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 화인(1) "어떻게 부자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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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화인(1) "어떻게 부자가 됐나?"

기사입력 2016.05.0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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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화교1.jpg▲ 중국계 다문화학교 어린이들이 중국식 복장을 하고 춤을 추고 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이들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정착했나?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전 세계 퍼져 있는 화교·화인은 한국의 인구만큼이나 많은 5천만명 가량이며, 이들이 보유한 유동성 자산은 3조 달러 안팎으로 추산된다. 화교·화인 자본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중국의 발전 방향을 알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이같은 거대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화교·화인의 70%는 동남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흔히 인도네시아 경제를 화교·화인이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 금융과 무역, 제조업 등 대기업은 물론 소모품을 구매하기 위해 작은 가게를 가더라도 화교·화인과 흥정하기 일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인 기업인이나 한인들은 화교·화인을 흔하게 만나게 되며, 이들에 대해 관심과 궁금한 점은 많으나 실제로 제대로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다. 나 자신도 이러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 관련 서적들과 인터넷 검색, 직간접인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와 지식을 정리해 보았다. 


수백년 전에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뼈아픈 시행 착오를 겪은 화교·화인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현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들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정착했나?”라는 제목으로 1부를 게재하고 순차적으로 각각 2부와 3부를 연재한다. 


한편 화교와 화인의 의미를 놓고 다른 의견이 있다. 최근 ‘화교’는 중국국적 소지자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하고, ‘화인’은 법률적 의미에서 중국 문화와 중국인 혈통을 보존하고 있는 비(非)중국국민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모두 ‘화인’로 통칭한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수하르토 집권기인 1980년대 말 인도네시아 화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부색은 물론 외모가 흡사한 동년배 화인이 납품하기 위해 우리 회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자카르타 외곽의 농촌 마을에 회사가 위치해 있어서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에 둘러싸여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라, 그를 본 순간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지요?”라고 인도네시아말로 묻자, 한자를 못쓰는 화교 청년은 손사래를 치며 “인도네시아 사람이다”라고 일축했다. ‘눈치보기’를 하던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중국계’라는 고백을 받아냈고, 그들의 인고의 세월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언제부터 인도네시아와 교류하고 정착했을까? 고대 당나라 상인들은 바다를 통해 남양(동남아)과 교역하며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15세기부터 자바섬의 수라바야와 수마트라 빨렘방 등 지에 수천명이 집단거주하며 무역활동에 종사했다. 1619년 네덜란드가 바따비아(현 자카르타)를 점령하면서 건설과 농업에 종사하는 화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중국 대륙 동남부 지역인 ‘푸첸’지역사람이 가장 많았고 이어 ‘광동’지역 사람과 중국 고대 화북 지역에 살다가 대거 대륙의 동남부로 이주한 명문 귀족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한족 가운데 하나인 ‘하카’(客家) 사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엘리트 화교들은 바따비아와 수라바야 등 주요 항구도시에서 무역을 하거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징세와 국가전매 등의 행정업무를 맡으며 부를 축척했다. 17세기부터 식민경제의 발전에 따라 근면하고 현지 적응 능력이 뛰어난 화교 노동자들은 농업, 광업, 가공업, 건설업 등에 종사하면서 경제적 영향력을 키웠다. 18세기 중엽, 서부깔리만딴에서 대규모 금광, 방까섬에서 대규모 주석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현지로 이주했다.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인구가 급증했고, 19세기 중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신매매와 같은 가혹한 방법으로 화교들을 대거 강제 구인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막노동자를 말하는 꿀리(kuli)는 이때 생긴 말이며, 당시 청나라는 무역항구에 꿀리관(苦力館)을 설치하고 꿀리들을 모집해 송출했다. 

9일 화교2.jpg▲ 자카르타 꼬따뚜아(Kota tua) 지역 주택가 마당에 있는 중국풍의 야외 제단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화인들은 식민정부와 협력을 통해 부를 쌓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식민종주국들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 대한 투자는 거의 중단되었고 상품수출도 크게 감소했다. 동남아 화인들은 이를 기회로 부를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금융과 해운, 천연고무.담배.커피 등 농산물 가공업에 투자해 자본을 축척 했다.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유럽 식민종주국들을 몰아내면서 화인들은 한때 학살과 탄압의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화인들이 타지에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만의 엄격한 규범이 있었다. 이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정하고 배타적일 만큼 혈연과 친척, 동향에 대한 철저한 의리를 지켰다. 이들은 모국어를 쓰며 모든 상거래는 현금 거래를 할 만큼 신용을 중시한다. 심지어 상거래에 카르텔을 형성해 전세계 170여 개국에 대규모 화상 공동체를 만들었다.


무역상과 노동자로 이주해 정착한 인도네시아 화인들에게 세상은 번영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유의 상술과 연대, 근면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자리 잡고 경제적 영향력이 커져졌지만,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현지 원주민들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내부 갈등이 커질 때마다 표적이 됐다. 1740년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화교 대학살, 1965년 9월 정변, 1998년 5월 폭동 등은 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다음 편에 계속)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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