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鏡 - 시가 있는 목요일
안녕하세요. 박정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껍질들도 처음엔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살갗이었겠지요. 알맹이를 잘 익히려다 보니 스스로 거칠어져야 했던 껍질이었겠지요. 시 <껍질과 본질>을 읽으며 그 껍질에 새겨진 문장을 풀어놓으면 한 권의 책으로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6년이 시작된 1월입니다. 세상의 모든 껍질처럼 1월이라는 이 한 해의 껍질도 해와 달의 기운으로 날마다 단단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그 단단한 껍질에 빛나는 문장이 새겨져, 훗날 멋진 한 해로 기억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껍질과 본질 / 변희수
쳐다도 안 보던 껍질에 더 좋은 게 많다고
온통 껍질 이야기다
껍질이 본질이라는 걸 뒤늦게사 안 사람들이
껍질이 붙은 밥을 먹고 껍질이 붙은 열매를 먹는다
이태껏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본질인 줄 알고 나도 시퍼런 칼을 마구 휘둘렀다
연하고 부드러운 것에 집착했다
거칠고 상처받고 벌레 먹은 것들은 다 껍데기라고 도려냈다
본질은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곳에나 있다고 믿었다
딴에는 죽어라고 후비고 팠는데
공부할 때도 연애할 때도 시를 쓸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급하게 칼부터 밀어 넣었다
꼭꼭 씹어 볼 겨를도 없이
혀에 살살 감기는 것만 찾아다녔다
둘러쓸 것도 하나 없이 맨살로 덩그라니
나앉은 것 같은 날
허약한 내부를 달래주듯
껍질째 아작아작 사과를 먹는다
잘 씹히지 않는 본질을 야금야금 씹어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