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시편
천양희
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 노을을 봅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 그러면…… 생각은
새떼처럼 떠오르고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어 마른풀 몇개 분질렀습니다
피가 곧 정신이니…… 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
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
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 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 드나들었습니다
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
붉게 물듭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시 읽기 ----------------------------------------
시라고 다 시이고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겠습니까?
피로 써야 시이고
피로 그려야 사랑이지요.
그래야 붉어진 이유를 알지요.
썩지 않은 하늘이 있어서
노을 뒤편으로 가는 길에
그대를 풀어주고
시를 풀어주었습니다.
내 손을 노을에 씻으니 노을이 더욱 붉습니다.
이성수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에서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이 있다.
김태호 사진작가는
인도네시아 생활을 시작한 2002년 경부터 현재까지, 혼자 사진기를 들고 인도네시아 전 지역과 주변 국가들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2015년에 2인 사진전 " Through Foreign Eyesㅡ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인상"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