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길녀]길고 긴 시간의 검은 숲에서 우리는 환했네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김길녀]길고 긴 시간의 검은 숲에서 우리는 환했네

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기사입력 2016.12.23 12:1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길고 긴 시간의 검은 숲에서 우리는 환했네
-수마트라 섬, 최남단 람뿡 주 (Sumatra Lampung)

봄부터 새벽 산책길에 찍기 시작한 빈집.
밤새 빈 집을 다녀간 총총걸음이
노랑 대문을 점령했던
앙상한 나팔꽃 줄기에 무더기로 묻어있다.
여름 땡볕에도 끊임없이 환생을 반복하는 
온전한 몰입... 늦은 가을까지
지켜보며 예쁜 욕망이라는 것도
존재함에 함께 즐거웠다.
조용한 기다림은 외로움을 견디게 하고
쓸쓸함마저도 기꺼이 즐기게 한다.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슬프거나 기쁘지만은 않은
그 너머의 기도를 선물 받기도 한다.

-마침내, 드디어, 기어이, 떠나다

인니 지도를 펼쳐 놓으면 길쭉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살고 있는 자바 섬의 3배가 넘는 수마트라 섬.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
섬 대부분이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천 년 전부터 검은 후추의 원산지로 주목.
인니에서 두 번째 인구가 많음.
오래전 서구열강들의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또바 호수가 있음.
인니 커피의 최대 생산지.
섬 북단 아쩨에서 남단 람뿡 연결고속도로가 
2025년을 완공 목표로 진행 중이다.
장기적으로 아시아 하이웨이 네트워크와도 연결된다니, 기대가 크다.
오래전부터, 바람의 신들이 나무를 키우고 
지진이라는 죽음의 신이 공존하는 그 섬. 
인니에서 오래 살고 있는 친구는 
수마트라섬을 우리나라에 옮겨왔으면 좋겠다 했다.
세계 최대 군도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니의 수마트라 섬.
이제, 마음은 그해 여름 안으로 떠난다.

왕복 기차로 다녀온 족자카르타 여행을 제외하고 
인니의 모든 여행은 비행기를 이용했다. 
아주 오랜만에 떠나는 가족여행.
수마트라 섬은 기사와 함께 승용차를 이용하기로 한다.

수마트라 섬 남쪽 끝 바까우에니에 있는
페리 터미널로 가는 머락 항 출발.
자카르타에서 떠난 지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승선수속은 기사 이름과 차량번호 인원파악으로 간단하다.
인적사항 기재나 가입하는 보험은 없다.
만약 사고가 난다 해도 우리는 그냥 
익명의 숫자로 파악된다는 생각에 불안했지만, 
맑은 날씨만 믿기로 한다.
여객선 안 이국인은 우리뿐이다.
바다는 조용하여 호수 위를 가는 듯하다.

출발 두 시간 만에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섬의
초입에서 만나는 끝없는 옥수수밭.
항구 출발 후 처음 도착한 해변.
해수욕 용품을 파는 가게의 인니인
젊은 부부가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제나라가 아닌 한국에서 만나 결혼 후
고향에 정착했단다.
한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로 가끔씩
생각나고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섬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한국을 아는 인니인들이었다.
커다란 인어 조각상과 고운 꽃이 핀 방풍림 숲과
한가롭게 바다를 즐기는 현지인들.
섬의 첫인상은 여유로움이었다.

낮은 지붕들이 정겨운 마을들을 지나 
언덕 위에 위치한 반다르 람뿡 부낏란두 호텔로
가는 진입로에는 목화나무가 솜털꽃을 피운 채
이국인들을 반긴다.
호텔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식당마다
라마단의 저녁 만찬을 즐기는 무슬림들로 북적인다.
풍부한 해산물 요리는 가격에 비해 훌륭하다.
호텔 조식 시간은 라마단 기간이라서인지
임산부가 섞인 한 팀의 인니인들 뿐이다.
인니에 살면서 이국인들의 여행은 
라마단에 하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식사조절이 필요한 많은 무슬림들이 여행을 
자제하는 기간이라 했다.
잠시의 스콜 뒤에 나타난 무지개는 우리의
긴 여행을 위한 푸른 징조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여행지는 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최남단 지역의 일부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코끼리 공원인 
와이깜바스 국립공원(Taman National Way Kambas)으로 출발한다.
친절하지 않은 이정표 덕분에 점심도 거른 채
출발 4시간 30분 만에 공원 도착.
간단한 요기 후, 코끼리 투어를 한다.
꽤 많은 탑승료가 아깝지 않은 건
밀림 같은 공원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경험이 가능해서이다.
인니 곳곳에 있는 코끼리는 모두 
여기에서 사육되어 분양된다고 한다.
공원에서 한나절을 보낸 후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꼬따부미(Kotabumi)로 향한다.
호텔과 식당 찾기도 스마트폰으로 해결한다.
작은 도시의 호텔은 부실한 게 많다.
저녁은 현지식당에서 인니 음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호텔 로비에서 한국인 전도사를 만났다.
그 역시 섬이 초행이었고
전도를 겸한 여행 중이라 했다.

