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장려상/일반부] 떠돌이의 인도네시아 첨벙기 / 이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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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일반부] 떠돌이의 인도네시아 첨벙기 / 이강락

기사입력 2011.10.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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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떠돌이의 인도네시아 첨벙기

이 강 락



인니로 떠난 자유

젖을 떼자 말자 ‘막걸리와 감자’로 컸다고 합니다. 어렵사리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가슴을 짓누르는 불만과 알지 못할 분노를 삭이러, 헌 자전거 하나 마련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으아! 자유다! 여름 해가 지는 저녁이 되어 안장에서 간신히 내려올 정도로 지친 몸을 시원히 적셔주는 막걸리는 가는 곳마다 맛이 다르더군요. 함께 나오는 안주와 인심도 달랐고요. 자전거를 맡기고, 지리산을 오르다가 어두움과 비를 만나 바위틈에서 밤새 아침을 기다리기도 하고, 백록담 물에 손을 담그고 하산하던 길에 몸살에 걸려 대피소에서 밤새 끙끙거리며 앓기도 하고, 추풍령에서 만난 장대비를 맞으며 한강다리에 닿으니 서울이 물에 잠긴 듯하였지요.  이렇게 22일간을 휘돌아 오니 가슴에 하나 남는 것이 있더군요. 감사! 감사였습니다. 그간 가슴을 억눌렀던 원망과 불평이 씻겨진 것입니다.

떠남이 준 선물이었지요. 나이 쉰에 정년퇴직을 한 아버지를 무능하다 여기며, 보란 듯 다니던 평생직장’에서 밀려난 것이 나이 마흔 여섯이었습니다. ‘이제껏 애썼으니 쉬라’는 아내의 위로가 가장의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더군요.  귀농하여 퇴직금 다 쓰고, 베트남 가서 취직도 했다가, 미시간의 대형 소비재 판매 회사에 기웃거리기도 했다가, 순간오폐수처리기를 개발한다고 회사를 만들어 운영해보기도 했지요. 중풍환자를 위해 운전을 하여주고 재활운동을 도우면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한 의과 대학에 두 번이나 낙방하여 아예 그 대학 앞 동네에 방을 얻어서 공부를 하던 중,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봉사자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을 하였습니다. 배우자의 동의서에 아내가 서명을 하여 주며 ‘당신은 쭈그리고 앉아서 공부할 팔자가 아니니 잘 다녀 오라’고 하더군요. ‘현대인은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신 고아가 되었다’는 누구의 말처럼…… 가족으로부터, 공부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다시 외로운 떠돌이 홀 몸이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첨벙대며, KOICA 봉사단원- 가난한 행복과 자유

2004년 8월 2일 13명의 봉사단원 중에 가장 늙은? ‘아버님’으로 인니에 도착하여 이 나라 전력공사 연수원에서 합숙하며 언어를 배웠습니다. 영어 알파벳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태국으로 간 대원은 2년간 꼬불거리는 그 나라 알파벳 배우느라 고생만 한다는데, 인니어는 그냥 발음부호처럼 읽으면 되니까요. 하숙생활 한 달 가량 언어 공부를 한 뒤 바로 서부 자바의 수방(Subang)군청으로 배치되어 지역개발에 관한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자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하숙’을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 도착하여 지리를 익히기 전이라서, 군청 가까운 곳부터 걸어 다니며(차가 없으니) 집집 마다 문을 두드리며 ‘하숙방’있냐고 물었습니다. 한국사람을 처음 보지만 따스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도움을 주려 하더군요. 결국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지은 널찍하고 낡은 집을 관리하고 있는 아데 씨네 집에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아데 씨와 부인(이부라 불러서 이름 모름), 큰 딸과 사위, 고교생인 둘 째 딸과 중학생인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먹고 자고 빨래해주고 월 30만 루피아를 주기로 하였지요. 아내에게 전화하니 ‘너무 싸다’고 하여 아데 씨 아이들 장학금으로 20만 루피아를 별도로 주었습니다. 아데 씨는 부인이 한명 더 있어서 수요일만 되면 둘 째 부인에게 가더군요. 첫 부인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니 천진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더군요. 용접공인 아데 씨가 오토바이 벵껠에 다니면서 받는 봉급이 월30만 루피아인데, 두 집 살림을 하자니 집에 와서도 밭농사를 짓고 집에서도 가끔 용접 일을 하더군요. 열심히 고달프게 사는 가장이었지요. 이부가 생일이면 떡을 해 주었습니다. 뿌뜨리노옹이라는 이름의 떡인데 씽콩으로 만든 아주 쫄깃한 떡이지요. 요즘도 손님들을 위해 집에서 잘 만들어 먹습니다.


