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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물따뚤리 박물관(2/4)/사공 경

인문창작클럽 연재
기사입력 2019.01.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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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atuli.JPG
 

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사공 경

물따뚤리박물관은 7개의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각 테마에 맞는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4세기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지역에 진출한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의 식민 세력에 대항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 그리고 1949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설립까지 인도네시아 반식민지 투쟁 운동을 르박과 반뜬을 중심으로 시대별로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1전시관에 들어가면 모자이크로 처리된 물따뚤리가 소리친다. “인간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이 얼마나 큰 울림인가. 그리고 물따뚤리 박물관과 사이자 아딘다(Saidjah Adinda) 도서관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2전시관은 인도네시아 식민역사의 시작에 관한 전시관으로 전시된 선박을 보면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 신항로를 개척하는 유럽인들의 대항해 시대(15세기 후반에 시작)를 알 수 있다. 그 결과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다. 선박을 보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함께 대항해 시대로 인해 서서히 유럽인들의 식민지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가 항해했던 선박 Prins Willem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선박의 길이는 181 피트, 폭은 14.32 미터이며 선적량은 1200톤이 된다. 1651년 인도로 첫 항해를 했고, 많은 선적량 뿐만 아니라 40개의 무기로 무장되었다. 1652년부터 1654년까지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을 할 때 참전했었다. 1661년 인도네시아로 출항을 했는데, 인도양에서 태풍을 만나 난파되었다. 

또 사진으로 전시된 1608년 건조된 선박 Halve Maan는 당시 미국의 New Amsterdam(현 New York)을 발견할 때 사용했다. 모형으로 전시된 선박 De Batavia는 1628년 암스테르담에서 만들었다. 24개의 주철 대포와 많은 청동 총으로 무장하였다. 바타비아로 첫 항해를 하면서 난파되었고 생존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계속되는 반란과 학살로 유명해졌다. 

3전시관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지 역사에 관한 것이다. 전시된 향료를 보면 향료와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대와의 연관을 알 수 있다. 『막스 하벨라르』와 관련 깊은 커피에 대해서도 전시되어 있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는 페르시아만과 홍해의 커피 무역에 관여하다가 18세기 초부터 인도네시아에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707년 당시 식민 총독은 바타비아에서 찌르본(Cirebon)까지 북부 자바 전 지역에 커피 재배를 독려했으나 저지대인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서부 자바 고 지대가 커피의 주 생산지가 되었다. 동인도 회사와 지방정부 수장들과의 협력관계(검은 거래)를 바탕으로 한 값싼 노동력으로 1726년대에는 전 세계 커피 소비량의 절반이 VOC에서 나왔고, 그 중, 많은 양이 서부 자바 커피였다. 까만 커피 색깔처럼 인도네시아 인들에게는 앞이 안 보이던 시절이었다. 

말 발걸이도 전시되어 있었다. 말은 강제재배 시기 때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16세기 이전, 유럽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기 전, 이미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의 야생 후추는 국제 시장에서 판매되었다고 『인도네시아 향료 무역의 역사』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경작한 곳이 바로 반뜬 지역이다. 특히 수마트라 지역 후추는 경작지의 이름이 상표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즉, 아쩨(Aceh), 끄린찌(Kerinci), 잠비(Jambi) 후추가 그것이다. 1772년, 후추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전체 이익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향(Cengkeh)은 말루꾸(Maluku)가 원산지인 향료이다. 말루꾸 중에서도 떼르나떼(Ternate), 띠도레(Tidore), 모띠(Moti), 그리고 마끼안(Makian) 산이 유명하다. 정향은 유럽인이 오기 전에 아랍, 중국 상인에 의해 이미 유럽에 알려졌다. 그리스의 트리예(Trye)와 이태리의 베네치아가 유명한 향료 항구가 되었다.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원산지에서 정향을 수집하기 위해 도착하기 시작했다. 

계피는 나무껍질로부터 얻는 향료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은 모든 향료의 생산지인 인도로 향해하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고 했다. 그러나 1656년부터 계피가 포함된 향료 무역은 네덜란드 사람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1770년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1825년부터 스리랑카에서 자바 섬으로 계피의 경작지가 확대되었다. 참고로 1796년 계피 무역의 독점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 갔다.

