림에서 나무를 베어서 원목 상태로 수출하다가 원목을 합판으로 가공해서 수출하고 이제는 나무를 심어서 조림목을 가공해 수출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신발산업의 메카는 자카르타 서부 위성도시 땅그랑에서 시작해 서부자바로 이어서 중부자바로 옮겼다. 봉제산업은 노동자들이 재봉틀을 돌려서 만들던 2차 산업에서 ITC기술을 도입해 4차 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인슈퍼마켓은 한국식품을 수입해서 판매하다가 한류를 타고 한국식품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식품수입유통업체로 성장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인기업들은 경쟁하고 협력하며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탄탄한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고 변화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한인기업들은 재인도네시아 한인상공회의소와 각종 산업협회들을 통해 협력하며 한인경제공동체를 키웠다. 인도네시아에 한인사업가와 기업이 진출한 뒤 한국대사관이 설립됐고, 한인회도 한인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다. 현지에 체류하는 한인과 한인기업 입장에서 한인회와 한국대사관의 역할은 위기 때 더 절실하다. 한인회와 한국대사관이 1998년 5월사태 같이 절박했던 순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럼에도 비판을 받은 이유는? 다른 한편으론 2018년 아시안게임과 같이 빛나던 시간에 어떻게 한인과 인도네시아인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했는지 한인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인사에서는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오는 과정, 한국음식 구하기, 한국인의 정체성 교육 시키기, 종교와 문화 생활 등 우리들의 소소한 생활상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대형 사건들이 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폈고, 한류가 인도네시아에 어떻게 확산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한인공동체에서 소수로 분류되고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신자와 유학생들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했다. 마지막 장은 한국 정부 관련 단체와 한인 문화예술 활동 그리고 지한파로 분류되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한인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100년은 한 권의 책에 담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고 1년여의 취재와 집필 시간 그리고 500쪽가량의 책에 정리하기에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변화무쌍하다. 쓰고 나니 빠진 부분도 보이고, 썼다가 지면의 한계로 인해 삭제한 부분도 많아서 아쉽다. 여러분께 들은 이야기와 받은 사진과 자료를 다 기록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이 다음 고리의 시작이 되어서 더 많은 한인과 한인공동체의 이야기들이 기록되고, 내일을 위한 나침반이 되길 바라며 1년 여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끝>
[자카르타 티타임2]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운 벽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벽이 생겼다. 아주 높은 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다. 멀리서 사람이 오면 먼저 거리를 두게 된다. 식당에 가서도 환기가 잘 되는 입구 자리나 사람이 없는 쪽을 찾게 된다. 친구와 만나려 해도 괜히 외출했다가 친구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카톡만 한다.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낯설어 하는 시선에 익숙해 있음에도, 올 초에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된 후에는 지나갈 때 쳐다보거나 경계하는 시선이 더 불편하게 다가온다. 서울-부산보다 더 쉽던 서울-자카르타를 오가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항공편이 줄어서 일정을 맞추기 어렵지만 정기편이 유지되고 비자가 있으면 출입국이 가능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자가격리 14일 때문에 어디서든 1개월 이상 머물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다. 중국 같은 일부 국가는 항공편이 중단됐거나 외국인 입국을 제한해서 갈 수 없고, 유럽국가들도 항공편이 크게 줄어서 서너번을 갈아타고 시간이 안 맞으면 환승하는 도시에서 숙박을 하며 어렵게 이동한다고 했다. 주변에 기침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들짝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알레르기성 기침을 해서, 밖에서는 겉절이와 매운 찜 같은 음식을 잘 안 먹게 됐다. 공기가 나쁜 곳에 가도 기침이 나서, 기억 속에 기침을 했던 곳이면 약속을 잡을 때 꺼리게 된다. 먼지와 건조함 때문에 자동차나 비행기를 탈 때 마스크를 했는데, 이제는 집밖에서는 마스크를 옷처럼 착용한다. 그리고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다가오면 겁이 난다. 자카르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전인 올 2월에 한 지인은 쇼핑몰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현지인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Orang Korea!