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채인숙] 와양, 그림자로 읽는 신화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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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와양, 그림자로 읽는 신화1편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문화예술 기행
기사입력 2018.05.0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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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타힐라광장.jpg▲ 파타힐라 광장은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 도시의 중심이었다. [사진: 채인숙]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시. 채인숙

1
화란의 여자들이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채 하얀 자전거를 타고 파타힐라 광장을 빠져나간다 항구 바깥에는 별의 방향을 따라 바다를 항해하는 목선들이 긴 열을 이루며 잠에 들었다

2
어둠의 극장에는 일찍 늙어버린 배우들이 모여 도망자들을 위한 연극을 만든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북동의 식민지에서 왔다던 청년의 이야기를 한다 어린 아내를 두고 온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느라 밤새 울었다고 그러다 잠자리를 밀고 당한 것이라고 수용소를 탈출한 그를 찾아 병사들이 그림자 극을 공연하던 와양 극장을 덮쳤다고 그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청년은 화란인의 빨래를 다려주는 여인의 사랑을 거절했다고

3  
광장 모퉁이에서 사산도를 연주하던 노인은 중세의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진 천막으로 들어 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옛 애인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겼다 손목에 새겨진 검은 먹선의 그녀와 이별 수를 점쳐 준 점술사를 위하여 너는 국수를 삶았다 발목에 쇠뭉치를 매단 채 키보다 낮은 천장 아래서 서럽게 입을 맞추던 노인의 사랑은 한때 와양 극장의 아름다운 대본이었으나 무수히 실패한 사랑의 대사들만 젖은 면발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4
사랑을 잃은 날마다 밤은 더 깊어지고 자정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바타비아의 밤은 느리게 걸어왔다가 황급히 광장을 덮쳤다 그림자 극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면 배우들은 식은 국수를 먹으러 천막으로 들었고 너는 밤새 다림질할 빨래 바구니를 받으러 광장을 나섰다 누구도 사라진 그이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습기의 무게를 견디느라 밤이 저지르는 어떤 더러운 사랑에도 눈을 감았다 

당신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는, 밤은 쓸쓸하다

*바타비아: 자카르타의 옛 이름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 등단작)

1 와양 공연2.jpg▲ 한인니문화연구원 50회 열린 강좌 와양공연 장면.  [사진: 채인숙]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지 25년이 지나서, 그러니까 혼자서 시를 쓰고, 시를 포기하고, 시를 외면하고, 시를 경외하는 긴 시간을 보낸 후에,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등단을 했다. 인도네시아로 온 지 17년째 되던 해였다. 나의 등단작은 자카르타의 파타힐라 광장과 와양박물관이 배경이 되었다. 10여 년도 더 전에 와양 그림자극을 처음 보았고, 이후에 ‘오랑꼬레아의 아리랑’이라는 TV 다큐멘터리의 원고를 쓰면서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를 촬영했던 경험이 버무러진 결과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징용으로 끌려 왔다가 수용소를 탈출한 어떤 조선인이 와양 극장에서 그림자극을 숨어서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리는 소설적 상상으로 출발해서, 그것을 이미지화시키고 시로 완성했다. 심사위원들은 내 시의 의도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읽어 주었고, 예술의 보편성은 시대나 지역을 초월하는 공감에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시는 식민지의 기억과 낭만적 사랑의 기억을 이국적 풍경과 섞어내어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정조를 조탁하는데 성공하였다. 식민 지배에 의해 파국을 맞은 어떤 사랑의 이야기가 그 사랑이 끝난 극장에서 그림자극으로 다시 상연되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절묘한 확장에서 투고자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문에 가까운 문장이면서도 시적 리듬을 잃지 않고, 진술을 주되게 사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하는 솜씨는 기성에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 이국의 풍경이 그저 흔한 이국 취향에 그치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지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이후의 시에 대한 기대를 갖도록 하였다. – 심사평 중에서>

나에게 와양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지, 나만의 와양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려다 보니 시작부터 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은 꼴이 되었다. 아무려나, 와양은 시적이고 드라마틱한 대사법과 아름다운 가믈란 연주, 달랑의 극적인 목소리 연기, 노래, 와양 자체의 다양한 캐릭터가 어우러진 예술이고,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문화 예술 장르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강렬한 환상과 시적인 영감을 준 예술이다. 

1 와양 토토.jpg▲ 와양을 모티프로 그림을 그리는 인니 화가 토토(TOTO)의 작품 [사진: 채인숙]
 

물론 와양이 비단 나의 시에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인도네시아 화가 토토(TOTO)는 와양을 모티브로 다양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그려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해 끄망의 두타 파인아트 갤러리(Duta Fine Art Gallery)에서 열린 토토의 개인전은 갤러리 전체가 와양을 소재로 유쾌한 서민의 일상을 그린 재미있는 그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그림을 본 소감을 전하면서, 온갖 우리의 자잘한 일상 안에 다양한 와양의 캐릭터를 대입시킨 건 정말 빛나는 착상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라인언킹.png▲ 뮤지컬 라이언 킹의 한 장면 [구글이미지]
 

또한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디즈니 뮤지컬 ‘라이온 킹’ (The Lion King) 안에도 인도네시아 와양극의 기술이 녹아 있다. 실제로 라이언 킹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줄리 테이머(Julie Taymor)는 5년간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와양 또뼁(Wayang Topeng), 와양 꿀릿(Wayang Kulit) 그리고 와양 골렉(Wayang Golek) 에 대하여 공부했고, 이 의상과 가면을 뮤지컬 캐릭터에 적용하여 다른 뮤지컬과 차별화시키면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2016.2.22 데일리 인도네시아 기사 참조) 

1 와양 골렉.jpg▲ 와양 골렉 [사진: 채인숙]
 
1 와양1.jpg▲ 족자 공항 벽면의 와양 장식 [사진: 채인숙]
 

물론 중국에도 영희(影戱)라는 그림자 인형극이 있고, 동남아시아 전역에 그림자 극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자바처럼 종교적인 의미와 신비한 상징을 가진 그림자 극을 찾기는 드물다. 알다시피 ‘와양’은 자바어로 ‘그림자’라는 뜻이다. 왕의 생일이나 마을의 중요한 기념일 등에 와양극을 공연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진행되는 극이니, 그 스토리와 음악이 얼마나 장대할 것이며, 와양의 캐리터 또한 다양할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제대로 된 와양극을 볼 기회가 극히 드물고, 그저 박물관에서나 축소된 와양 공연을 보면서 그 맛을 음미할 뿐이지만, 사실 내용을 다 알고 보더라도 해 질 무렵부터 다음날 해 뜰 시간까지 이어지는 이 장대한 신화의 서사를 다 이해하며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와양의 구성과 다양한 스토리, 그리고 역사를 크게 짚어보는 것만으로 이 글을 쓰는 의미를 찾으려 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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