말루꾸의 육두구(Pala)는 중국 상인에 의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인도 상인에 의해 서 아시아, 베이루트, 레바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 상인들은 지중해에서부터 유럽 대륙까지 향료 무역을 독점했고, 그 중심은 이태리의 베네치아와 제노아였다. 

천문·기상학이 뛰어난 아랍 상인들 덕분에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상인들은 말루꾸에 도착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최초로 말루꾸를 장악했고, 그 다음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장악하게 되었다. 『반다 섬: 식민주의와 빨라제도의 여파』라는 책에서 Willard A. Hanna는 VOC는 말루꾸의 론또이르(Lonthoir), 아이(Ai), 룬(Run) 지역에 있는 어마어마한 육두구를 다른 유럽인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일부러 불태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1756년 동인도 회사의 육두구 판매액은 1백 8십만 굴덴 (gulden)을 기록했다. 

Max Havelaar.JPG
 

4전시관은 『막스 하벨라르』와 물따뚤리에 관한 전시관이다. 『막스 하벨라르』는 1860년 출간 즉시, 네덜란드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1875년 수정본이 출간되었다. 르박 지방정부는 물따뚤리 박물관의 원조 격인 암스테르담에 있는 물따뚤리 박물관에서 기증품을 받았다고 한다. 

기증품 중에 1876년에 프랑스어로 출간한 『막스 하벨라르』는 1장~12장, 13장~20장 이렇게 두 권으로 되어 있었다. AJ. Niewenhuis와 Henri Cristafulli가 번역하였고, 1876년 파리에 있는 출판인 J. v.d. Hoeven과 E. Dentu가 로테르담에서 출간하였다. 책 표지에는 네덜란드 군대가 쑥대밭으로 만든 한 마을에서 이미 강간 당해 죽은 아딘다를 보고 슬픔과 분노로 절규하는 사이자의 불타는 음성이 들린다. 사이자의 얼굴 표정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가 드리워져 있다. 깨어지는 하늘 사이로 고향 바두르가 보인다.

실제로는 람뿡이지만 책표지의 배경은 그들의 꿈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고향 바두르이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누렇게 바래고 책장은 낡아 있었다. 이 책처럼 지상에서의 그들의 사랑은 누렇게 바래고 슬프다 못해 아프고 낡은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저 세상, 바두르 농촌 마을 끝에 가면 풀밭 속에 아딘다의 싱싱한 미소가 햇빛과 햇빛 사이로는 아딘다의 풋풋한 목소리가 남아있겠지.

Multatuli Works.JPG
 

전시된 다섯 질로 된 물따뚤리의 초록색 저서에는 『연애편지(Minnebrieven)』 『사상(Ideen)』그리고 그의 칼럼이 수록되어 있다.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Elsevier가 발간한 것이다. 

Tile from Rumah Multatuli.jpg▲ 물따뚤리 집 마루 타일
 
다른 기증품으로는 물따뚤리가 거주했었던 집의 마루 도기 타일이 있는데 육각형으로 회색이었다. 이 도기 타일과 함께 검은 색 도기 타일이 암스테르담 물따뚤리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987년 네덜란드의 사진작가 겸 기자인 Arjan Onderdenwijngard가 물따뚤리의 발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랑가스비뚱에 왔었다. 그는 두 종류의 마루 도기 타일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네덜란드로 가져갔고, 2016년 네덜란드에 있는 물따뚤리를 사랑하는 모임(Multatuli Genootschap)에서 26대 르박 군수인 자야바야(Iti Octavia Jayabaya)에게 전달했다. (연임 현 27대 군수) 

Multatuli Litograph.JPG▲ 물따뚤리 초상화
 

물따뚤리 석판화도 있었다. 1864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낮 시간에는 시골 여러 곳을 다니고 농민들과 어울렸으며 밤늦도록 각 보고서를 읽는 물따뚤리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견고해 보이는 자화상을 보면 그의 외침이 생각난다. <자바 사람들은 진정한 농부들이다. 나는 인도네시아를 사랑했다. 내 모든 능력을 다해서 / 결함이 있는데도 그것을 고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들은 진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한나라를 훔치는 것은 풍차를 하나 훔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쉽다.> 

또한 물따는 네덜란드 왕에게 격정과 분노로 외친다. ‘당신의 왕국은 여기 Hindia Timur에 있는 3천만 명의 사람들이 당신 왕국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착취당하기를 원합니까?’라고.