(한국인이다!)’라고 소리쳐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며칠 전 소셜미디어에 서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쓴 승객이 마스크를 안 쓰고 앉아 있던 다른 승객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요구하며 폭행하는 장면이 올라왔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또 다른 지인은 지하철을 타는 게 꺼려진다고 했다. 대구 신천지, 이태원 클럽, 서울 사랑제일교회 등 집단감염이 확산되면서 청년에서 노인으로 또 일부 종교의 신자들로 반감이 확산되는 모양새이다. 나와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증오하고 배척하던 흐름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강해지는 만큼,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균형을 찾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불확실성 또는 예측불가능은 코로나19가 가져온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사람이 모이는 행사가 여행 등의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 각국이 내외국인의 이동을 제한하고, 확진자가 나오면 건물을 일시적으로 폐쇄하면서 행사는 수시로 취소되고 이민국 업무도 중단돼 비자발급까지 꼬인 사람들이 여럿이다. 가족여행은 취소됐고, 필자의 가족만 아니라 지인들도 자녀의 결혼식을 연기하면서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다른 국가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다른 국가들은 감염자 수가 꾸준히 낮거나 꾸준히 높아서 나쁜 쪽으로 든 좋은 쪽으로 든 상황이 일정하지만, 한국은 중국에 이어 코로나19 진원지처럼 보일 정도로 감염이 확산되다가 감소해서 방역모범국이 됐다. 하지만 최근 다시 우려할 수준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했고, 이런 상황 변화에 따라 환율과 주가가 널뛰기를 하고 각종 일정이 수시로 취소되거나 미뤄지고 있다.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태이다. 코로나19 이후 생활도 바뀌었다. 온라인 활동을 무서워하던 나도 온라인쇼핑을 하게 됐고, 온라인 강의와 웨비나도 참여하게 됐다. 이제는 외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온라인 강의와 웨비나가 편하게 느껴진다. 물론 뭔가 답답한 부분도 있다. 디지털화 속도에 대해 한국은 2023년쯤 구현되어야 할 디지털 기술들이 코로나19로 인해 3년이나 앞선 2020년에 구현되고 있고, 지금 같은 비대면 상황이 계속되면 디지털화가 더 가속화할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후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만나는 사람도 줄었지만, 변화는 더 커지고 빨라졌다. 극장도 공연장도 가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게 됐고, 가까운 이웃이나 반드시 일 때문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 외에는 만나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보이는 또는 드러나는 생활은 위축됐고 생각이 편협해지는 것 같다. 한편으로 보이지 않은 변화는 예측이 안 되어서 두렵다. 인도네시아만이 아니라 베트남 심지어 미국에서도 사업이나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해외에서 일단 멈춤 상태로 향후 변화를 주시하며 활동을 재개할 시기를 가늠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우리는 이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단군신화의 곰처럼 100일 격리를 마치고 나오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 되어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차별과 학살의 상징인 ‘나치’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장되거나 왜곡된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의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더 편협하고 맹목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지? 타인에 대한 경계와 혐오가 더 심해지고, 디지털로 이행한 사람과 오프라인에 남아 있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더 커지고 빈부 격차도 더 심해질 것 같다. 코로나19가 쌓고 있는 벽이 너무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코로나19가 쌓은 벽을 허물고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당장은 코로나19 확산을 차단할 수 있게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 방역지침을 잘 지켜는 것부터. (끝)
[유료]"원목개발·합판제조에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조림산업으로"
