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鏡 - 시가 있는 목요일
안녕하세요. 박정자입니다.
미래와 과거가 만나는 현재라는 시간은 대체 얼마나 짧은 순간일까요. 그런 순간이 분명 있기는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이라고 말하는 사이에, 이미 과거로 편입되어버린 시간의 속성을 생각하면 당황스럽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과거이거나 미래의 일이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현재는?
밀려가고 밀려오는 시간의 숨소리가 확연히 들리는 듯한 연말입니다.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박정대 시인이 지나간 시간에 발이 묶인 마음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을 ‘허무’라고 읽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 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