-처음 만나는 커피꽃과 루왁

건기임에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안개와 비를 따라
산으로 숲으로 떠난다.
떠난 지 긴 시간이 흐르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즈음... 비포장 도로가에 무더기로 핀
하양꽃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만 보던 커피꽃이었다.
모든 처음이 그러하듯이...
술이나 담배를 즐기지 못하는 나의
유일한 기호식품은 차와 커피, 
그중에서도 커피를 가장 즐기는 내게 
커피꽃을 만난 설렘은 인니 여행 중 최고였음을 고백한다.
꽃향기를 맡고 빨강체리 껍질을 벗기고
얇은 과육의 체리를 먹는다.
꽃의 향기와 체리의 맛은 달콤하다.
커피나무에 집중하는 중, 멀리서 공포탄 소리가 들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체리 도둑을 쫓기 위해 
농부들이 쏘는 총소리였다.
처음 보게 된 커피나무 사진 찍기에 열중했던 우리를
농부들은 체리 도둑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달콤 쌉싸름한 생각에 웃게 된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진흙길을 지나 포장도로에 진입하자 
루왁커피(Luwak Coffe/Kopi Luwak)를 파는 가게가 눈에 띈다.
루왁커피만을 취급한다는 젊은 사장에게
루왁(긴꼬리 사향고양이)를 볼 수 있냐고 묻자, 
뒤뜰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에 갇힌 고양이들은 낮잠 중이다.
고양이가 먹다 남긴 음식물들은 모두 과일이다.
커피체리도 먹이 중 하나로 
배설물 중의 일부가 루왁커피다.
버킷리스트에 등장하기도 하는
루왁커피는, 이처럼 고양이의 사육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
집 뒷밭엔 오래된 커피나무들이 많아,
꽃 사진 찍기와 체리 시식도 맘껏 할 수 있었다.
고산지대에 속하는 핀파스리와 도로(Jalan Lintas Liula)
주변 마을은 커피가 주 수입원처럼 보였다.
커피나무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인에 의해 
인니에 처음 이식되었다 한다.
커피는 오래전부터 원유와 함께 
인니의 중요한 원자재로 귀하게 취급되었다.

마을 앞마당마다 널려진 커피체리들은 
우리네 시골의 벼처럼 익숙한 풍경들이다.

-호수에 뜬 작은 섬, 그리고 바다의 정원

람뿡 주 동부를 지나 서부의 하루는 
라나우 호수(Danau Ranau)에서 시작한다,
조용한 시골 마을 작은 식당의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현지 음식들이다.
좌식 부엌에 온돌식 작은 방에 앉아
뷔페식으로 차려진 반찬을 원하는 대로
골라 먹고 거기에 맞추어 식사비를 낸다.

온천수가 나온다는 바다 같은 넓은 호수엔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우리는 생애 처음, 호수 온천에서
수영을 즐긴 후... 작은 배를
타고 호수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간다.
거인의 두 팔로 안으면 품에 쏙 안길 
것 같은 섬에는 잘생긴 청년 두 명이
물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다.
뱀이나 쥐 같은 동물들이 살지 않는
섬은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작은 또바 호수를 만난 기분이라 
위안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마지막 장소는 북서부에 위치한 끄루이 해변(Krui Pantai).
세계 서퍼들이 즐겨 찾는다는 바다.
바닷가에 있는 호텔의 외관은 작은 별장처럼 근사하다.
실내는 샤워기도 없고, 화려한 빌로드 침대 시트 
근처에는 개미떼가 많다.
주변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이라니... 
긴 여정의 피곤함에 모두 달콤한 잠에 들었지만
나 홀로 쭈그리고 앉아 쪽잠을 잤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바다.
바다는 ‘아~’라는 감탄사만 불러온다.
넓고 길게 이어진 바닷물은
가도가도 무릎까지 찰랑대는 수심으로
쪽잠을 확~ 달아나게 하며... 더욱이 그 넓은
바다를 즐기는 이들은 우리뿐이다.
잔잔한 바닷속엔 해초들이 초원을 이룬다.
좋아하는 우산나무들이 죽은 산호들과 함께
해변에 즐비하다.
가 본 적 없는 세상 끝, 그 바다가 이곳에 있다.
수많은 산호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모래들은 
분홍과 하양으로 반짝이며, 바다정원 안
우리를 하루 속에서 환하게 비춘다.

