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鏡 - 시의 거울에 마음을 비추어보다 <박정자>
세상의 모든 발들은 저녁에 당도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어쩌다 발이 아픈 날 집 밖을 나갈 수 없을 때 알았습니다. 아픈 발은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것을. 아무리 피곤하고 발바닥이 부르터도, 발은 걸을 때 비로소 발이라는 것을.
오늘도 하룻길을 무사히 걸어서 저녁에 당도할 세상의 모든 발들이 편안한 밤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발이 몹시 지쳤을 때 알았습니다. 발이 지치면 마음도 지친다는 것을. 가벼운 발걸음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발
/ 권기만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 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박정자
1991년 시인 등단하여 <그는 물가에 있다> 등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사람과 사물의 내면에 귀기울이는 시창작으로 경기문학상과 서울신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