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세월을 넘어선 아름다움: Pantjoran Tea House와 글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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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넘어선 아름다움: Pantjoran Tea House와 글로독

인문창작클럽 연재
기사입력 2019.04.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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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넘어선 아름다움, Pantjoran Tea House 그리고 글로독

글과 사진: 사공 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끄레떽 담배의 향기와 어울리는 차의 맛을 즐긴다. 차는 특히 시골 여성들이 즐겨 마시는 전통 음료이다. 인도네시아 차의 대명사 사리왕이(Sariwangi)의 "차는 인도네시아에서 200 년 동안 매일 식탁에 올랐다.”로 시작하는 광고를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차는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과 같다. 또한 티타임이 가족생활과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시계를 돌려 수세기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글로독(Glodok) 시장 입구에 있는 Pantjoran Tea House 앞, 정확히 말하면 바티비아와 글로독으로 나누어지는 모퉁이에 차 주전자 8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옛날(1663-1666) 중국인 노동자와 현지인을 관리하는 동인도회사(VOC) 중간관리자 간지(Gan Djie) 부부는 이 지역의 고단한 노동자나 이주민들을 위해 잘 우려낸 차 주전자 8개를 사무소 앞에 준비해 두었다. 마음 넓은 부부가 누구라도 항상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한 거였다. 지금의 Pantjoran Tea House와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이 차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은 차이나타운의 간지 사무소를 찾았다. 이 지역은 나중에 Patekoan으로 알려졌는데, 중국어로 Pa는 8이고 Te-Koan은 주전자라는 뜻이다. Pantjoran Tea House는 간지 부부의 따뜻한 마음을 기리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매일 찻집 앞에 차 주전자 8개를 준비하고 있다.

빤쪼란 티 하우스 시음.jpg▲ 빤쪼란 티하우스에서 모든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내놓은 8개의 차 주전자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청화약국

글로독 차이나타운의 랜드 마크인 이 건물은 1635년에 지어져 사무실 건물로 사용되다가 1928년에 청화약국(Apothek Chung Hwa)으로 문을 연다. 이는 자카르타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다. 옛 자료에는 독일 바이엘 제약사의 아스피린(Bayer & Aspirin) 광고판 간판이 보인다. 서양식 현대 약품과 중국의 전통 약(한약)을 함께 판매하는 약국이었던 셈이다.

청화약국은 바타비아 시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행정 기간에 이 지역은 남쪽에서 바타비아시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청화약국이 그 관문이었다. 이 약국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글로독이고, 왼쪽은 바티비아로 가는 길이 된다. 청화약국은 자카르타의 꼬따 뚜아(Old Town)와 차이나타운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자카르타의 구 도시, 즉 꼬따 뚜아를 등재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2015년에 수리해 Pantjoran Tea House로 개관했다. 건축가 아마드 주하라 (Ahmad Djuhara)가 수리를 지휘했다고 한다.

1930년 사진을 보면 청화약국 주변은 무역활동과 운송수단들로 매우 혼잡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일본의 점령기 시절에는 청화약국 바로 앞, 글로독 차이나타운 입구에 일본이 만든 글로독 문이 있었다. 약국 앞에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독립 후인 1948년 식민잔재인 글로독 입구에 있는 문을 없애버렸다. 인도네시아 사람과 중국 사람을 둘로 나누지 말자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1957년 청화약국 앞을 지나던 네덜란드의 상속 재산 운송 수단인 전철을 수카르노(Soekarno) 대통령이 폐지했다. 너무 오래 되었고, 무엇보다 전철은 식민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1997년 글로독 차이나타운의 전통 시장을 대체하는 대형 쇼핑센터가 세워지고, 청화약국 주변의 도로를 넓히는 등 급속한 변화가 있었다. 2015년 이전까지 청화약국 건물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었다. 건물 주변에 노점상이 많아 아주 혼잡했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드디어 청화약국 건물을 수리해 Pantjoran Tea House로 문을 연다.