첫 나들이-족자

군청에선 딱 한 번 ‘우리 지역이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고 묻더군요. 그래서 예산과 결산을 투명하게 하여 외국인이 마음 놓고 투자를 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더니, 관광진흥(promosi) 일을 도와달라고 하여서 군청 소개 책자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국립공원 팜플렛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관광객을 많이 오게 하려면 유명 관광지를 여러 곳 돌아 보면서 ‘왜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를 보고 와야겠다고 건의를 하여 ‘출장증명’을 받아서 첫 여행을 떠났습니다. Subang에서 버스를 타고 Tangkuban Perahu화산을 넘어, Bandung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습니다. 짧은 인니어로 물어 물어서 Bandung역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에 족자(Yogyakarta)로 출발하는 기차가 있더군요.

기차표를 사는 일, 기차 칸을 찾는 일, 새벽 2시경에 도착하여 잠시 쉴 여관을 찾아 들어 가는 일, 모두가 깜깜한 곳을 더듬어 한 발 한 발 내딛듯 하였지요. 여관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 오젝을 불러 해가 지도록 이곳 저곳을 매달려 다녔습니다. 몸은 힘 준 곳마다 뻐근하고 가슴은 뿌듯하였습니다.  보로부드르 사원, 병풍처럼 둘러 싼 산들이 인상적이고 이렇게 큰 바위 사원이 흙에 묻혀있었다니!  앙꼬르와뜨를 보기 전에 이곳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KITAS가 있으면 요금이 싸다는 것을 모르고 외국인 요금을 내고 들어 갔는데 이것을 못내 속 쓰려하는 것을 본 오젝 아저씨가 쁘람바난 사원은 들어 가지 않아도 잘 보이는 곳이 있다면서 한 장소로 힘들게 오토바이를 몰고 가더군요. 한 때의 종교적 열정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는데, 지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왕이 살고 있다는 Istana (궁)에도 들어 가 보고, 바띡 수 놓는 곳에도 가 보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해변을 마지막으로 족자 오젝 관광을 마쳤습니다. 가장 유명한 음식을 물으니, 손님의 행색에 맞게 ‘나시우득’ 파는 포장마차로 데려다 주어 맛나게 먹고는 족자 역으로 왔습니다.


메단과 또바 호수, 씨삐소삐소 폭포

족자에서 자카르타로 오니 언어연수 때 알게 된 이 나라 친구가 메단에 함께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습니다. 이 친구의 회사 지사에서 보내준 차로 Toba(또바) 호수로 가 수영도 하고 멋들어진 점심(나시고렝)을 먹었습니다. 이 호수가 얼마나 큰지는 수마트라 지도를 보면 짐작이 가는데, 자전거로 일주를 한 갈릴리 바다(사실은 호수)보다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치 좋은 곳, 판판한 자리가 있어서 사진을 찍으니 웬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내밀며 요금을 내라고 하여 찜찜하지만, 몇 천 루피아 주었지요. 가드레일 위의 원숭이들을 신기하게 보고, 원숭이는 우리를 신기하게 보고, 푸르른 호수와 진초록 나무들과 맑은 하늘이 이 번 여행의 선물인 듯 하였지요.  메단 시내에서 전날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면 폭포가 있습니다. 씨삐쏘삐소(Sipisopiso)라는 이름이라는데, 뿐짝처럼 높고 시원해서 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 곳이더군요. 폭포가 소방호스처럼 한 줄기로 뿜어져 내리는 것이 장관이더군요.
이 폭포를 보고 나서 Subang에 있는 여러 폭포를 선전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Batam바땀

메단에서 바로 바땀으로 날아 갔습니다. 평평하고 조용한 섬, 언덕배기의 아름다운 호텔, 바닷가의 Seafood 레스토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 한 분이 대접해 주신 저녁밥이 꿀맛이었습니다.


