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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프롤로그

기사입력 2014.12.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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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프롤로그


나를 아프게 이끌던 우울로부터

도망 갈 궁리만 하던 그 때,

뜻밖의 소풍이

잘 포장된 선물상자를

풀기 두려운 손길처럼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망설임과 설렘이

샴쌍둥이처럼

나를 흔들던

길지 않은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이국의 삶에 대한 막막함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년여의

긴 휴가와 긴 여행사이,

무겁거나 가벼운 시간의 무덤

꿈꾸어 오던 달콤한 감옥

자와 섬 서부, 수도 자카르타 한 켠

술탄이라는 이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렘,

긴 여행,

가벼움,


……


나를 사육하던 우울과

내가 기르던 권태와

통증의 나날도 함께

가장 아끼던

자작나무 상자에 담았다

거기,

바다의 본적이라 부르고 싶은

17천개의 섬이 있다는,

나의 물고기 실러캔스가 살고 있다는,

천개의 문이 있는 장소에서

밤마다 귀신들의

축제가 벌어진다는,

바다에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는

매혹적으로 치장한 유혹이 부르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몇백년 동안

바다로의 항해를 꿈꾸며

이국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백년 넘은 늙은 목선들이

지금도

섬에서 섬으로 떠돈다는,

적도의 붉거나 분홍인 석양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그 분명한 이유의 명분을

큰 가방에 구겨 넣고

먼 길을 날아서

.







여행자의 일기

                                                           김길녀


잠시, 두꺼운 슬픔을 빌려와 조심스럽게 키우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쓸모없어진 몽당연필처럼 해체되고 고립되어 찢긴 혁명의 깃발로 나부끼는 회환의 한 철이 내게 있었습니다 스나얀 공원 늙은 벙글나무 몸통 버짐 가득 핀 검은 숲의 나날이 내 마흔 언저리에 있었더랬습니다 절박함 없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길고 지루한 장마 같은 날들이 내 곁에 머문 적 있습니다 쉽사리 소멸될 수 없는 지독한 아픔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속 저물녘같이 무섭도록 쓸쓸하게 다가왔던 그때가 내게 있었습니다 바자우 족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바다만 떠돌다가 죽어 바융도 덮지 않고 마뭇도 치르지 않은 채 시사팡 섬 모래 속에 묻히고 싶었던 간절함도 있었습니다 생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직도 내게는 어눌한 이차방정식 문제 같은 순간들이 멀지 않은 시절에 있었답니다 에곤 실레 누드 자화상에서 보았던 절규와 구토가 내 모습인 양 정겨웠던 펄럭이는 밤도 있었습니다 폐사지에 뒹구는 조각난 기왓장으로 비추던 서늘한 달빛의 금지된 사랑의 뜨거움이 잠깐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주저함 없이 초록 꽃대 쑥쑥 피워 올리는 감성의 소절 한 장씩 찾아 넘겨가던 그 즈음이 좋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빙붕의 무거운 침묵 깨려던 망치 끝에 핏빛 석양이 마젤란 해협 파도꽃을 뿌리고 가기도 했던 향기로운 여백도 보았습니다.

그때는 석양도 붉지만 아니하고 노랗거나 푸르렀다는 것을 적도 근처에 처소를 마련한 지금에서야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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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김길녀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 <키 작은 나무의 변명>등이 있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을 수상했다. 문학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와 문화기획자로, 라디오방송 등등의 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긴 휴가를 받아 여행자로 인니의 자카르타에서 살기도 했다.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즐기며 지낸다. 우두커니 있는 걸 좋아한다. 느낌이 좋으면 살짝, 미치는 성향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깊이 빠져서, 그때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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