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문과 문 사이에서 울음을 만나다
-스마랑 Semarang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먼 곳의 불빛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이 참 낯설다는 생각.
창문에 비치는 빗물처럼 흘러 내린다.
감정의 부피가 미농지 두께만큼
얇아진다는 걸 느끼면서도 슬프지 않다.
인니에 살게 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도시는 스마랑이다.
한글판 일간지에 짧게 소개된 '천개의 문' 건물 사진을 본 후 부터...
스마랑을 향한 설렘과 간절함은 깊어 갔다.
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과 밖의 막간.
열고 닫힘에 따라 변하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환경.
문이 주는 매력은 모양이나 색깔에 따라 그 느낌 또한 다르다.
천개의 문은 슬픔의 문과 동의어로 다가 왔다.
눈물에도 뿌리가 있다면, 라왕세우Lawang Sewu에는
여전히 눈물로 자라는 나무가 존재한다.
'천개의 문'이란 뜻의 라왕세우에는 슬픔으로 얼룩진 아픔의 흔적이
긴 나무문 틈으로 스며 들어, 지금도 펄럭이고 있다.
오래전 불어 오던 뜨거운 바람 따라 천개의 문을 걷는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기차 역무원들의 공간으로 사용 되었다는 건물.
삐걱이는 계단을 오르자,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오래된 붉은 기왓장에 기도 같은 문양이 새겨진 채
조용히 시간의 숨결을 만지고 있다.
손잡이가 떨어진 나무 문 앞에서 올려다 본 천장
얼룩으로 남겨진 수 많은 얼굴의 형상이 빗물처럼 어른거린다.
지금도 밤이나 비오는 날이면 지하방에서 귀신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온다는 곳.
천개의 문을 열고도 나갈 수 없는 그들의 영혼.
억울하게 갇힌 자들과 원치 않게 떠난 자들의 한 맺힌 절규가 아닐까...
슬픔은 화석으로 남아, 산자들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는 애끓는 당부를 귀신의 형상으로 보여 주는 건 아닌지...
늘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는 지하방.
컴컴한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한 바람이
소매 없는 옷자락을 끌어 당기는 듯 걸음을 무겁게 했다.
또 다른 스마랑의 그곳.
중부 자바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인 머스짓 아궁 자와 뜽아
세계에서 가장 큰 우산이 있다.
마스지드 광장을 둘러싼 분홍 기둥들은 퍼즐 조각처럼 맞추면 사람 모습이 보인다.
열기로 데워진 광장을 이국의 여자와 남자.
맨발로 뜨거운 대리석 바닥을 까치발로
천천히 걸어서 기도처로 들어 갔다.
질밥을 두르지 않아도, 긴 바지를 입지 않아도
무슬림의 의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곳.
높은 천장과 초록 레이스로 감싼 가죽북.
무교인 남자와 여자에게도 기도의 마음을 갖게 하였다.
오랫동안 바닥에 앉아
창으로 들어 오는 햇살과 평화로운 바람을 느꼈다.
처음으로 마스지드 안에서 푸근한 안식을 누렸다.
가끔, 그곳에서 느꼈던 따뜻한 시간이 간절할 때가 있다.
리틀 네덜란드로 불렸던 옛 도시.
여전히 가로등은 불을 밝히고 구석구석엔 자유를 향한 외침처럼...
검은 눈빛과 검은 날개 천사들이 그려진 벽화가...옛 기억을 잊지 말자는
구호처럼, 젊은이들의 손길로 그려져 있다.
그 벽화들 앞에서 길었던 그들의 침묵과 우리의 그 때를 떠올리며...
오후의 기도를 위한 아잔 소리에 맞추어 두 손을 모았다.
빠빠야 향기 같은 주홍의 도시.
스마랑이라는 이름의 서늘함.
달콤한 주홍 바람이 라왕세우의 펄럭이는 문들 사이로
따뜻하게 불어 주기를...
더 이상 귀신들의 울음 소리 없기를...
바라는 마음,
그곳을 떠나 온 지금도 가득하다.
폭설처럼 쏟아지던 우기의 폭우와 이 때면 만개하는 주홍 램프꽃이
그리운 늦은 겨울의 나날이다.

▲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의 옛 도심, 오래된 문에 걸린 그림.

▲ '천개의 문','유령의 집'으로 불리는 라왕 세우.
▲ 라왕 세우 1층 복도, 빈 문과 긴 나무문이 조용히 바람을 부른다.
▲ 머스짓 아궁 자와 뜽아 1층 기도실. 고요속에 스며든 햇살이 푸근하다.
▲ 낮은 지붕들이 정겨운 스마랑을 하늘에서 보다.
▲ 해질녘에 본 머스짓 아궁 지와 뜽아.
▲ 강렬한 듯 섬세한 모습의 인니 여인.
꿈꾸는 감옥
낯선 바다
낯선 얼굴
낯선 기도
낯선 계절
낯선 외로움
낯선 비
낯선 고요
낯선 방
낯선 지도
낯설지 않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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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김길녀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 <키 작은 나무의 변명>등이 있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을 수상했다. 문학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와 문화기획자로, 라디오방송 등등의 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긴 휴가를 받아 여행자로 인니의 자카르타에서 살기도 했다.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즐기며 지낸다. 우두커니 있는 걸 좋아한다. 느낌이 좋으면 살짝, 미치는 성향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깊이 빠져서, 그때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