Bali, 왜 세계적인 관광지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열 번을 넘게 발리를 찾았습니다. 주로 꾸따 해변의 값싸고 정원이 아름다운 여관(하루 4만 루피아)에 숙소를 정하고 사원이나 민속춤공연을 보고, 해변의 일몰사진을 찍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만 있는 Seafood 뷔페는 봉사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사였지요.

뽀삐 골목 안에 있는 씨크릿 가든에서는 편의점 보다 맥주를 싸게 팔아서 갈 때 마다 애용을 하였습니다. 대통 안에 든 ‘빈땅’ 한 병과, 끄르뿍 얹혀진 아얌바까르 한 접시에 세상을 얻은 듯한 즐거움과 뿌듯함을 맛보곤 하였지요. 해방! 그리고 부요 함! 월급 없는 자원봉사자이지만 시간의 부요 함과 기회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자유 함이 얼마나 소중했던지요, 기억에 남는 ‘기차 발리 패키지’ 여행을 소개합니다. 반둥에서 기차를 타고, 수라바야에서 갈아 타고 반유왕이(Banyuwangi)로 와서 철도청 버스를 타고 발리 섬으로 가는데 2박 3일이 걸리더군요. 한번은 해 볼만합니다. 발리가 왜 세계적인 관광지인가? 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아직도 못 얻었습니다. 짐작하기로는 지갑이 얇은 사람부터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그들의 씀씀이에 맞게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다양한 잠자리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고, 섬 주민들 모두가 관광마인드로 손님들을 대하는 열린 마음들이 아닐까 합니다.


롬복 승기기 해변과 린자니 산(3,726m)

발리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몇 시간 가면 안개 뿌연 마따람(Mataram) 항구가 정겹게 다가옵니다. 마따람에서 왼쪽으로 가면 승기기(Senggigi) 해변이 있습니다. 발리보다 더 한적하고 자그마한 해변이지요. 이곳에도 한국식당이 하나 있어 고국의 맛을 제공하고 있더군요. 해변의 야자나무로 만든 원두막을 숙소로 빌려 주는데, ‘낭만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에 좋은 곳이란 생각입니다. 마따람에서 시외버스로 동쪽으로 가면 린자니(Rinjani) 아래 동네에 다다릅니다. 동네이름은 잊었지만 다시 가라면 갈 수 있겠지요. 저녁 어두 컴컴할 때 도착하여 정류소에 있던 몇 사람을 따라 민박을 하였습니다. 린자니 산을 오른다고 하니 가이드와 짐꾼이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가이드 하루 8만 루피아, 짐꾼 7만 루피아. 쌀과 음식, 물 등 짐이 많다는 거였죠.  아침밥을 일찍 먹고, 가이드와 짐꾼을 따라 나섰습니다. 8시간을 꼬박 걸어 올라 분화구에 다다랐습니다. 이 나라 만 루피아 지폐에 나오는 그 그림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천지보다 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넓은 호수가 해발2 천 미터 이상의 산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지요. 분화구 가장자리(rim)에 텐트를 두 개 치고 각각 잠을 자고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니 구름에 싸인 정상이 멀리 보이고, 호수 안의 어린 분화구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분화구 아래로 출발하여 호수에 다다르니 점심, 여기서 점심을 먹고 잠시 내려가니 시작도 모를 온천 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와! 이런 온천이 아깝게도 놀고 있네! 물만 보면 뛰어들어가는 ‘자궁회귀본능’ 으로, 널따란 물 가운데로 들어가니 발에 무언가 뭉클거리는 것이 있어 화들짝 잡아 보니 붕어였습니다. 아니 웬 붕어들이 이 뜨거운 온천에 살고 있는 게지? 적응! 바로 적응 능력이었겠지요!

아까운 온천을 들고 올 수도 없어 다시 행군하여 엊저녁 야영한 곳 맞은 편에 있던 정상 인근의 분화구로 다시 기어 올라갔습니다. 짐꾼은 그 가파른 곳을 작대기 양끝에 짐(냄비, 천막, 식품 등)을 매달고, 맨발에 쌘달(쪼리?)만으로도 잘도 오릅니다.

