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길녀]늙은 목선에서 들려주는 파도의 내력을 읽다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김길녀]늙은 목선에서 들려주는 파도의 내력을 읽다

기사입력 2015.07.03 15:0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늙은 목선에서 들려주는 파도의 내력을 읽다
    -자카르타(JAKARTA),순다끌라빠(Sunda Klapa)

인연 아닌 관계의 이별이 주는 편안함.
때로는 그렇게 담백하게 맞이하는
결별이라는 것도 있음을...
인생 선배들에게서 듣게 될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절이 오고 있다.
사람으로부터 지쳐가는 못난 마음은
허허로움보다 더 불편함을...
알게 된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변화다.
하양 감꽃 떨어진 자리에
초록을 키워가는 땡감의 하루하루가
놀이터의 아이들 웃음과 닮아 있다.

-잠시, 그렇게

항해를 멈춘
순다끌라빠항구의 목선들.
손이 검은 이국의 남자도
밀림의 검은 숲에 대한 기억도
펄럭이는 블루피터의 몸짓도
백 년 동안의 잠에 빠진 듯
그대로 멈추다...

인니의 현재 대통령인 조꼬 위도도는 대통령 당선증을
이곳, 범선위에서 받았다.
그는 목수의 아들... 지극히 인니스러운 모습의 그는
서민 대통령으로 불리고 있다.

오래전 순다라는 이름은
바타비아도 자카르타도 아닌
인니의 실질적 이름이었다고 한다.
새 대통령의 다짐이 느껴지는, 당선증 수여식의
장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카르타에 살면서
자주 갔었던 장소 중의 한 곳.
그곳에 가면,
어딘가로 떠나거나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과 파도의
진한 냄새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낯선 도시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이 자작나무 상자 속에 
쌓여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한 곳에 머물지 않지만
긴 울림으로 남아서 아주
가끔씩, 출렁이며 다가오는
저물녘 박물관의 종소리처럼...
낯선 곳에서의 순간들은
먼 훗날 
상자 속에서 나를 호명하리라.
노랑과 주황 사이의 빛깔로
목이 가늘고 긴 원추리꽃.
고개를 끄덕끄덕, 더위에 지친
여름의 한낮을 쓰다듬고 있다.

.........................................................................................................................

보들레르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저녁

제목 없는 당신의 시를 신에게 바치는 기도처럼 읽고 있는 오후라오

인도양 물결무늬 흘러드는 순다해협에서 맞이하는 적도의 해질녘은 붉게 타오르다가 맹그로부나무 숲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소

미처 살아내지 못한 생의 행간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보내는 긴 휴가 속에서 기꺼이, 다시 시작 해 볼까 싶다오

시대를 앞서 갔던 당신의 문장들은 검은 꽃병에 꽂혀 대문 없는 폐허의 사원에서 뜨거운 햇볕 받아 푸르게 푸르게 피어나고 있다오

당신이 각혈하듯이 쏟아내던 검붉은 꽃의 노래는 지금, 여기의 일만 칠천 개 섬 곳곳에서 핏빛과 분홍 더러는 황금빛 햇살 부스러기로 쓰러지며 먼 바다 심해로 빠져들고 있소

권태와 우울과 불안의 나날이 창녀들의 춤과 노래와 죽음, 바다와 수부들과 부랑자들, 태양과 슬픔의 냄새와 뒤엉켜 당신이 남기고 간  시들의 묘지에서 오래된 돌담에 핀 이끼처럼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오

이곳은 천둥과 번개와 함께 소낙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라오
처음엔 낯설던 천둥의 신 덴무도 건기인 지금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오

당신을 처음 만났던 이십대, 그 시절에는 그저 이별의 아픔에 젖어서 겨울밤을 지새며 하얗게 울기만 했다오
나로부터의 혁명이 두려웠던 그때는, 당신이 품은 바다를 찾지도 볼 수도 없었음을 이제야 고백하고 싶소

다시, 바다가 지천인 이곳에서 만나는 당신은 내가 살고 싶은 외딴섬의 나날 속에 살고 있는 듯하여 마냥 부럽기만 하다오

당신이 건네주는 마지막 유리잔 안에 그득한 취기는 영혼을 저당 잡힌 유령의 입맞춤처럼 뜨겁고 달콤하오

당신의 시‘아름다운 배’에 나오는 포동포동 굵은 목과 퉁퉁한 어깨의 그녀처럼 감미롭고 나른하고 느린 리듬을 타며, 조용조용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난바다로 떠나고 싶소

훗날, 또 다시 당신을 만나는 시절이 오면 당신의 하룻밤 애인이 되어 외딴섬 빈 집에서 밤을 새우며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다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오

지금은 당신이 좋아하던 신전의 오래된 정원 작은 방, 녹슨 창문으로 스며드는 적도의 석양에 희미한 눈길 보내며 당신을 만날 어둠을 기다리고 있소




-----------------------------------------------------------------
김길녀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징조」, 「바다에게 의탁하다」 등이 있다.
제 13회 한국해양문학상 (시) 수상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