빤쪼란 티 하우스2.jpg▲ 청화약국 당시 모습 [사진: 구글이미지]
 
빤쪼란 티 하우스 1.jpg▲ 현재 Pantjoran Tea House 모습
 

차와 꼬따뚜아 그리고 전염병

글로독 지역과 자카르타 꼬따 뚜아 개발의 역사는 차와 분리될 수 없다. 차는 무역상품일 뿐만 아니라 전통이 되었다. VOC에서 일한 식물학자이자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인 독일인 안드레아스 클리예르(Andreas Cleyer)가 1684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차 종자를 가져와 바타비아의 깔리브사르 운하, 티지그라흐트(Tijgergracht, 현 Jl. Pos Kota) 주변에 심었다.

차와 관련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 1629년 마타람왕국은 두 번째 바타바아를 공격했다. 마타람 세력은 네덜란드가 바타비아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찔리웅(Ciliwung)강을 오염시켰다. 허나 아직은 강물이 깨끗해서 끓이지 않고 바로 마셨다. 1668년에 살락 화산이 폭발했다. 진흙과 광물질과 화산재로 찔리웅 강은 많이 오염되었다. 바타비아의 많은 주민들이 이질과 콜레라로 사망했다. 하지만 중국인 희생자는 적었다. 끓인 물로 차를 우려내는 중국의 전통이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당시에는 100도에서 박테리아가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단지 중국 사람들이 차를 마시기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찻잎을 씹고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문화는 이미 일상이었다.

빤쪼란 글로독

이 지역의 이름인 빤쪼란, 글로독(Pancoran=Pantjoran, Glodok)엔 나름의 유래가 있다. 글로독 지역의 물이 깨끗해 중국인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글로독에서 2킬로 떨어진 바타비아까지 파이프로 물을 끌어 가져갔다고 한다. 글로독은 옛 시청(현 자카르타 역사박물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1743년경에 지어진 작은 팔각형 분수대에서 나오는 물의 소리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쏟아지는 물, 흘러내리는 물이 인도네시아어로 빤쭈란이어서 이 지역을 빤쪼란(빤쭈란에서 유래) 글로독이라고 부른다. 이로 미루어 당시엔 깨끗한 물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알 수 있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분수대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했다.

1740년은 중국인들의 피가 흘러넘치는 피의 해가 되었다. 그해 10월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바타비아시 주변의 사회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설탕 가격의 폭락으로 사탕수수 공장에서 해고된 중국인들은 일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범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VOC 병사들은 중국인들을 죽였고, 나중에 북부 자바에서는 반란군이 발생했다. 그 당시 VOC 총독인 Adriaan Valckenier(1737-1741)가 대학살 지시를 내렸다.

Baron van Imhoff(1743-1750)가 총독이 된 후, 중국인들은 도시의 요새(현 꼬따뚜아) 바깥 한 곳에 모여서 살게 되었다. 그 곳이 현재의 글로독이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튼튼한 건물을 세웠다. 이 지역은 큰 시장을 가지고 있고, 항구와도 가까워 상업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글로독 지역과 주변은 마침내 바타비아의 차이나타운이 되어 200년 동안 무역 센터 역할을 했다. 1950~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자본이 글로독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글로독 무역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글로독(Glodok)이라는 이름의 식민지 감옥이 있었다. 1743년에 지어진 이 감옥은 처음에는 중국인만 구금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선언서 작성자인 하따(Mohammad Hatta) 또한 그곳에 구금되었다. 3.1운동 자금을 조달해 주다가 쫓겨서 중국을 거쳐 자바 땅을 최초로 밟은 장윤원 선생도 잠시 구금당했던 곳이고, 일본 패망 후 전범으로 몰린 조선인 포로감시원 4명이 사형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록 음악을 수카르노가 금지했을 때 록그룹 Koes Brothers는 비틀즈 노래를 연주했다는 이유로 글로독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이 역사적인 교도소는 이제 사라져 Harco 쇼핑센터 전자상가가 되었다.