"원목개발·합판산업에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조림산업으로"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 인도네시아한인100년사 집필위원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원목 벌채작업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임학과를 전공한 한국인 팀장과 현지인 길잡이로 구성된 임상조사팀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밀림에 들어가 어느 지점에 어떤 크기, 어떤 종류의 나무가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하고, 벌채를 한다면 도로를 어떻게 내면 좋을 지 소상하게 지도에 표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원시림 조사 과정에서 호랑이, 멧돼지 그리고 사슴을 통째로 잡아먹는 10미터에 가까이 되는 비단구렁이 등 맹수들의 위협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맹수만이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산판에서 근무한 한국인이라면, 문화 차이와 언어장벽으로 인해 팀원인 인도네시아 작업자가 한국인 간부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또 보이지 않는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과 향수병을 이겨내며 일궈낸 결과물이 인도네시아 원목개발 사업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기업 해외진출사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코데코(KODECO)와 코린도(KORINDO)는 역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산림 부문 진출은 기존의 원재료 수입 방식에서 벗어나 인도네시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직접 경영을 수행하는 해외직접투자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말 진출해 원목개발을 시작으로 합판제조 등 자원개발 방식의 산업 유형에서 조림과 팜오일 등 지속가능한 친환경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1968년 한국남방개발(현 코데코)이 한국의 해외투자 제1호 기업으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에 진출했으며, 이듬해 인니동화(현 코린도)가 동일 업종에 뛰어들면서 한국 기업에 의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두 기업 외에도 전성기 시절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은 경남교역, 한인흥업, 신흥목재, 유림사리 등 총 7개 업체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산림 분야 사업을 지속하고 있는 기업은 코린도가 유일하다. 자원민족주의 태동... 산림산업의 변화와 대응 산업화가 태동하던 1960년대 한국 합판산업의 원료는 대부분이 동남아시아 열대 나왕목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가장 최대 원목생산 국가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사라왁 지역은 1970년 초부터 원목 수출 금지를 단행하면서,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해외 원목 수급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와 비교하면 거리가 멀지만 보다 풍부한 산림자원을 보유한 인도네시아가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국 원목개발업체들은 단순히 수입선을 돌리는 것을 넘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정부나 기업이 직접 산림을 개발하는 직접투자 방식을 선택했다. 동남아시아의 원목 수출국들을 중심으로 산림 부문에서 자원민족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인 만큼 해외기업이 생산한 원목을 단순 수입하는 것보다는 직접 개발하는 것이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에 더 효율적이라는 목재산업계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68년 외국환 관리규정에 ‘대외투자’라는 장을 신설했으며, 자원개발, 원자재 확보, 수출 촉진 등의 부문에서 제한적이지만 해외투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1967년 수하르토가 권좌에 오른 후 사회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산업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산업화의 발판으로 인도네시아 최대 자원인 광물과 원유, 산림 등 부문의 개발 계획이 입안되기 시작했다. 당시에 수하르토는 부하 장군들에게 자와 섬 밖의 열대림을 나누어 주었다. 자금과 기술력이 없던 그들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산림을 개발하고자 각종 법규정을 제정한다. 산림 부문에서는 산림기본법(1967년), 해외투자법(1967년), 국내투자법(1969년), 산림개발권에 관한 법령(1970년)을 차례로 마련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을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유인책을 순차적으로 도입했다. 한국 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인도네시아의 산림개발 산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코데코가 1968년 3월 한국 정부로부터 450만 달러를 빌려 남부깔리만딴 주 바뚜리찐에 27만 헥타르의 임지를 단독투자 형태로 확보해 개발에 착수하면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이어 1969년 인니동화가 동부깔리만딴 주 발릭빠빤에 12만 헥타르, 1970년 경남교역이 동부깔리만딴 따라깐에 20만 헥타르, 1973년에는 한니흥업이 중부깔리만딴 라만다우 강 유역에 11.5만 헥타르, 1976년 말에는 아주임업이 서부깔라만딴 메라웨이 강 유역에 11.5만 헥타르의 천연림 개발에 착수하면서 한인 기업에 의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 러시가 이루어졌다. 