저쪽 분화구에서 이쪽 정상 쪽 분화구로 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네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니 산에서 2박인데, 간밤 번개치고 천둥 칠 때 천둥이 저 아래서 들리더군요. 잠결에도 여기가 높긴 높구나 하면서 신기해하였지요. 정상도전, 새벽 3시. 가이드만 손전등을 들고 앞장을 서고, 어두운 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 시작하여 거므스레 정상이 보일 때쯤이었지요. 풀 한 포기 없는 자갈산만이 앞에 있는데, 지팡이 없이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려니 두 발 올라가서 세 발 미끄러지는 형국이네요. 온 몸이 땀에 젖는데,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며 이거 계속 올라야 하나? 고지가 저기인데. 잘못 미끄러지면 저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아주 갈수도 있는데, 대한민국정부가 보낸 봉사단원이 예서 죽으면 아니 되지. 지팡이 준비를 못해서 결국 다음에 다시 오르기로 하고 안내원에게 내려가자고 하여, 아직도 시커먼 분화구를 옆에 끼고 야영장소(base camp)까지 내려와, 짐꾼과 하산하였습니다.

포기하기까지는 어려웠지만 일단 포기하고 나니 자유로웠습니다. 하산하는데도 하루 온종일 걷는 고된 행군이었는데, 평소에 헬스클럽 가서 하체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등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스메루 3676m 

백두산 보다 1000미터 높은 린자니를 오른 뒤 곧 바로 수라바야로 와서, 자바섬 최고봉인 수메루(Sumeru) 화산을 향해 갔습니다. 또 물어 물어가야 했지만, 결국 뜻이 발을 이끌어 주더군요. 버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동네에 이르러 수메르 갈 길을 물으니, 지프를 세내야 한다, 아직 우기라서 입산 할 수 없을 거다, 별 이야기가 들렸지만, 결국 지프는 비싸서 오젝을 이용하기로 하여, 요금을 흥정한 뒤 수메르 산 아랫 동네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있는 수메루산 관리사무소에 입산신고를 하는데 동네까지는 갈 수 있으나 산에는 못 올라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왕 왔으니 산자락이라도 만져보고 가야겠기에 동네만이라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오토바이도 힘겹게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달려 산속 한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몇 채 안 되는 집 중에 민박을 할 만한 집을 찾아가서 재워주고 먹여달라고 부탁을 하니 그러라고 하더군요. 주인영감은 나이가 72세라는데 건강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습니다. 두 살 된 아들이 있다 하여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산엘 늘 오르내리니까 건강해서 아직도 젊고 부인도 여기 저기 넷인가 된다고 하더군요. 집안에 들어서면 봉당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화덕을 만들어 장작불을 때어 음식을 하더군요.  린자니 때와 마찬가지로 더위가 문제가 아니고 추위가 문제이더군요. 영감님이 불러다 준 안내원에게 음식물을 들리고 또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리산(智異山)처럼 너른 품과도 같은 아늑한 산자락을 지나 4시간여 오르니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호숫가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안내원이 말합니다. 이 이상은 위험해서 더 올라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곳의 풀잎마다 화산재가 덮여서 스칠 때 마다 화산재가 마치 양 횟가루처럼 옷에 묻습니다. 별 준비 없이 왔고, 우기에 등산하다가는 언제 산사태를 만날는지 알 수 없어 위험하다고 하니 수긍하고 돌아섰습니다. 아까 지나 온 길을 감상하며 영감님 집으로 내려 왔지요.


