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은숙]‘쌈닭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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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쌈닭의 근황’

깡통의 수다 22
기사입력 2018.05.0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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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족자에서 사는 김은숙 작가가 <깡통의 수다>를 데일리인도네시아에 연재합니다. 문득 자신의 삶이 깡통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깡통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 지 스스로 궁금해졌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족자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을 내조하고 사남매를 키우면서 사나따다르마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수필집 두 권을 낸 열혈주부 작가입니다. 현재 사나따다르마대학교 인도네시아문학과에 재학 중이며, 족자 한글학교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닭싸움.jpg▲ 닭싸움 [사진: 픽사베이]
 
참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가족에겐 너무 힘든 시기를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세 자식들 먹여 살리고자 피눈물을 흘리며 타향에서 일하셔야 했고 외할머니 집에 남겨진 삼남매의 생활은 몹시 힘들었다. 소녀가장 아닌 소녀 가장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싸움닭이었다. 누구든 나의 동생을 건드리면 항시 앞장서 성질을 부려 동네 사람에게 구설수에 시달렸고 매도 내가 먼저 맞았다. 심지어 외손자라 우리를 싫어하시던 할머니에게 까지 대들던 그야말로 깡으로 철저히 무장한 언니이었고 누나이었다. 그래 받자 한 살 위의 언니였고 그래 받자 3살 위의  누나였는데 뭐 그리 바람막이가 되었겠는가 싶다.

그럼에도 세월은 흘렀고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 어머니는 막내를 대학 보낸다고 먼저 인도네시아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고 있는 두 딸 중에 하나마저 인도네시아로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 사업에 경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내가 인도네시아로 오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문제는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이웃이었다. 우리 집 옆길로 들어가는 뒷집 가족이 변수였다. 동네에서 ‘미치갱이’ 가족으로 통했다.

미쳤다는 증거를 어떻게 밝힐 수는 없다. 지금은 없는 사람들이니까! 다만 그 집 덕분에 엄청난 일을 많이 겪은 우리 가족은 항상 그 가족이 뭔 짓을 할까 염려했던 것은 사실이다. 뻑 하면 구청에 신고해 우리 앞집과 뒷집인 우리 집이 집을 짓다가 허물어졌다. 그것도 하라고 하고 거의 다 만들어질 때쯤에 신고하면 대박 열 받는다.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보고 허물어진 벽돌을 하나들어 뒷집 대문에 던졌던 기억이 난다. 물내려가는 하수구를 막아 물이 집으로 역류하자 할머니가 삼촌을 얼러서 고치던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던 중에 할머니가 하수구를 고치다 허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톡톡히 진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려움을 조장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날은 쌀 한 포대를 쓰레기 놓는 곳에 가져다 놓는다. 누군가 자기네 쌀에 독을 썩었다고 했다. 또 어느 날은 장독을 내다 놓는다. 장이 꽤 들어 있었다. 그리고 너무 싱싱하고 멀쩡한  야채 단들도 부지기수로 내다 두었다. 없는 우리 집의 형편에 나는 주워다 먹고 싶었지만 뭔 사단이 날까 싶어 그러지는 못했다. 어느 날 전기공사 하시는 아저씨가 그 집에 들려 우리 집에 와서 전기를 깔며 하소연 하셨다.
“아가씨 뒷집 가족 잘 알아요?”
“저희 외가댁 하고 먼 친척벌이래요.”  
“뒷집도 이상하고 뒷집 아줌마도 이상해요. 너무 무서워서 전기 못 깔고 나왔어요.”
“왜요?”
“누가 자니네 가족을 죽이려고 물에다 약을 풀었다고 하는데 무서워서요.”
“우리는 자주 겪어서 그러려니 해요.”

그런 이웃이 있는 곳에 여동생과 할머니를 두고 인도네시아로 오려하니 도대체 될 일이 아니었다. 며칠을 옥상에서 뒷집을 바라보며 고민을 했다. 그렇게 몇 날을 고민하다가 비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뇨로 겁을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실행에 옮기려던 날 아침 고무장갑을 끼고 고두다라에 바가지를 들고 야무지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20년 훨씬 전이라 동네 거반이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에구구! 우리 할머니가 내가 사고 치려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화장실을 그야말로 똥차 불러서 깨끗하게 치워 놓으셨다. 그렇다고 포기할 김은숙이 아니었다. 내 동생 대모 할머님 댁에 가서 분뇨 한 다라만 주세요? 했더니 뭐에 쓰려는지 모르지만 기꺼이 가져가라 하셨다. 우리 집에서 백 미터 떨어진 대모 할머님 집이었는데 분뇨를 한 다라 얻어 나 잘났다고 들고 와서 뒷집 앞에 섰다.

