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에세이] 물따뚤리 박물관(3/4)/사공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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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물따뚤리 박물관(3/4)/사공 경

인문창작클럽 연재
기사입력 2019.01.0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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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nt view of Museum Multatuli.JPG
 

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사공 경

5전시관은 반뜬 주 역사관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사진과 삽화가 전시되어 있다. 즉, 반뜬 지역 이슬람 연합회, 지역 인도네시아 국민당, 1926년 반뜬 폭동사건, 일제시대의 폭정에 대한 증언, 바야(Bayah) 지역의 노동자 항쟁, 족쇄, 수갑, 반뜬 지역 지도, 수까르노 반뜬 방문 등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반뜬 지역은 매우 낙후되었고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자바에서 진행되었던 경제 발전의 영향을 반뜬은 전혀 받지 못했다. 1920년까지 반뜬에는 어떤 공장도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카르타와 수마트라로 떠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축을 돌보고 농업에 종사했을 뿐이었다. 

“많은 반뜬 사람들은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에게 항쟁의 깃발을 들었다.”고 막스 하벨라르에 쓰여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운동이 일어난다. 1888년, 반뜬 찔레곤(Cilegon) 지역의 농민 항쟁의 원인은 막중한 세금 부담, 흉년, 끄라까따우(Krakatau) 화산 폭발(1883),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파괴된 반뜬 왕국 복원이었다. 항쟁은 1888년 7월 9일 시작되어 30일 끝났다. 이때 네덜란드인은 17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면, 반뜬 주민은 30명이 사망하고 11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94명은 유배되었다.

여전사 감빠란(Gamparan)은 1829년부터 1830년대까지 30명의 여성 투쟁가와 함께 식민정부에 대항했다. 그들은 식민정부의 강제재배 제도를 반대했고, 반뜬의 자신가(Jasinga), 지깐데(Cikande), 발라라자(Balaraja) 지역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자신가 지역 면장과 나따느가라(Raden Tumenggung Karta Natanegara)가 이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르박 2대 군수가 되었다. 바로 막스하벨라르에 나오는 악질 군수이다.

하지 와끼아(Haji Wakhia)는 세랑 지역의 부유층 출신으로 1854년 5월 3일 식민통치에 대항하다가 결국 그의 추종자 뚜바구스(Tubagus)와 함께 1856년 사형을 당한다.

1908년 결성된 부미 우또모 (Budi Utomo)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 때 지식인들이 최초로 현대적으로 결성한 반 식민 투쟁 단체이다. 단체 결성의 시작은 자바인으로 의사였던 Wahidin Sudirohusodo이다. 그는 자바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1908년 수또모 (Sutomo)에 의해 단체가 구체화되었다. 이 단체에서 중요한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가가 배출되는데 그 중 한명이 찝또 (Dr. Cipto Mangunkusumo)이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중적 민족해방운동단체인 Sarekat Islam (Kongres nasional Sarekat Islam)이 1912년 결성된다. 반뜬의 빤데글랑(Pandeglang)에서 개최된 이슬람 회의에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 쪼고로아미노또(HOS. Tjokroaminoto)가 참석했고, 이 회의가 반뜬 주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반뜬에 SI 지부가 결성되었다. 종교 지도자, 귀족 계급, 일반 서민들이 SI에 가입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도자 중 한 명인 스마운(Semaun)이 반뜬을 다녀 간 후, 1916년까지 세랑(Serang), 라부안(Labuan), 랑까스비뚱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하산(Hassan Djajadiningrat)은 반뜬 SI의 지도자가 되었다. 공산당 다른 지도자들, 알리민(Alimin), 무소(Musso)등이 반뜬을 방문하게 되고, 1923년, 반뜬에 공산당 지부가 설립되게 된다. 

1926년 11월 12일 반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종교지도자, 농부가 식민정부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 항쟁은 자바와 수마트라의 몇 개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약 1만 3천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중 약 1천 300명은 반뜬 지역 출신이었다.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이들을 디굴 (Boven Digoel)로 추방했는데, 파푸아 지역에 있는 그곳은 말라리아 등이 창궐하는 지역으로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수카르노 대통령 시기 때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로 명명하였다. (1961년 대통령 규정 제15호) 그 중에는 민족의 지도자인 하따와 수탄 샤흐리르가 포함되어 있다. 