브로모, 낮이 더 좋아

수메루 동네에서 오젝을 불러 보로모(Bromo) 화산으로 갔습니다. 보로모에서 좀 멀리 보이는 수메르였는데, 이젠 수메르에서 보로모로 가는 것이지요. 오토바이의 기동력 덕분에 아침 10시경에 보로모의 널따란 모래바다에 들어섰습니다. 땅콩 밭을 하면 참 좋겠다, 길 좌우로 우거진 고사리도 욕심을 더하였습니다. 해발 2200미터의 보로모 화산을 일단 지나쳐 해발 2700미터의 전망대가 있는 북쪽의 산(忘名)으로 올라갔습니다. 맑은 해가 비치는 전망대엔 관광객들도 별반 없어 조용하더군요. 전에 왔을 땐 새벽 3시에 숙소를 떠나 일출을 본다며 덜덜 떨면서 왔었는데 이 시간대는 따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탁 트인 광경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조 앞에 브로모가 보이고, 저 멀리 수메루가 보이는 장소를 골라 수메루가 방귀뀌기를 기다렸습니다. 퍽 하는 모양으로 화산재를 뿜어내는 수메루, 거의 10여분 간격으로 희뿌연 가루를 하늘을 향해 뿜어댑니다. 흰 구름 떼가 수메루 턱 밑을 가립니다. 아기들 턱받이 하듯이 말입니다. 앞엔 보로모, 뒤엔 방귀뀌는 수메루의 광경을 사진기에 잘 담아와서 지금까지도 바탕화면에 깔고는 컴퓨터를 열 때마다 보고 있습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은 뒤 보로모 분화구로 올라갔습니다. 하얀 김을 내뿜고 있는 살아있는 화산, 많은 관광객들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꽃을 파는 이들이 이 꽃을 사서 소원을 말하며 분화구로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띠다우사! 미소 지으며 내려와 보로모 2차 방문을 마쳤습니다.


땅꾸반쁘라후(Tangkuban Perahu)화산과 찌아뜨르(Ciater) 온천

수방(Subang) 군청에 근무하면서 자주 찾은 곳이 땅꾸반 쁘라후 화산과 찌아뜨르 온천이었습니다. 군청에서 버스 한 번 타고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길가에 반둥 가는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가 승객이다 싶은 사람이 다가 가면 ‘부릉’ 하고 곧 출발할 듯이 바퀴를 움직이지요. 금방 출발한다고 하여 올라타고 있으면 승객들이 어느 정도 차야만 출발합니다. ‘엘르프’ 하기에 첨엔 무언지 잘 몰랐는데, 버스 옆에 붙은 버스이름 elf를 말하는 것이더군요. 요즘엔 Golf도 ‘골러프’라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현지화하였지요.  Subang부터 화산의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화산 입구는 30여 킬로미터를 가야 합니다.  Jalancagak이란 동네부터 공기가 시원해지면서 차 밭과 솔 사과(pineapple) 파는 가게들이 줄을 서있습니다. Sunbang의 명물은 바로 이 당도 높은 솔 사과입니다. 과즙이 풍부하고 달아서 ‘이 맛이야!’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이것을 까달라고 하여 화산을 오를 때나 온천으로 가지고 들어갑니다.  화산은 생모를 사랑한 아들의 비련(悲戀)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분화구 정상까지 차량으로 갈 수 있어서 다리가 불편한 분들도 쉽게 가실 수 있습니다.

해발 1830미터라는 구조물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도록 배려를 해주고 있습니다. 큰 분화구(이름이 Kawa Ratu?)를 본 뒤에 Doma 분화구로 내려가면 펄펄 끓어 오르는 용천수가 있습니다. 많은 현지인들이 다가 와서 안내원이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띠다우사! 하고는 잘 닦인 길을 따라 1킬로 미터 정도 내려가면 됩니다. 분화구 입구에 있는 계란을 파는 가게에서 계란을 사면 뜰채 같은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에 계란을 담아줍니다.

이것을 끓는 물에 담가 놓고 10여분 후에 건지면 따끈따끈한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있는 거죠.  도마 분화구에서 도마분화구 주차장까지의 약 2킬로미터의 숲 길이 정이 많이 든 길입니다.