겁만 주려했고 우리가족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무언의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문에 분뇨를 선물했다. 때마침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려고 했는지 아줌마가 나오다가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내 행동의 결과는 처참했다. ‘미친갱이’ 가족 중 뒷집 딸이 신고를 해서 나는 경찰에 잡혀갔고, 조서를 꾸몄고, 구금되었다. 그야말로 내일 모래면 인도네시아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내심 걱정이 되어 뒷집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내일 모래면 비행기 타야 하는데 그만 취하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안 해 주었다. 나는 저녁 늦게 풀려났다. 

미치갱이 가족은 우리 땅을 밟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니면 논둑으로 한참 돌아가야만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자전거로 길을 막고 뒷집 아저씨 출근길에 버티고 섰다. 뒷집 아저씨는 나를 밀었고 나는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고 진단서를 끊어 경찰에 고소했다. 뒷집 아저씨는 구금되었다. 딸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고소를 그만 취하해 달라고, 아버지가 지병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그대는 내가 취하 해달라고 할 때 해 주었는가? 마음에서 들리는 이 말도 삼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인도네시아로 들어왔다. 뒷집 아저씨도 바로 풀려났을 것이다. 고소 자가 비행기 타고 사라졌는데 경찰이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미친 사람과 싸우면 딱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을 한국을 드나들며 사글어진 뒷집과 사글어진 뒷집 가족들을 볼 때마다 세상의 그 어떤 등등한 기세도 결국 늙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 몇 년 후 뒷집 부부는 돌아가셨고 집은 폐허가 되었다. 

한 날 동생 집에서 나오는데 검은 물체가 뒷집으로 지나갔다. 퇴근한 동생에게 물었다.
“뒷집에 뭐가 있어?”
“언니 너구리가 살아 너구리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는데 우리 애들 큰일이야! 이사를 가던지 정말 무슨 수를 내야지.” 
아이고! 내 팔자야!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야말로 구관이 사람이니 동물인 너구리보다는 백배 명관일 태지만 이 노릇을 어쩌나 싶었다. 쌈닭인 내가 동생 가족을 위해 무장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지금도 한해를 거듭하며 걱정만 하고 있다.

남편과 결혼을 하며 쌈닭 기질을 죽였다. 워낙 분쟁을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말없이 내 할 일만 하고 살아왔다. 내가 남편과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은 시댁에 가서 큰 소리 한번 안하고 20년을 오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아버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며 ‘그나마 저 때문에 큰소리를 안내시게 해드렸으니 아버님 괜찮으시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요.’ 하며 먼 산을 보며 남몰래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아버님 제가 더 많이 참을 터이니 아니 평생 불만 없이 살을 터이니 북망산천길 뒤로 하시고 다시 오실 수는 있으신지요?’ 하고 하늘에 대고 묻고 싶었다.

시댁에 가서 서러운 일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도 참았다. 시어른이 참은 세월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족자에 와서도 쓸데없이 나를 미워하는 어른이 있어 이 성질에 머리 털 다 뽑아 놓고 응징하겠다고 남편에게 허락을 요구했었다. 답은 짐 싸서 한국 가라고 했다. 우리 남편은 나를 분쟁에서 철저히 지켜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쌈닭은 근신하며 살고 있다. 쌈닭의 기질이 언제 도질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영원히 근신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싸움에서 참는 사람이 싸울지 몰라서 참겠는가? 너무나 간절히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 힘들게 참는 게 아니겠는가? 나도 지금 너무나 간절히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참고 살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사실 요즘같이 배부르고 등 따신데 왜 그렇게들 싸우며 사는지 모르겠다. 그저 내 삶을 살면 될 것 같은데 다들 내가 생각하는 만큼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사는 건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걱정이 된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내가 개미처럼 열심히 살다 가면 내가 없더라도 개미성은 지어져 내 아이들이 잘 살아갈 터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내 이념, 내 종교관, 내 색깔을 남에게 물들이려 하지 말고 내 삶을 충실히 살다보면 아버님이 나를 예뻐 하셨듯이 남편이 나를 예뻐해 주고, 세상이 나를 예뻐해 주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나는 앞으로 영원히 싸우지 않고 살고 싶다.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지인들이 오늘을 일상처럼 살 수만 있다면 싸울 일이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참으며 살아 질 것도 같다. 가끔 학교에서 보는 마더 테레사의 문구를 옮겨본다.

In this life we cannot do GREAT THING. 
We can only do small thing with GREAT LOVE.
-Mother Ter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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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짧은 식견의 해석은 이렇다. ‘내가 세상을 바꿀 정도로 큰일을 할 수는 없지만 나의 작은 일로 사랑을 전할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며 이 글을 마친다. 싸움은 정말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로 포장된 위험한 변명일 수도 있다. 요즘에 내가 분노하면 나는 ‘너구리’를 떠올린다. 동생네 뒷집의 너구리를 어쩌지 못한 숙제가 내 가슴에서 살아가며 나를 자제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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