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와 주변 믈라유 문화권의 불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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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와 주변 믈라유 문화권의 불교 (2)

기사입력 2017.03.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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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람바난.jpg▲ 2009년 족자 지역 지진 피해 직후의 쁘람바난 사원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2. 스리비자야 왕국과 경쟁 왕국들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 가자마다대 초빙교수

다음글은 2017년 3월 2일자 불교평론에 게재된 '인도네시아와 주변 믈라유 문화권의 불교'라는 제목의 글을 불교평론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데일리인도네시아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동남아 고대국가의 구조는 만다라(曼陀羅) 형태였다. 해양부 동남아에서는 만다라를 만달라(Mandala)로 칭하는데, 사람 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다. 불교 용어로 만다라는 중생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덕(德)을 나타내어 둘러앉은 모양의 그림으로 그려진 군신상(群神像)을 말한다. 동남아 고대국가의 통치구조는 지배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라, 지배자가 중앙에 서는 동심원 형태, 즉 만달라 형태였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선명하지만 파문은 점차로 약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중심은 있고 변경이나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금과 노역을 바친다. 7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에 등장한 제국(帝國) 형태의 만달라는 이전 시대의 불교문화권의 만다라와 달리 더욱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왕권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수마트라의 빨렘방을 중심으로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장장 7세기에 걸쳐 장수한 스리비자야 왕국과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인근에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영한 앙코르(Angkor) 왕국이 각각 해양부와 대륙부 동남아를 대표하는 제국형 만달라 왕국이었다. 

스리비자야 왕국
스리비자야(650~1377)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 자바와 깔리만딴 일부 지역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스리비자야를 스리위자야(Sri Wijaya)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바(Java)를 자와(Jawa)로 표기하는 하는 인도네시아 신철자법(1972년)에 따른 것이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를 통한 분석에는 미치지 못하나, 고고학자들은 이 고대 왕국의 생존 방식이 농업에 의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왕국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세데스(George Coedes, 1886~1969)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중심지는 수마트라 빨렘방이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을 통하여 스리비자야는 불교왕국이자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해상 요충지에 위치했던 이 왕국은 일찍이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당(唐)나라 승려 이징(義淨)이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가 전해지고 있다. 귀로에 그는 믈라유 전 지역이 이미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향하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믈라유는 오늘날의 말레이반도를 말한다. 

산자야 왕국과 사일렌드라 왕국
스리비자야 왕국의 발흥과 거의 같은 시대에 좁은 순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바에서는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과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왕국이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과 수마트라와 자바 사이의 순다해협의 주요 항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역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쌀의 섬 자바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스리비자야의 국제교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말레이반도 남단의 조호르와 수마트라 북단의 아쩨 등지에서도 식량 일부가 조달되기도 하였다. 산자야 왕국이 곧 스리비자야의 주요 식량 공급지가 되었으나 머지않아 수마트라와 자바 간의 해상무역 주도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스리비자야와 산자야는 한동안 긴장 관계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멸망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으나 산자야와 조호르-아쩨 간에 동맹이 이루어졌고, 이들의 삼각 동맹으로 스리비자야에 식량 공급이 축소되어 점차 목을 조이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스리비자야는 이처럼 항상 식량 공급원에 신경을 썼다. 산자야와 쟁패하는 동안 스리비자야 왕국은 자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불교문화 배경의 사일렌드라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같은 불교왕국인 사일렌드라가 산자야를 대신하여 스리비자야의 새로운 식량 공급원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문화는 이때 만개하였다. 현존하는 주요 인류 문화유산의 하나이자 공식적인 세계 최대의 불교 유물인 보로부두르 사원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다.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완공한 것으로 믿어지는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와 발리 문자의 합성어로 ‘언덕 위의 승방(僧房)’이라는 뜻이다.  

힌두 산자야 왕국의 후손들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외곽지대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850년경 산자야 왕과 사일렌드라 공주 간의 결혼동맹으로 중부 자바의 통제권이 다시 산자야 왕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산자야 왕국을 전성기로 이끈 라카이삐카탄(Rakai Pikatan) 왕은 자신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로부두르에 견줄 수 있는 힌두사원을 남기고 싶었다. 보로부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850년부터 856년 사이에 축조된 쁘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세워졌다. 세계적인 힌두 유적지의 하나로 알려진 이 미려한 석조건축물은 로로 종그랑(Loro Jonggrang)사원이라는 별칭으로 오늘날 중남부 자바의 족자카르타에 남아 있다. 쁘람바난 사원이 세워진 동네 이름이 쁘람바난이다. 이 사원이 축조될 당시 쁘람바난은 부유하고 화려한 왕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산자야 왕국의 번영에 따라 중부 자바는 한동안 힌두왕국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통치되었다. 동부 자바로 세력권을 확대한 힌두왕국은 10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아 990~991년 사이에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하여 한때 왕국의 중심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25년 후 스리비자야는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자바의 힌두왕국의 위대한 군주 다르마왕사를 제거한 후, 그의 영토를 수많은 봉토(封土)로 분할하였다. 이후 다르마왕사의 조카 아이르랑가가 다시 산자야 왕국을 회복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1019년 다르마왕사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부와 서부 자바에는 오늘날까지 거리와 호텔 이름으로 다르마왕사가 많이 남아 있다. 