수십 미터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이 길은 누구나 좋아할 거라 믿습니다. 이제 다소 나른한 몸으로 온천장으로 갑니다. 노천온천수영장이기에 비라도 힘차게 오면 그야말로 한의학에서 말하는 최상 최적의 ‘아래는 따뜻하고 위는 서늘한’ 조건이 되는 것이죠. 온천 욕 간간이 먹는 솔 사과의 맛은 더욱 달고 향기롭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이 나라 남쪽 인도양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언덕에 자카르타의 한 사업가와 인천의 한 교회가 공동으로 지었다는 ‘가나안농군학교’가 있습니다. ‘이 나라의 희망은 고위공무원의 정신개조에 있다’는 신념에 따라 지어졌다는 군요. 아주 고급 호텔 급은 아니지만, 누가 묵더라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시설과 풍광이 있습니다. 식당에 써 붙인 ‘4시간 일하고 한 끼를 먹는다’는 글귀가 먹는 이들에게 어떤 압박을 줄지도 모르겠으나 밀알과 같은 한 분의 사상이 이곳에 까지 전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평생을 ‘바로 잘 살기’ 위해 애쓰셨던 존경할 만한 참 농부요, 참 아버지요, 참 스승이 이곳까지 오셨다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오늘이 있게 한 그 ‘긍정의 힘’이 여기까지 뻗쳤다는 사실에 뻐근하였습니다.  농군학교의 정 교장님의 친절한 안내로 인근 개울로 가서 바위바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온천 욕도 할 수 있었고, 박쥐 동굴도 구경하였습니다. 뿔라부한 라뚜(Pulabuhan Ratu)에서 찌솔록(Cisolok)의 가나안 농군학교를 물으면 거의 다 방향을 알려주더군요. 


잠시 앙골라를 거쳐 다시 인니로

수마트라 람뿡(Lampumg)의 쓰깜뿡(Sekampung)이란 곳에 있는 ‘핵산공장’ 현장에서 잠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시골 호텔에서 마시는 ‘별표음료’와 ‘가도가도’의 맛은 지금도 그립습니다. 람뿡은 항구도시이며 수마트라의 관문도시라 할 수 있는데,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은 언덕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낏 란두’란 호텔과 레스토랑이 있는데,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은 뒤 밤 경치가 아름다운 노래방을 빌려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몇 년째 람뿡엔 설과 광복절 1년에 두 번 갑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 의료봉사단원들이 약품과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람뿡의 소외지역을 방문하여 무료 진료를 하고 청년들은 어린이들과 함께 놀아줍니다. 양방으로 어쩌지 못하는 환자들이 침을 맞으러 오는데 침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동양의학에 대한 환상을 갖고 옵니다. 두 손을 신에게 바쳤으니 ‘신의 손’이라며 농담을 하지만 침을 하루 종일 놓고 나면 온 몸에 기가 빠진 듯하지요.

그렇지만 그 무서운 침 앞에 온몸을 내 맡길 수 밖에 없는 가여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시 힘을 내곤 합니다.    


두마이에서

람뿡에서 두마이로 발령을 받아, 이 나라 국영 석유회사가 발주한 정유시설공사 현장 관리 일을 했습니다. 리아우州 는 셰브론 등 원유채취로 부유한 주라고 합니다. 오일 팜 농장도 규모가 대단하고 인니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넓고 풍부한 자원의 나라! 세계 5대 경제 대국이 된다고 했는데……


수라바야, 살기 좋은 고장

람뿡에서 만난 사람의 권유로 두마이를 사직하고 수라바야(Surabaya)로 갔습니다. 골프장에 둘러싸인 아파트에서 지냈는데, 아침마다 내려다보이는 골프장의 광경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일이 끝나면 쁘쩰렐레 (pecel lele)먹으러 자주 갔습니다. 튀긴 메기에 매운 양념을 얹어서 별표음료와 함께 먹는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맛있던 것으로는 야자열매를 따먹는다는 게(kepiting)요리였는데, 1킬로그램에100불 정도하는, 값도 비싸고 맛도 수준급인 드문 요리였습니다. 이곳의 교민들도 서로 친하며 돕는 아름다운 곳이란 인상이었습니다만, 다시 보따리를 싸야 했습니다.


