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예술기행]아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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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인도네시아 예술기행]아판디

기사입력 2016.03.1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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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인도네시아 예술기행>

1화, 아판디에 대한 예의. (Koeseoma Affandi. 1907~1990)

연재를 시작하면서 먼저 운을 떼자면, 나는 17년 동안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만났던 지극히 사적인 예술 감상문을 써 볼 작정이다. 어쩌면 아주 편협하고 한쪽으로 지우친 감상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이론이나 사조를 들이댈 생각도 전혀 없다. 최대한 가벼웠으면 좋겠고, 이 글을 읽고서 누군가가 인도네시아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름 하나쯤을 가지게 된다면 좋겠다, 그런 소박한 소망을 품을 뿐이다. 그러니 화가건, 시인이건, 혁명가건, 꽃이건, 음식이건, 혹은 내 안의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켜 준 어떤 장소이건, 개의치 않고 쓸 계획이다.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 아판디 (1909~1990) [사진: 구글 이미지] 

어떤 나라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예술가들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네덜란드를 생각하면 고흐가, 영국을 떠올리면 버지니아 울프, 일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식이다. (한국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름들이 떠올라서 적을 수가 없다) 당연히 이것은 무척이나 주관적인 나만의 연상이지만, 아마 짐작컨대 누구에게나 그런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내게는 아판디(Affandi)다.

1999년, 폭동(Kerusuhan Mei)의 흔적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카르타로 백일이 지난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이곳에 오면 어디에나 초록의 밀림이 있고 바나나 나무 밑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을 거라는 무지한 상상력으로 무장돼 있던 내게 자카르타는 뭔가 불안하고 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어두운 도시로 다가왔다. 내가 막 발을 디뎠던 이 나라는 우리 나라보다 열 배쯤 오랜 식민의 아픔을 겪었고, 바로 지난 해의 무참한 학살과 폭동으로 언제 아물지 모를 상처를 껴안은 채 망연자실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자카르타에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 아판디 박물관 [사진: 구글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쩌다 현지인들을 만나면 인도네시아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누구라 생각하는지를 꼭 물었다. 모름지기 위대한 예술은 고난의 시대에 더욱 뜨겁게 피어났으니 분명 민중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준 예술이 있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판디의 이름을 불렀다. 아판디라니….., 문화대혁명 시대 중국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이리 오랜 세월을 머물게 되리라곤 짐작조차 못했던 내 인도네시아 인생에 처음 마주한 예술가의 이름. 그러니까 인도네시아 예술기행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첫번째로 꺼내는 것은 아판디를 향해 품었던 내 순정에 대한 예의다. 

▲ 아판디- 파이프를 문 자화상 [사진: 구글 이미지]

1907년 자바의 찌레본에서 태어난 아판디는 설탕공장 측량 책임자의 아들이었다. 무난히 고등교육을 받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일도 특별히 없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교사로 일하기도 했고 영화 티켓의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도 했다. 결혼을 하고 반둥에 거주하면서 리마 반둥(Lima Bandung)의 일원으로 헨드라 구나완 등 5명의 화가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1943년에 자카르타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 유럽과 미국, 호주 등에서 연달아 전시회를 열면서 세계적인 화가로 부상하기까지 무려 2,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 아판디- 배 [사진: 구글 이미지]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인도네시아의 고흐라고 부른다. 족자카르타에 있는 아판디 박물관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 역시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기운을 느꼈고 단숨에 매혹당했다. 실제로 그는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표현주의(__EXPRESSION__ism) 그림에 몰두했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물감의 튜브를 화폭에 직접 짜거나 손가락만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인도네시아의 자연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인간을 향한 갈등과 고통, 창작자로서의 고독과 열망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자화상까지 거침없이 그려내었다. 

붓을 쥐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워하면서 그가 마지막까지 화폭 위에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판디가 즐겨 그렸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배(Perahu) 연작에서 그 답을 훔쳐 읽는다. 그는 끝날 것 같지 않은 풍랑 한가운데 놓여진 수많은 배들을 그렸다. 그림들에는 언뜻 보기에도 이미 파도가 높건만 아랑곳없이 출항을 서두르는 배들과 풍랑에 몸을 맡기면서도 나아갈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로 출렁이는 특유의 목선들이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고 있다. 연방 배를 덮치는 파도에도 그저 태연하게 노를 저어갈 뿐인 어부들도 있다. 그들이 마침내 해안에 다다랐을 때 바다는 이미 고요해졌고 적도의 태양이 강렬한 빛으로 배를 비춘다. 풍랑과의 오랜 싸움 끝에 얻어낸 평화와 고요와 자유가 조용히 배를 위로하는 것이다. 

▲ 아판디- 배 [사진: 구글 이미지]

언젠가 인도네시아 예술사에서 1945년 독립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인도네시아를 다시 지배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아판디가 독립 포스터를 만드는 일원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포스터에는 그런 문구가 씌여 있었다고 한다. ‘Meredeka atau Mati’ 독립이 아니면 죽음 뿐이라고 소리치던 젊은 아판디는 그토록 원했던 자유와 평화를 Perahu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 자신, 어떤 도구와 어떤 기법에도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지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감히 짐작해 보는 것이다. 

▲ 작업 중인 아판디 [사진: 구글 이미지]

글쓴이: 채인숙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방송작가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와 현재까지 거주하며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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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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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rt0007
    •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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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drew Kim
    • 알지 못하는 곳, 가보지 못한 곳, 모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이 아직 존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애써 쓰시는 글 열심히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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