물따뚤리에 영감을 받은 인물들의 삽화도 전시되어 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oekarno), 인도네시아의 최초 여성 운동가 까르띠니(Raden Ajeng Kartini), 소설가 프람(Pramoedya), 초대 외무부 장관 아흐맛 수발조(Ahmad Subarjo), 필리핀 독립 운동가 호세 리잘(Jose Rizal)이다. 이 다섯 사람이 『막스 하벨라르』를 인용한 작품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역사에 있어 물따뚤리는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문학가 모임인 뿌장가 바루(Pujangga Baru, 1933-1949) 등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막스 하벨라르』를 통해 강제 작물재배를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대한 분노와 투쟁, 그리고 파렴치한 전통과 비열한 권력, 또한 봉건제도에 대항하는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Pramoedya Ananta Toer.JPG▲ 사진 왼쪽부터 수까르노, 아흐맛 수발조, 호세 리잘, 쁘라무디아 아난따 뚜르
 

제 2의 물따뚤리로 불리는 프라무디야 아난따 뚜르(Pramoedya Ananta Toer, 1925-2006)(이하 프람)은 작가로서, 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식민통치와 혁명시기와 수하르토의 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저항적 지식인으로 ‘인도네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신질서(Orde Baru) 시기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이 된다. 40여년 동안 감옥에서도, 수용소에서도,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많은 문학 작품으로 독재 불의에 항거한다. 

『인간의 대지』(BUMI MANUSIA)는 프람의 대표작으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태동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정치범 수용소 부루에서 필기도구조차 지닐 수 없었던 프람이 동료 수감자에게 구술해 가며 완성한 작품이다. 봉건제와 식민지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그의 작품에서 역설하고 있다. 그는 동남아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며, 1981년부터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었다. 

투옥, 검열, 억압 등의 비정상적 환경에 처한 프람은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작가의 망명』이라는 책도 쓰게 된다. 물따뚤리처럼 프람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투쟁하고 소통한다. 프람은 말한다. “물따뚤리를 모르는 정치인은 분명 악랄한 정치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도네시아 역사와 인간애를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1995년 필리핀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상과 네덜란드 Wertheim 상을 수상하게 된다. 

호세리잘(1861-1896)은 필리핀의 국부로 작품에서 스페인 식민통치의 잔악상을 폭로한다. 1896년부터 필리핀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나 결국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는 친구인 Ferdinand Blumentritt에게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물따뚤리』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내가 쓴 작품보다 더 위대하다” 고 언급한 바가 있다. 

아흐맛 수발조(1896-1978)는 서부 자바, 까라왕(Karawang) 출신으로 1933년 네덜란드 Leiden 대학교에서 법학석사를 취득하였고, 초대 외무부장관(1945.8.19~11.14)과 수끼만(Sukiman) 내각 시,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1.4.27~1952.4.3) 그는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라는 책에서 “막스 하벨라르는 나의 폐부를 찔렀다. 책을 통해 나는 식민통치자와 그에 동조하는 인도네시아 귀족, 군수들이 얼마나 인도네시아 인민들 불평등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식민정부가 행하는 모든 행태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1901-1970)는 1921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창설하였다. 1930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대항한다는 죄목으로 반둥에서 투옥된다. 반둥 식민 재판소 변론에서  “물따뚤리와 ‘강제경작제도' 간의 파이프는 수많은 자바인들 가슴에 꽂혀졌고, 이 파이프는 원천으로부터 물을 양수하기 위한 모터를 작동하고 있다.”고 물따뚤리의 내용을 인용하여 식민자들이 인도네시아에 행한 악행을 폭로한다.  

네덜란드어를 배운 까르띠니(1879-1904)는 물따뚤리를 읽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다. 실제로, 그녀는 네덜란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1922년 서간집 출간)에 당시 억압되어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고, 인도네시아인의 독립을 박탈한 식민지 통치자들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이처럼 물따뚤리가 추구 한 이상을 계속 구현해 나가려고 했다. 까르띠니는 후일 수하르토 대통령의 신질서(Order Baru)시대 때 강조되었던 단순한 여성권익 해방운동가가 아니라 진정한 반식민지 운동가였다. 그녀는 1904년 9월 17일 첫 아이를 출산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인문창작클럽(INJAK)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이강현)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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