빠뿌아 자야뿌라, 쎈따니, 머라우께, 께삐 아직도 어두운 곳

오일팜 농장을 개발하는 회사의 일로 빠뿌아를 갔었습니다. 그곳엔 한국 선교사들 여러 가정이 눌러 살며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히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이 어두울 때, 암담하고 희망이 없을 때, ‘와서 손을 내밀어 밝혀준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했습니다. 그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유엔군 아저씨들(아마 필리핀?)이 먹고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달라’고 하여 한 아저씨를 빙 두르고, 빵(샌드위치)을 한입씩 얻어 먹은 일, 그들이 먹고 간 자리를 뒤적이다가 쨈 깡통을 주워 들고는 손가락 끝으로 후비어 빨아먹으며 그 신기한 맛에 취했던 일, 그러면서도 미군 차들이 지나가면 ‘깁미 껌’하다가 그냥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면 팔뚝 질을 하던 일, 이제 우리가 받았던 그 빚을 되 갚을 수 있게 된 우리의 조국 한국. 아! 자랑스럽고 감사하지 아니하냐! 인니만 해도 한국 전쟁 때 달려와서 도와준 은인의 나라 아닌가! 이들에게 우린 고마워해야 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형님들은 오늘의 한국을 이루는데 필요한 종자 돈을 꾸기 위해’ 위해 남의 나라 광부로 가서 막장에서 석탄을 캤으며, 어머니 누님들은 남의 나라 환자들의 대소변을 닦아주며 ‘밑바닥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떠합니까?
 항공사의 고 임금 자들이 파업을 하여 국제적으로 신용을 잃고, 취항을 금지 당하였으며, 자신의 급료 인상을 위해 투쟁에 성공을 하였으나, 결국엔 아들의 일자리를 해외로 내어 주고야 말았습니다.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인데, 일자리는 우리 국민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기업을 일구는 일에 평생을 바친 나이든 창업주가 근로자들과 국민들과 정부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면 왜 일터를 해외로 ‘이전, 도피’를 하려 할까요?  인니에 와 있는 우리, 이웃나라더러 역사를 잊지 말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좀 더 가까운 과거사를 잊지 말고, 인니 인들을 정중히 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쩨에서 머라우께까지’, ‘백두에서 한라까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인니 동쪽 끝까지 온 셈입니다. 육로가 없어서 께삐(Kepi)로 가기 위해 머라우께에서 20인승 비행기를 탔습니다. 군청소재지인데, 호텔은 단 하나, 뻘 위에 판자와 양회로 지은 2층 집인데, 손님들은 거의 찼습니다. 머라우께로 나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단 들어 오면 나가는 비행기는 이곳 경찰이 자리를 배정 해주는 거죠. 군수는 군청에 거의 없고, 머라우께 아니면 자카르타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농장 부지 건으로 만난 추장 한 사람, 부인이 몇 명이냐,고 물으니 모른답니다. 가는 동네마다 부인을 두어서 자식들도 몇인지를 모르더군요. 남자는 그저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원시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더군요. 높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강제로 한 마을로 이주를 시켰답니다. 이들은 의심이 많고 경계심이 많아서 나무 위에서 홀로 살며 간혹 용감한 것을 과시 하기 위해서 사람을 먹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어느 선교사 얘기로는 한 의료봉사단이 어느 마을에 들어 가서 사람마다 증세에 따라 약을 지어주었는데, 의료봉사단이 돌아간 뒤에 추장이 주민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서, 받은 약들을 한곳에 쏟고서, 이것을 가구별로 ‘공평’하게 나누었답니다. 이 약을 먹고 죽은 사람이 나오는 사고가 생긴 것이지요. 어두운 곳, 빛이 필요한 곳이지요.


빨렘방, 맛난 음식이 많은 곳

오일팜 농장의 관리를 위해 빨렘방으로 갔습니다. 남부수마트라의 주도가 있는 제법 큰 도시입니다. 무씨(Musi)강이 무시 무시하게 사철 벌겋게 흐르는데, 게 요리를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습니다. 자카르타의 친지들이 와서 먹어 보더니 가끔 빨렘방으로 가자고 할 정도로 잊혀지지 않는 맛이었지요. 국수와 만두 등 중국인들이 즐겨 가는 맛 집들이 꽤나 있습니다.  골프장도 시내 한가운데 있어서 골프를 즐기기엔 그만이지요. 이곳에서 과거 일본이 3년 주둔하면서 행한 일이 네덜란드 350년보다 혹독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싱가포르로 가는 직항로도 있는 커피와 팜 오일의 부자 동네입니다.