-생과 사를 풀어내는 하양깜보자꽃 나무의 처소

처음 묵었던 호텔에서 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돌아오는 길.
바다마을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야자수 숲은
잠결에 깨어 보고 또 보아도 지겹지 않다.
차의 통행이 드물었던 국립공원 깊은 골짜기를
넘으며 보았던 검은 숲의 나무들처럼...
첫 날은 볼 수 없었던, 공동묘지가 보인다.
일찍 알아버린 죽음 덕분에 
묘지에 관심이 많은 나의 호기심은
독특한 형식의 인니 무덤들도 관심 대상이다.
늙은 하양깜보자꽃들이 오래된 묘지임을 짐작게 한다.
각양각색의 타일로 만든 묘지는 봉분 없이 평평하다.
생·사 연도를 기록하는 건 세상 모든 묘지의 공통점.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는 어린 소녀의 묘지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으고 눈을 감는다.
저물녘의 바쁜 햇살이 묘지를 환하게 비춘다.
하양깜보자꽃들이 뚝뚝 떨어져
산 자들의 안부를 대신한다.
깜보자꽃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발리꽃이다.
같은 나무라도 인니에선 종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힌두교인이 많은 발리에서는 탄생과 환희를,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인 다른 섬에서는 
묘지에 심어 죽음과 애도를 상징한다.
하양꽃잎에 숨은 만남과 이별이 
이국여자에겐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하양커피꽃과 하양깜보자꽃은
내가 인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슬픔과 환희의 이미지다.

처음으로 가장 길게 한 가족여행.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가기 위해
도착한 바까우에니 페리 터미널.
올 때와는 다르게 신분증 확인을 한다.
우리가 여행하기 얼마 전에 있었던
아쩨 감옥 탈옥수들을 검거하기 위한 절차였다.
아쩨가요 커피로 유명한 아쩨는 
여러 가지로 유명세를 타는 지역이다.
2016년 12월엔 대규모 지진으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운 한국산 매실 엑기스와 
베스트 가이드와 베스트 드라이버 그리고
스마트폰 덕분에 국립공원 두 곳을 무사히 넘어서 
탈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음에
우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인니에 오래 산 지인들은, 무지와 용기가 함께 한
수마트라 섬 오지마을과 검은 숲의 승용차 여행에 
찬사를 보내며 부럽다고도 했다.

생의 한가운데서 어느 한 철을 기억하고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사는 일.
약간의 긴장과 긴 설렘이 함께였기에
더 오래, 마음 다락방에서 그때를 호명하리라.

울고 싶을 때 당신은 어찌하는가,
어떤 이는 울기 위해 사막에 가고
어떤 이는 울기 위해 바다에 간다든가...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없는 나는
해질녘 강둑으로 달려갔다.
울고 싶은 날은 걷기보다 
뛰어가는 것이 좋았던 기억이 많다.
이제, 뛰어감에 지친 나는 먼 먼 섬
세상 끝처럼 다가왔던 길고 긴 바다 정원을 떠올린다.
그때, 데려온 산호 몇 개
놓아둔 나무 장식장 앞에서 서성거린다.
그 사이, 눈물은 조용히 시간의 숨결을 만진다.

......................................................................................................

그날의 하루를 만난 오늘 하루

폭염주의보 내려진 대서에 떠난 강원도행
늦은 점심에 나온 다슬기탕을 쉼 없이 먹습니다
식당 화단에 무더기로 핀 노랑다알리아는 한여름
땡볕에 공갈빵처럼 맘껏 부풀어 오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낯선 자리
실없는 농담과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떠도는 웃음소리
해가 긴 계절 안에서 또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긴 여행 마지막 날, 이국여자가 건네주던
눈 큰 인형과 유리 펜 한 자루와 한국어로
짧게 쓴 그림엽서 한 장
더는 어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순간에도
호명하게 될 당신이란 따뜻한 이름
줄 수 있는 게 가난한 마음뿐이라는 노래 들으며
마음조차 헐렁한 나는 빈 술잔만 만지작거립니다

모든 신을 모셔 놓은 검은 숲 숨겨진 사원
퇴고를 미루는 습작의 문장처럼
비밀상자에 넣어 두었던 상처의 봉인
조심스럽게 풀어내어, 말없이 당신 손
잡은 채 별무늬 석상에게 짧은 기도를 바칩니다

낡은 슬리퍼를 끌고 나온 익숙한 골목길
반쯤 열린 하얀 대문 안 외딴 방
녹슨 자물통을 어렵게 열었습니다
기울어진 이젤 위, 그리다만 당신의 뒷모습에
지워진 노래와 경건한 작별식
못다 한 이야기를 정성껏 그려 넣습니다

백야의 길고 긴 그 시절의 하루, 오늘
만난 늦은 하루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L1030093.JPG
 
L1030145.JPG
 
L1030223.JPG
 
L1030261.JPG
 
L1030352.JPG
 
L1030392.JPG
 
L1030446.JPG
 
L1030532.JPG
 
L1030534.JPG
 
L1030686.JPG
 
L1030761.JPG
 
L1030788.JPG
 


 
4301b85a056dab67badf9baa8e682cb8_hp4vbaS1nS5hb.jpg    김길녀

김길녀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 <키 작은 나무의 변명>등이 있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을 수상했다. 문학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와 문화기획자로, 라디오방송 등등의 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긴 휴가를 받아 여행자로 인니의 자카르타에서 살기도 했다.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즐기며 지낸다. 우두커니 있는 걸 좋아한다. 느낌이 좋으면 살짝, 미치는 성향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깊이 빠져서, 그때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