한국 기업들에 의해 개발된 산판에서 생산된 원목은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되었고, 한국은 안정된 원자재 공급을 발판으로 1970년대 세계 합판산업의 선두 국가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자원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동남아 산림대국들도 산림자원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기존의 원목의 개발과 수출을 넘어서 목재 가공업의 육성을 통해 자국 내 부가가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에 1974년부터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인 기업과 합작하여 원목을 개발하는 합작회사 설립을 금지하고 신규 외국인 투자를 불허했다. 나아가 산림파괴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임산자원 보호정책을 강화했고, 1970년대 말부터 원목 수출금지 조치의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원목개발업체들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1980년부터 원목 수출을 제한하고 가공품을 수출하도록 규제했고, 1985년에는 원목 수출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합판공장을 짓지 못했던 원목개발업체는 도산하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 원목 수출금지 조치 이후 기존의 한국계 원목개발 회사들 중 합판공장을 소유한 코린도와 코데코 정도의 기업들만이 원목개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같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의 합판산업을 육성 발전시킴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합판 생산량과 수출량은 꾸준히 늘어나 마침내 1990년 중반에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경쟁국가들을 제치고 합판수출 1위의 자리에 올랐다. 2019년 기준 코린도그룹 목재가공본부 합판부서에서는 지속가능한 천연림 경영을 통해 생산된 양질의 원목으로 연간 50만 입방미터의 합판을 생산하고 있다. 이 중 98%를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글로벌 합판 메이커로서 한 해 수출실적 3억5천만 달러, 인도네시아 전체 합판 생산량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벌목에서 조림으로... 산림의 총제적 가치로 이동 열대림 개발에 대한 국내외적 우려가 심화되고, 천연 열대림의 훼손과 황폐화가 쟁점화 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과거 목재 생산과 같은 이용 가치로 산림을 평가하던 방식에서 산림의 총체적 가치로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중부깔리만딴 주 빵깔란분 지역에 위치한 나따이 목가공단지는 깔리만딴 정글 산림 속에서 한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3개국간 3자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한 종합 목가공단지로 성장했으며 약 350헥타르 규모의 목가공단지 내에는 우드칩 생산 공장, 제재목 생산공장이 완공되었으며, 우드펠릿 생산공장을 가동 중이다. 코린도그룹은 향후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조림지 허가 면적을 전체 30만헥타르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그뿐만 아니라 속성 용재수종 개발을 통한 합판, 제재목, 칩, 펠릿 등의 조림목 가공 사업으로 더욱 큰 부가가치 창출이 기대된다. 현재까지는 조림지에서 생산된 나무는 대부분 부가가치가 낮은 펄프나 화목으로 사용되었다. 합판이나 제재목 등 부가가치가 높은 목재산업에서는 곧고 직경이 크고 갈라짐이 적고 옹이가 없으며 밀도가 높고 무늬가 아름다운 원목이 있어야 하는데, 단기간에 키운 조림목으로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기 쉽지 않다. 그러나, 코린도는 유칼립투스 클론을 활용한 속성용 재조림사업을 집약경영 시스템으로 추진 중이며, 세계 최고의 속성용 재조림을 통한 제재목, 집성목, CLT(Cross Laminated Timber), 합판, 칩, 펠릿, 바이오매스(Biomass) 발전 등 수직 계열화된 선진 목가공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식재 후 3년이 지나야 수확이 가능한 코린도의 팜 농장은 인도네시아 빠뿌아 지역과 말루꾸 지역에 서울시 면적보다 좀 작은 5만5천 헥타르의 식재 면적에서 현재 연간 25만 톤 가량의 팜오일을 생산하고 있다. 한인기업 최초로 인도네시아 팜오일 인증 ISPO를 취득하였으며 빠뿌아 팜오일 기업 중 최초로 인도네시아 규정에 근거한 주민농장을 조성하여 지역 주민과의 상생을 통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한국-인도네시아 산림 협력 확대 발전... 2000년 이후 한국 대기업 산림 분야 투자 활발 코린도그룹 이외에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2000년대 이후 해외산림자원개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팜오일 분야에 대상홀딩스, 삼성물산, 삼탄, LG상사, JC케미칼, 포스코대우 등이 진출하였다. 한국임업진흥원은 중부자바 주 스마랑에서 바이오매스 시범조림, 산림조합중앙회는 서부자바와 깔리만딴에 속성수와 고무나무 조림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무림P&P는 빠뿌아에서 펄프 생산용 조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산림협력에는 한국 정부와 기관의 지원과 노력도 적지 않다. 1979년 한-인니 임업위원회 개최를 계기로 조림투자, 연구협력, 산림개발, 산림보호, 인력개발 분야까지 확대 발전해왔으며 2007년 한-인니 산림포럼 구성으로 양국의 산림협력은 한층 도약하게 되었다. 2005년 수마트라섬 북부에 휩쓴 쓰나미로 파괴된 해안 맹그로브숲을 복원하기 위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개발원조 사업을 선두로, 2006년에는 룸핀에 현대식 양묘장 조성사업을 시작했고, 2009년에는 롬복 섬에 소규모 산림전용·황폐화 방지와 산림탄소축적 증진활동(REDD+) 시범사업 등 기후변화 대응역량 강화사업을 추진했다. 정부 간 산림협력사업과 조림투자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을 위해 우리나라 산림청과 인도네시아 산림부가 합의하여 2011년 인도네시아 산림부(현 환경산림부) 내에 한-인니 산림센터를 설치하고 이탄지복원, 산불관리, 산림을 이용한 생태관광과 환경교육, 해외산림자원확보, 산림바이오에너지 생산, 기후변화 대응, 인재교류 사업 등 양국 협력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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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티타임1] 빠왕 후잔(pawang hujan)은 뭐하나?