아이르랑가는 자바 힌두왕국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번영을 되찾았다. 아이르랑가 통치 시기에 수많은 인도 고전이 산스크리트어로부터 자바 고어로 번역되고, 자바의 토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 자바의 전 지역은 이전의 왕국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영하였다. 동부 자바를 계승한 통치자들은 내륙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동시에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해상무역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1222년 자바의 새로운 강자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동부 자바 말랑에 세워졌다. 싱하사리 왕국은 1275년과 129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스리비자야의 대군이 침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던 자바 주변의 해상무역을 엄중한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즈음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1293년 강력한 함대를 앞세워 싱하사리 왕국의 정복에 나서 자바에 등장하고 있다. 경쟁 상대가 바뀌고 자바에서 후원 세력이 사라진 스리비자야 왕국은 주변으로부터 식량 공급까지 원활하지 못하여 국력이 서서히 소진(消盡)되었다. 

앙코르.jpg
 
▲ 앙코르와트 사원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앙코르 왕국
동남아 대륙부의 최대 왕국인 앙코르(Angkor)  왕국도 자바를 거쳐 바닷길을 건너온 힌두불교를 배경으로 크게 번영한 왕국이었다. 8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동남아 고대 왕국들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축조하였는데, 보로부두르와 앙코르와트 이외에도 쁘람바난과 버강(Pagan) 등지에 대표적인 유적이 남아 있다. 앙코르와트는 오늘날 캄보디아에,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은 인도네시아 자바에, 버강은 미얀마에 있다. 이들 동남아의 고대국가는 모두 중국에 조공사절이나 교역사절을 보냈고, 중국 왕실은 이러한 사절단의 왕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초기 동남아 교역국가로 삼불제(三佛齊)와 부남(扶南)이 등장한다. 삼불제는 스리비자야 왕국이며, 부남은 앙코르 왕국의 전신인 푸난(Funan)이었다. 푸난은 쩐라(Zenla)로 발전하는데, 쩐라의 중국식 명칭은 진랍(眞臘)이었다. 이 왕국이 바로 크메르(Khmer)족이 메콩(Mekong) 강 하류의 거대한 천연 호수 톤레삽 인근에 세운 앙코르 왕국이었다. 

8세기 말(연대 미상)부터 834년경까지 쩐라를 통치한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는 스리비자야 영향하에 있던 자바 왕국들의 간섭을 벗어나 톤레삽 인근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 영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특히, 관개를 통한 인공적인 벼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식량 확보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아 왕권 확립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앙코르 왕국의 번영과 영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톤레삽 호수 주변의 광활한 농경지는 충분한 식량원이 되었기 때문에, 스리비자야 무역왕국의 경우와 달리 식량부족이 앙코르 왕국 쇠퇴의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메르족, 군소 고산족과 함께 주변 국가에서 잡아온 수많은 전쟁포로가 톤레삽 주변의 농경지에 군거하며 식량을 생산하고 앙코르 왕국 건설에 동원되었다. 왕국 건설 사업은 전쟁에 의존했으나, 전쟁은 항상 승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야바르만 7세 왕 이후의 앙코르 왕국은 동쪽과 서쪽에서 참(Cham)족과 씨암(Siam)족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머지않아 북쪽의 비엣(Viet)족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대륙부 동남아 최대의 왕국이자 찬란한 앙코르 제국은 주변 국가의 협공으로 점차 국력이 쇠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추어 씨암족이 크게 발흥하여 12세기경부터 앙코르 왕국에 대한 적극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쑤코타이(Sukhothai) 왕국을 세워 앙코르 왕국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왕실의 수많은 학자와 장인(匠人)들도 주요 대상이었다. 오늘날의 태국 영토로 영역을 확장하고 수코타이를 전성기로 이끈 람깜행(Ramkhamhaeng) 대왕이 창제한 태국 문자도 앙코르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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