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길녀] 적막에서 자라는 슬픈 전설을 탁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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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적막에서 자라는 슬픈 전설을 탁본하다

기사입력 2015.09.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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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적막에서 자라는 슬픈 전설을 탁본하다


-시뚜스 끄라똔 라뚜 보꼬(SITUS KRATON RATU BOKO)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오래된 공원의

나무 지붕을 내려다보는 일로

하루가 오고 가는...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의 부재가

주는 낯설음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그때.

나무 지붕 저 너머로 숲 속

마스지드를 감싸던 우기의 안개.

흐린 숲에서 흘러나오던

아잔 소리.

그 시간들처럼 골짜기의 한낮은

고요로 아늑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욕망하는 일은

죄를 짓는 일.

기억을 불러 오는 날이 많아진다.

눈높이로 보이는 바위산들.

서울의 가을은 나무와 하늘의

사이를 노랗게 염색하느라 바쁘다.


-저 쪽에서 이쪽으로 따뜻한 바람이 오고 있다.


인니로 긴 휴가를 떠난다고 했을 때,

연극공연 후 뒤풀이에서 누군가 그랬다.

그 나라에 수도 자카르타 말고

족자카르타라는 곳도 있다지요.

농담이지요...설마 그런 도시가 있을까요.

...인니에 대해서 아는 게 참 없었다는...

아득하게 먼 나라로만 생각했던 인니.

자카르타에 살면서 비로소

숨겨진 보석처럼 발견한 족자카르타.

 

인니 역사와 종교여행의 중심지 족자카르타.

인니식 이름은 욕야카르타(Yogyakarta).

잠시, 인니의 수도였던 곳.

지금도 이슬람 왕인 술탄이 통치하는 도시.

아시아 1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면서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도시.

더불어 동남아 최대 힌두교 사원인

쁘람바난이 있는 도시.

인니의 고흐로 불리는 아판디 박물관.

이 외에도 독특한 나무가 있는 정원의

먼둣 사원과 족자카르타 사람들만이 안다는 뿔라오산 사원.

카톨릭의 성지로 불리는 소노.

비밀의 숲 속에 비밀의 요새처럼

한 왕족의 역사를 그대로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는 공주와 이국남자의 사랑이

시와 편지로 남겨져 있다.

마치 금기된 구역에 들어간 듯

묘한 매혹으로 발길을 붙잡던 그 곳에서의

비오는 하루는, 비밀문서를 훔친

도둑의 마음처럼 깊은 떨림이 있었다.

사진 찍는 걸 허용치 않던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아 주변 풍경조차도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곳.

친절한 그대의 동행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던 곳.

지금도 그곳의 하루는 꿈속을 다녀 온 듯

몽환적인 풍경으로 존재한다.

 

등등의 장소가 아니더라도, 족자카르타의 매력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미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멋진 사진들과 여행기로 소개된 족자카르타의

그곳들이 아닌 곳이 기억을 불러낸다.

 

-염소들의 풀밭 식사를 빗소리 들으며 바라보는 시간

 

번듯한 문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오래된 왕궁 터.

누군가는 족자를 일러 슬픈 왕족의 도시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라뚜 보꼬는 슬픈 왕족의 전설이

있는 왕궁의 옛 터다.

마을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인적이 드물며 조용하다.

 

유명한 사원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다.

비탈길을 걷기 시작하자 비가 내린다.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왕궁 터는 허허벌판이다.

왕궁 터는 산 속 높은 곳에 있다.

족자카르타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시절, 왕궁은 백성들의 마을에선

천상의 그곳처럼 신비로운 장소였으리라.

떠나지 못하는 바람의 무게로 쌓여진

돌무더기들만 그 시절의

사연을 품은 듯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

 

키 작은 꽃들과 한가롭게

풀을 뜯는 하얀 염소들.

설명이 필요치 않은 이름의 적요만이

들판에 끝없이 펼쳐져있다.

 

풀밭의 끝자락에 위치한 돌담.

돌담 아래로 공주들과 왕자들의 목욕탕이

돌로 만들어진 곳이 있다.

하늘이 목욕탕 지붕이 된 지 오래이다.

돌담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비를 타고 하늘로 이어진 상상의 세상을

오랫동안 만난다.

 

왕궁을 지키던 어린 병사들마저 행복했던

그 시절에는,

까르르 까르르 어린 공주와 왕자의 웃음소리

푸른 달빛 속으로 노래처럼 스몄으리라.

지금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지붕 없는 돌 목욕탕에선 둥 둥 둥 그때의

그 웃음소리들 별빛을 타고 와

한바탕 놀다가 돌아 갈 것만 같이

목욕탕엔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가끔, 목욕탕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구름처럼 떠돌기도 한다.

 

왕궁의 연못이 있던 자리의 돌계단

그 아래 빈터에도 황금 신발과 꽃신 몇 켤레

비를 맞으며 무덤가에 피는 하양 깜보자꽃으로

둥 둥 둥 떠 있는 듯...

 

쓸쓸한 것들 모두 불러내어

한바탕 씻김굿이라도 벌이고

싶었던 맘 간절했던

옛 왕궁 터의 하루.

 

환상과 상상의 세상이 비오는 옛 왕궁 터에서

황금색 표지를 입힌 한 권의 책으로 제본 중이다.

 

 

자카르타에서 온 짐을 다 풀기도 전...

다시, 인왕산 골짜기로 거처를 옮겼다.

떠나 온 곳에서 즐겼던 수목원 산책.

처음이었으나 오래된 친구 같은 몇 몇

사람과의 만남.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춤추며 노래할 수 있으리라.

우두커니와 가득한 불규칙을

나만의 방식으로 앞세우고

자발적 방황을 유폐하기 좋은 계절.

긴 바지랑대를 타고 구름숲을

떠돌던 하얀 얼굴의 그림자.

꿈 없는 잠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깊은 잠 깨우는...그런 아침의 날들이

지금 막 바위마을에 도착했다.

 

....................................................................................................................

하루

 

늦은 휴가를 받아 춘천행 기차를 탔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서 이국의

꽃향기가 났었다는 걸 기억한다

골짜기로 접어들수록 깊어지는 그리움에

목울대가 젖어 올랐던 것도 기억한다

 

저물녘 소양강 가에는 청평사 행 뱃길을

놓쳐 버린 뱀 떼 돌 더미 속에

똬리를 튼 채 엉켜 있기도 했다

절 입구 당간지주 같은 키 큰 두 그루 소나무

구름에 섞여 스쳐 가기도 했다

 

가끔은 낯선 곳으로 스며들어가 낯설게

나를 바라보는 것을 기꺼이 반겨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철 지난 감자 꽃 듬성듬성 핀 밭고랑 같은

야외무대 객석에서 소년들의 합창을

들었다, 노랫소리는 저녁놀을 따라 강

깊숙이 내려앉고 있었다

빈 배에 묘박 중이던 익숙한 슬픔

물수제비 뜬 물결 따라 잠시 흔들거렸다

 

등을 기댄 어깨 위로 석양이 느리게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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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김길녀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 <키 작은 나무의 변명>등이 있다. 13회 한국해양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와 문화기획자로, 라디오방송 등등의 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긴 휴가를 받아 여행자로 인니의 자카르타에서 살기도 했다.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즐기며 지낸다. 우두커니 있는 걸 좋아한다. 느낌이 좋으면 살짝, 미치는 성향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깊이 빠져서, 그때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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