무나 섬, 부똔 섬의 이웃

빨렘방에서 옥수수 농장 개발을 위해 중부술라웨시의 무나(Muna) 섬으로 갔습니다. 전임자가 2개월 동안 셋집도 못 얻었을 만큼 팍팍하고 만만찮은 섬이더군요. 자띠(티크)나무로 유명했다는데, 많은 남벌로 도로변에만 자띠가 있더군요. 시내만 벗어나면 바로 숲인데, 이 섬 사람들의 주식이 옥수수이니 옥수수 농장을 하자는 회사의 정책이었지요. 농민들에게 옥수수를 심도록 농자금을 융자하여 주고, 수확한 뒤에 옥수수를 매수하여 주는 아주 괜찮은 꾀였는데, 주민들은 수확한 옥수수를 다른데다가 몰래 팔더군요.

항구가 하나이니 항구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섬 전체가 항구였습니다. 어디서든 배를 띄우고 마까싸르 로 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빌려준 농자금을 회수하기는 글렀고,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생선구이 집이 대부분이고, 밤이면 해변가에 서는 커피 집들의 달고 구수한 커피 맛이 일품이지요. 바로 앞에 부똔(Buton) 섬이 보이는데, 통통배로 한 시간 이상 걸리더군요. 이곳의 찌아찌아(ciacia) 족이 한글을 저들의 언어표기 문자로 선정하였다지요. 탁월한 선택이라고 박수하고 싶습니다. 한글만세!


뜨갈의 개구리 탕

농장회사를 나와 옥수수 건조기를 팔러 다녔습니다. 중부자바의 뜨갈(Tegal)이란 곳에서 기계를 팔면서, 진 씨라는 중국인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의 팔순 노모가 공산화하기 이전에 중국에서 건너와서 행상을 하였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답니다. 아들 진 씨가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정미공장에 매일 출근하여 겨를 팔고, 나락을 줍고 하시더군요. 진 씨와 잘 가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개구리 탕을 아주 맛나게 합니다. 값도 괜찮고 별표음료와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제 인도네시아 첨벙大記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지요, ‘인생은 떠나는 연습이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자’. 또 어느 분은 ‘살아도 살아도 낯선 이세상’이라 하였는데, 정말로 ‘살아도 살아도 서툴기 만한 이승의 삶’인듯합니다. 관계를 맺는데도 서투르고, 관계를 정리하는데도 서투르고, 서툰 것뿐입니다. 제 인생 시계는 이젠 떠날 때(퇴근)를 준비해야 할 오후 3시경입니다. 지금까지 첨벙대며 지나온 길을 더듬으며 첨벙댈 때 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쓴 분도 있고, 첨벙대는 소리에 잠이 깬 분도 있습니다. 미안하며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떠나온 것이 사뭇 미안합니다. 그리고 배고파 할 때 찬 물에 밥을 말아 주신 분도 있고, 잠자리를 주신 분도 있습니다. 미당(未堂)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지만 저를 키운 건 8할이 그분들의 은혜였습니다. ‘여보게 저승으로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 글쎄요. 천상병 님처럼 “세상소풍 잘 다녀 왔습니다”하는 인사말이나 준비해야겠네요. 있는 곳을 긍정하고, 만나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한국인이 늘고 늘어 동방을 밝히는 등불을 넘어서 세계를 밝히는 힘있는 민족으로 존경을 받는 날이 곧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상 소감>
                                                                       
오랜 가뭄으로 잔디가 까칠한데, 달은 맑고 기운 있어 보였습니다.

마침 저의 집에 묵어 가려고 온 친구와 함께 오곡밥과 청국장으로 배를 불리 우고, 담 밑에서 딴 빠빠야를 씨까지 죄다 먹고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너른 주택단지를 돌고 왔습니다. 아내가 ‘서울은 달을 볼 수 없다’고 하여 ‘당신은 송편을 먹고, 나는 여기서 달을 중계하지’ 하며 통화를 마쳤는데, “축하합니다! 장려상입니다”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간 재미있게 읽었던 유익한 글을 써 주신 교민 분들에게 ‘글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저 인도네시아를 ‘자유로이’ 첨벙대며 행복하게 돌아다녔던 얘기를 길게 늘어 놓았을 뿐인데, 상을 주신다니 고맙고 기쁩니다. 옆에서 듣던 친구도 박수하며 축하를 해주네요.
계속해서 ‘한*인니 문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써보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글로만 뵈었던 분들을 직접 뵐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소식도 반갑습니다.

‘한*인니 문화 연구원’을 통해 두 나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져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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