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시경詩鏡 - 시의 거울에 비추어보다
멋모르고 먹다가 신나게 먹다가 주춤거리며 먹다가 어쩔 수 없이 먹는 나이, 2018년 올해도 어김없이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두고 왜 먹는다고 하는 걸까요? 우리나라의 나이는 떡국을 먹는 설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몇 살’이 아니라 ‘몇 설’이라고 했다고 하니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일 년에 두 번씩 새해인사를 하면서도 나이는 한 번만 먹으니까 손해가 참 많습니다. 아니 그 반대인가요?
1월은 나이 먹는 달, 당신은 어떤 생각 어떤 다짐을 하셨는지요. 저는 잘 익자, 맛있게 익어보자, 생각했습니다. 더 넉넉해지고 더 다정해지자고 다짐했습니다.
나이 선禪
/ 박정자
1.
새 달력을 연다 새벽 새소리가 다르다 아침해가 다르다 안에서 솟는 간절함이 다르다 새 달력을 걸고 1월을 열었을 뿐인데 새해 아침에 당도한 첫 신문을 들어올리는 그대 옆모습이 다르다 내 눈길이 다르다
2.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선지자의 훈계는 뒤척이며 흐르는 강물도 강물이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 몸의 재생과 사멸을 기억하라는 당부였으리라 흐르는 것과 사라지는 것과 태어나는 것과 늙어가는 것들은 돌이킬 수 없기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을 기록하는 나이는 그래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새해 아침엔 더욱 큰 걸음을 떼는
3.
세상은 자꾸 나이를 벗어놓고 살자고 한다 그러나 걷고 있는 중의 시간의 발자국 나이는 거스를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벗어서 접어놓을 수 없다 지금 여기 나의 존재는 확고한 믿음이면서 동시에 착각이라고 익숙함에서 비롯된 착각인 거라고 나이는 언제나 그 믿음 그 착각을 상기시켜준다 나이는 현재진형형이다
4.
모든 것이 달라보이는 이 아침 그 중에서 나이는 가장 낯선 풍경이다 화들짝 놀라는 풍경이다 지나온 날들과 다가오는 시간을 가지런히 펼쳐놓고 연하장을 쓴다 60년을 곰삭혀 몸통에 담고 다니는 짙푸른 잉크로 쓴다 시의 첫 행을 쓰듯 두근거리며 쓴다
5.
잘 숙성된 포도주의 새콤달콤한 향기처럼 이 한 해 더 깊고 넉넉해질 나이들에게 기쁜 인사를 전하는, 새해 아침!
박정자
1991년 시인 등단하여 <그는 물가에 있다> 등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사람과 사물의 내면에 귀기울이는 시창작으로 경기문학상과 서울신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