식민정부 총독은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과도한 권리(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 특권을 이용하여 식민정부를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유배, 감금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독립투쟁가들은 하나, 둘 씩 유배를 당했는데, 이중에는 수까르노, 하타, 샤흐리르(Syahrir), 찝또(Dr. Cipto) 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27년-1943년까지 식민 정부 시절에 약 1천명의 정치범들이 디굴에 억류되었다. 그들의 출신지역은 자바와 서부 수마트라였다. 위 두 지역은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했던 지역이다. 

1926년 반뜬 지역 항쟁, 1927년 실룽깡(Silungkang) 항쟁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대항한 인도네시아인 항쟁 중 가장 대규모였다. 이는 인도네시아 독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설립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첫 번째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의 진주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본군은 1942년 3월 1일, 반뜬 지역, 북부 해안을 통해 진주했다. 1942년 3월 8일 저녁, 깔리자띠(Kalijati) 수방(Subang)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정식으로 항복하게 된다.

영화감독 미스바흐 유사 비란 (Misbach Yusa Biran)의 증언 따르면 일본군이 르박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군은 찌우중 강 교량을 폭파했으나, 별 다른 저항 없이 일본군은 르박에 진입하여 즉시 반뜬의 모든 중요 시설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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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한다. 8월 16일, 일본이 연합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을 열망하는 청년들은 수카르노와 하타를 납치해 서부자바 렝아스뎅끌록(Rengasdengklok)으로 데려가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자카르타에 있는 일본 마에다(Maeda) 제독 집(현 독립선언서 작성 박물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1945년 8월 17일 오전 10시, 수카르노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수프라뜨만 (Wage Rudolf Supratman)이 작곡한 국가,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가 울리는 가운데, 파트마와띠(Fatmawati)가 바느질한 인도네시아 국기가 게양되었다. 

1945년 12월 10일, 수카르노와 하따가 랑까스비뚱에 도착했을 때 반뜬 지역 사회혁명주의자들은 8대(1938~1944) 르박 군수 하디위안군(Raden Tumenggung Hardiwiangun)을 살해하고 심장을 도려냈다. 인도네시아 독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식민 잔재를 일소하려는 사회혁명 열기를 가져왔다.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반뜬 지역의 모든 군수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시민 지도자인 Ce Mamat이 있었다. KH Tubagus Hasan이 10대 군수로 취임했다. (1945~1949)

인도네시아 독립 후, 모든 것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21일, 네덜란드군의 1차 침공과 1948년 12월 19일 2차 침공으로 전쟁은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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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는 그의 독립 투쟁에 있어 『막스 하벨라르』를 투쟁의 본보기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따뚤리로 인해서 윤리정책 시대가 열렸고,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인들이 제한적인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중요한 결과다. 물론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할 기술자와 장인을 육성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지만, 후일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발현시키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좋은 예가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이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1957년 초, 수카르노는 반뗀의 랑까스비뚱과 세랑 (Serang)을 방문하게 되다.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1901년에 건설된 기차역에서 내렸다. 우리에게 익숙한 검은 선글래스를 착용한 모습으로 기차 트랩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또 다른 사진에는 랑까스비뚱이라고 적혀 있는 역사 입구에서 많은 환영객이 그를 맞이하고 있다.

대단한 열기로 주민들은 수카르노를 환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랑까스비뚱 광장에 모여 들었다. 그곳에서 수카르노는 끓어오르는 정치 열기 속에 인도네시아의 단합과 문맹 퇴치를 외쳤다. 그것만이 다시는 식민지배 당하지 않는 열쇠라고. 그 당시 랑까스비뚱은 자카르타, 부이텐조그(보고르), 렝아스뎅끌록, 자카르타 동부에 있는 까라왕(Karawang), 버까시(Bekasi)와 비교하여 그 명성이 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물따뚤리의 『막스 하벨라르』가 랑까스비뚱의 명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인문창작클럽(INJAK)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이강현)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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