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시경]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 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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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 이향아

기사입력 2018.05.1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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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鏡 - 시의 거울에 마음을 비추어보다 <박정자> 

‘적당히’라는 말에는 대개 판단을 유보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기회주의적인 어감이 있죠.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처럼 균형 잡힌 말도 없는 듯합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그렇게요.

살다보면 ‘예’ 하기도 딱하고 ‘아니오’ 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흑과 백으로만 나눌 수 없듯이, 무 자르듯 갈라놓을 수 없는 상황 말이지요. 당신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했다는 황희 정승처럼, 이향아 시인의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그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해 가슴에 안고 잠드는 시인의 유보가 참 인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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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 이향아

여러 가지가 함께 좋을 때
그러나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할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꼭 하나만 골라야 하므로 무수한 것을 외면해야 할 때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므로 어중간한 자리에서 길을 잃을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하나의 길을 걸어서 인생을 시작하는 일
한 사람과 눈을 맞춰 살아가는 일
그리하여 세상이 허망하게 달라지는 일
눈 감고 벼랑에 서는 일 두려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여럿 가운데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여야 하는 때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길고 낯선 이름
더듬거리는 나를 웃으려는가
잘라낼 수 없는
몰아낼 수 없는
돌아서 등질 수 없는 아픔을
지조 없다 하려는가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나 끝끝내 너 하나를 버리지 않아
이제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다


박정자 
1991년 시인 등단하여 <그는 물가에 있다> 등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사람과 사물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시창작으로 경기문학상과 서울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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