빠왕 후잔(pawang hujan)은 뭐하나?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인도네시아에서 건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자카르타에 두 달 이상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자카르타와 주변지역에서는 통상 건기에도 갑자기 소나기를 내리는 스콜(squall)이 청량감을 더해주는데 요즘엔 이상기후 탓인지 스콜도 사라진 듯하다. 뽀얀 먼지에 쌓인 채 말라가는 나뭇잎과 갈라진 논을 보고 있자면, “빠왕 후잔(pawang hujan)은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왕 후잔은 비 내리는 것을 조정하는 도사다. 큰 행사가 있을 때 비를 내리는 것을 멈추게 하고, 가뭄에는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빠왕 후잔은 강우를 조정하기 위해 아스마울 후스나(Asmaul Husna, 선한 하느님)를 1천번 암송하고, 기도한다. 자카르타에서 유명한 빠왕 후잔인 음바 르보(Embah Rebo)에 따르면 빠왕 후잔에게 주는 비용은 적게는 50만 루피아, 많으면 350만 루피아 정도다. 일상에서 빠왕 후잔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골프장이다. 일부 골프장들은 강우를 조정하기 위해 골프장 관리자가 빠왕 후잔을 부른다. 빠왕 후잔이 와서 주문을 외우면 비를 밀어내 골프장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열대 스콜은 짧게 내리는 비라서 갑자기 세차게 퍼붓다가 잠시 후 그치는 특성이 있다며, 빠왕 후잔의 역할을 폄하하기도 한다. 수년 전 건기에 중부자바에서 산불이 크게 난 적이 있다. 산불이 10일 이상 지속되면서 민가까지 위협 받는 상황이 되고 비가 올 조짐이 안 보이자, 주지사가 빠왕 후잔 수십 명을 산불이 난 곳 인근에 불러서 기우제를 지냈다. 첨단과학시대에 기우제를 지낸다는 비난이 나오자, 중부자바 주지사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지만 산불을 끄지 못했다. 지금 내 입장에서 산불을 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후속 보도가 없어서 비가 내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빠왕 후잔이 정치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 초기에 시내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상되자, 시위 예정지인 호텔 인도네시아 앞 분수대 주변에 빠왕 후잔 수십 명을 불러서 비를 내리는 기도를 하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날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시위는 주최 측 주장만큼 시위대가 모이지 않아서 흐지부지 끝났다. 기자들이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빠왕 후잔 동원 여부를 물었지만 그는 부인했다. 요즘처럼 가물 때는 빠왕 후잔이 활약을 해줘야 하는데, 가뭄의 기운이 너무 쎄서 빠왕 후잔도 어쩔 수 없는 걸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는데... [데일리인도네시아]
[칼럼] 재외국민 참정권과 한국학교 수업료의 관계는/ 조연숙
글 : 조연숙 재외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을 일컫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과 납세의 의무가 있고 참정권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재외국민은 상대적으로 국내보다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덜하고 참정권을 덜 보장 받고 의무교육은 전혀 보장을 받지 못한다. 과거에는 먼 거리와 적은 인원으로 인해 재외국민의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근에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이동이 증가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재외국민의 수가 크게 늘고, 국민으로서 보장 받아야 할 권리를 요구하는 재외국민들이 증가하고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용어를 먼저 정의하고자 한다. 재외국민과 재외동포는 어떻게 다를까? 한국 헌법에는 재외동포에 대해 정의한 조항이 없지만, 개별 법률은 대략 대한민국 국적의 유무에 따라 재외국민과 재외동포를 분류한다. 재외국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해외에서 임시로 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등이다. 재외동포는 국적에 상관 없이 한국 혈통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다. 재외국민들의 대표적인 요구는 아시아권의 경우 교육 받을 권리이고, 미주 쪽은 참정권이다. 아시아권 재외국민들은 상대적으로 교육 인프라가 한국보다 열악해서 한국국제학교 설립과 이미 설립된 학교에 대한 지원을 본국에 요구하고 있다. 정규과정의 한국학교가 있는 자카르타와 호찌민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학부모는 개인이 학비를 부담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확립과 한국으로 진학할 경우에 대비해 자녀를 한국학교에 보낸다. 한국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비싼 현지 사립학교에 보내야 한다. 한국은 중학교 과정까지 의무교육인 만큼 국가가 학비를 부담한다. 따라서 자카르타와 호찌민 지역은 한국학교에 진학할 경우 국가가 학비를 지원하고, 다른 지역은 학생 수를 고려해서 한국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본국 정부는 예산과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들어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 쪽 재외국민들은 참정권에 더 관심이 많다. 참정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정치적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이다. 특히, 올해는 본국에서 개헌 논의와 맞물리면서 재외국민 참정권이 작게 나마 주목을 받았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먼저 국회나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이를 국민에게 공고해야 한다. 이어 국회가 찬반투표를 통해 헌법개정안을 가결하면 국민투표를 거쳐 공표한다. 문재인 정부는 6.13 지방선거와 개헌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려 했으나, 국회가 지난 4월 23일까지 국민투표법을 개정하지 않아서 동시실시가 어려워졌다. 현재 국민투표법은 헌법상 위헌 상태다. 참고로 국회가 지난 5월에 열린 본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을 부결함으로써 지난 3월 발의한 헌법 개정안이 완전히 무산됐다. 국민투표법이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과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제정한 법으로, 대통령 등을 뽑을 때 행사하는 공직선거법에 관한 투표와 다르다. 국민투표법 제14조 1항은 '국내 거소 신고가 되어 있는 투표권자'(제4장 제14조 1항)에게만 투표인 명부작성을 허용한다. 따라서 한국 내에 주민등록(거소)이 설정되지 않은 한국 국적을 소지한 미국 영주권자 등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대통령선거와 총선 비례대표 투표권이 있는 재외국민 유권자 223만여 명 중 영주권자 46만4천여 명이 국민투표가 실시될 경우 투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재외국민들이 이의를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4년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을 제한하는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에 대해 "국민투표는 국민이 직접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절차이므로, 국민투표권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권리"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어 2015년 말까지 이 조항을 개정하라고 했지만, 개정 입법이 기한 내 이루어지지 않아 해당 조항은 2016년 1월부터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행법 개정이 되지 않는 한 투표인 명부를 작성할 수 없어서 국민투표의 시행이 불가능하다. 국회가 정쟁의 수단으로 2년이 넘게 국민투표법을 방치하면서, 재외국민은 국가 안위와 관련된 중요정책과 헌법개정안에 대해 투표할 권리를 잃어버렸다. 한편 국민투표법 개정과 개헌 논의 과정에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의견이 한국에서 불거졌다.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자기 나라 싫다고 외국으로 간 사람에게 국민의 권리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재외국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주장이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있는 재외국민들은 대한민국 국적과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 많든 적든 재산을 보유하고 교류하며 세금을 낸다. 여기서 자란 자녀들은 대부분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국민만큼은 아니지만 국민으로서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대신 재외국민은 체류국에서 경제·외교적 역할을 통해 본국에서 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과거보다 국경이 낮아지고 영토 밖에 사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국토 안에 사는 사람과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재외국민이 갖는 의미와 역할 그리고 권리와 의무에 대해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한국 내에서도 더 많은 논의와 고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인문창작클럽(INJAK)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이강현)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유료][칼럼]인도네시아 이슬람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수십만 명의 무슬림들이 하얀 옷을 입고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며 자카르타 모나스 광장과 탐린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큰 흐름이 바뀌었다. 올 상반기에 치러진 자카르타주지사선거에서 압승이 예상됐던 바수끼 짜하야 뿌르나마(일명 아혹) 전 자카르타 주지사가 낙마했다. 아혹 전 주지사를 지지했던 조꼬 위도도(일명 조꼬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면서 레임덕이 시작됐다. 쁘라보워 수비얀또 그린드라당 총재는 지지했던 아니스 바스웨단 후보의 승리에 힘입어 정치적 입지가 커졌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였던 쁘라보워 총재는 육군전략사령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으로 2014년 대선 때 조꼬위 대통령과 경쟁했던 유력 후보였고 2019년 대선에도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정치 흐름을 바꾼 대규모 시위는 순수한 종교시위였을까? 수십만 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진심으로 이슬람국가 건설을 원하나? 대규모 시위를 개최할 수 있는 조직력과 자금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무슬림들이 아혹을 반대한 이유는? 무슬림과 화교의 관계는? 이번 시위는 과거처럼 소요사태로 확대될까?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표방한 인도네시아 국가이념인 빤짜실라(Pancasila)는 강경 이슬람을 누르고 국가통합을 유지하게 할 수 있을까? 이슬람과 화교는 인도네시아에 이익이 될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이 대규모 시위를 개최할 수 있었던 조직력과 자금은 어디서 오나?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이슬람 대규모 시위를 통해,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국민을 움직이고 정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파워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19세기에 민족주의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1945년 인도네시아공화국이 형성되기 전부터 나들라뚤 울라마(NU)와 무함마디야 같은 이슬람단체들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운영하는 등 국가권력을 대신해 교육과 복지 사업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인도네시아공화국 수립 후에는 정당을 설립해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이슬람사원들은 견고하고 거대한 네트워크가 되고, 종교지도자들은 설교를 통해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무슬림의 목소리가 이슬람 조직을 타고 위로 수렴될 수도 있다. 종교단체 고유의 충성도와 자금동원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잘 훈련된 정치조직이자 민중조직이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온건하고 포용적 인도 구자랏 상인, 중국 상인, 아랍 상인 등이 무역을 하면서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했다. 전쟁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된 중동지역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슬람을 유연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해 토착신앙이나 토착문화가 많이 섞이게 됐다. 특히 자바지역에서는 토착문화와 힌두문화의 바탕 위에 이슬람이 혼합돼 아랍과 다른 형태의 이슬람이 되었고, 이런 성향의 이슬람신자들을 ‘아방안’(Abangan)이라 부른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에 원리주의 성향이 가미된 것은 19세기에 교통이 발달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이 직접 아랍에 가서 이슬람 부흥운동을 배워 오면서이다. 하지만 아방안들은 아랍에서 들어온 이슬람 원리주의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과 화교의 관계는? 화교상인들은 고대부터 인도네시아와 교역을 하면서 이슬람을 전파했다. 이후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화교상인뿐만 아니라 화교노동자들까지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화교들은 네덜란드 식민정부 시대에 중간관리로 현지인과 직접 만났고, 무역업자로서 중국산 사치품과 인도네시아산 향신료 등을 중계하는 등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또 화교들은 바타비아(옛 자카르타) 항구 건설 현장,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 플랜테이션과 광산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화교들이 특유의 부지런함과 수완으로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대항할 정도의 부와 인구를 가지게 됨에 따라 그들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모두를 위협하는 세력이 됐다. 이에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현지인의 반감이 화교에게 가도록 유도함으로써 현지인과 화교의 갈등을 조장했다. 한편 이슬람 상인들과 화교 상인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상권을 놓고 경쟁했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이슬람 민족기구인 사리깟이슬람(Sarikat Islam. 이슬람연합)은 무슬림 상인을 화교 상인과의 경쟁에서 보호할 목적으로 1911년에 창립된 단체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시골과 오지에서 화교의 소매업을 금지했고 화교를 도시로 이주시켰다. 이에 시골에서는 인도네시아인 알리를 앞세우고 뒤에는 중국인 바바가 장사한다는 의미로 ‘알리바바’라는 말까지 유행했다.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시대를 거치면서 이슬람 정당과 공산당 그리고 현지인과 화교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두고 계속 경쟁했다. 과거 화교들이 쇼비니즘(chauvinism, 맹목적인 애국심 또는 중화사상)에 젖어서 현지문화에 배타적으로 행동하고 지역공동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토착민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중국이 화교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던 점도 현지인에게 경계심을 키웠다.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이슬람의 역할은 자카르타 주지사 후보 간 경쟁은 이슬람과 비이슬람의 대결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바 출신 이슬람계 원주민 중심의 구정치세력과 비이슬람과 중국계가 포함된 신정치 세력의 대결이 있다. 정치인들은 2019년 대선을 앞두고 서로 기선을 잡기 위해 경합을 벌이고 있으며, 수도인 자카르타의 주지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 선거에서 조꼬위의 측근인 아혹의 탈락은 정치적 기반이 약한 조꼬위의 입지를 더욱 좁히면서 대통령 연임에 빨간불이 켜졌다. 인도네시아는 중국의 팽창이 두렵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지지 시위지만 이면에는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최근 남중국해 분쟁과 중국기업의 진출, 막대한 인프라 개발 자금 지원 등을 부담스럽게 바라본다. 최근 중국 브랜드의 가전제품, 스마트폰, 자동차, 중장비, 의류, 가구 등이 공격적으로 인도네시아 시장에 침투함에 따라, 앞서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우위를 보였던 인도네시아 토종기업뿐만 아니라 외국기업들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은 이슬람 또는 민족주의라는 구호를 앞세워 세력화 된다. 살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온다 다른 국가들처럼 인도네시아도 경제의 저성장과 실업 증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난 수년간 중국 경제 성장 둔화에 따른 자원가격 약세로 인도네시아 수출이 감소했고, 이어 투자와 소비도 위축됐다.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데, 중국은 인프라 개발 지원과 투자를 이유로 비숙련 자국 노동자를 대거 송출해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화교에게 폭력을 가했던 대표적인 사건을 살펴보면, 18세기 바타비아 폭동은 향신료 가격 폭락에 따른 경제난, 1965년 9.30 정변은 수카르노 말기 경제난, 1998년 5월 사태는 수하르토 말기 경제난과 아시아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발생했다. 이슬람 대규모 시위는 1998년과 같은 소요로 확대될까? 현재 인도네시아 정치와 경제 상황은 그리 유리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 시위가 소요사태로 확대되거나 인도네시아가 이슬람국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18,000여 개의 섬에 수백 개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종족들이 흩어져서 사는 인도네시아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가진 국가다. 그리고 종교를 포함해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려 한다. 인도네시아의 국가이념인 ‘빤짜실라’의 모토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거대한 군도가 통합된 국가형태를 유지할 때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잘 안다. 이슬람을 포함해서 누구든 다양성을 해치고 국가통합을 해칠 만큼 독주하면 바로 견제를 시작한다. 1998년 5월사태로 독재자 수하르토가 하야하자 인도네시아는 4년간의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민주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최근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교육 받은 중산층은 더 이상 소수의 정치세력에 맹목적으로 몰려 다니는 군중이 아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고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키우고 있다. 다양한 세력이 경쟁하는 인도네시아는 한국인의 눈에 혼란스럽고 원칙이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역동적이고 유연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 낸다. 이런 역동성을 강제로 억압했을 때 폭동이 일어났다. 무슬림과 화교는 인도네시아 안에서 경쟁하지만 대외적으로는 협력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들어주고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면서 느리게 앞으로 나가는 국가가 인도네시아다. 대외적으로 인도네시아는 비이슬람국가들이 중동과 아프리카 무슬림 시장으로 진출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15세기에 융성했던 말라카왕국 그리고 지금의 싱가포르가 갖는 중계무역의 역할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 주체는 무슬림과 화교가 될 것이다. 무슬림은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화교는 경제적 영향력이 큰 집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인도네시아의 일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