바타비아

VOC가 바타비아를 건설한 1619년 당시에는 바타비아를 ‘동양의 진주’라고 불렀다. 아름답고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 지역엔 허허로운 공터가 많았고, 빠자자란 (Padjadjaran) 힌두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VOC는 1622년에 운하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청화약국 주변은 농장 지역이었는데, 주변에 여러 주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깔리브사르(Kalibesar)는 구불구불한 상태였다. 1627년엔 글로독 가까운 곳에 있는 깔리브사르 운하와 동쪽 성벽이 건설되었다. 도시 벽 내의 일부 지역은 점점 발전했고, 현재 꼬따 뚜아라 불리는 바타비아 지역과 연결되었다.

바타비아의 옛 중심지 꼬따 뚜아는 Tea House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바타비아(구 자카르타)는 점점 커진다. 1632년에 운하와 깔리브사르의 건설이 계속되고, 이 지역은 운하에 의해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진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은 벽돌과 시멘트를 사용해 다시 짓기 시작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635년엔 도로와 운하의 건설은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에서도 계속 진행되었다. 청화약국 건물이 이때 세워진다. 1650년에 이르자 군사적 위협이 없을지라도 성벽(City Wall) 내부의 건물 구조는 유지되었다. 이 시대에 도시 벽 뒤에 있는 지역은 1.5km에 이른다. 1667년에 바타비아가 도시로 형태를 갖추게 된다.

빤조란 티 하우스 사공경.jpg
 
빤쪼란 티 하우스 진열장.jpg
 

Pantjoran Tea House

이 역사적인 거리에 문을 연 Pantjoran Tea House로 들어가 보자. 문을 열면 계산대 뒷벽 모두가 빨간색으로 된, 차를 보관하는 장식장이 있다. 옛 중국 사람들의 차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바티비아, 글로독, 차에 관한 고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차를 사랑한 까르띠니 책도 전시되어있다. Tea House 주인, Lin Che Wei 씨가 얼마나 역사와 차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 차 문화를 포함해서 차에 대한 정보가 적힌 액자가 20개 정도 있고, 중국풍의 창문과 다례에 사용하는 찻잔과 도구들이 몇몇 테이블에 예술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관우를 그린 유화도 전시되어 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중국의 우아한 찻집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메뉴를 달라고 하면 신문을 가지고 온다. 신문 이름은 Pantjoran Tea House다. 1면에 100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1900년대의 Tea House 전경이 있다. 바타비아와 글로독, 차, Tea House의 역사가 적혀 있다. 3, 4, 5, 6면은 메뉴인데, 그림으로만 봐도 건강식임을 알 수가 있다. 한약재료, 닭, 인삼이 들어간 스프와 비트 나시고렝은 이 찻집의 자랑거리. 7면은 Pantjoran Tea House에서 바타비아 금융 지역(Kawasan Finansial Batavia)까지 걷는 코스가 그림으로 잘 그려져 있다. 8면은 Tea House 에서 차이나타운 (Kawasan Pecinan Batavia)을 걷는 코스가 잘 그려져 있는 지도가 있다.

중국에서 시작(탄생)된 차의 역사를 요약해 놓은 액자도 있다. 읽어 보면 차의 역사는 놀랍게도 기원전 27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뜨거운 물 컵에 찻잎을 넣고 불어서 마시는 차를 발견한 중국의 두 번째 황제인 쉔눙(Shen Nung)에 대한 이야기다.

1101-1125년에 Hui Tsung 황제는 차에 사로잡혀 차 잘 만드는 방법에 대한 책을 썼다. 그는 심지어 왕궁에서 차 맛보기 토너먼트 경기를 개최하였다. 그는 차에 대한 열정으로 정신이 팔려 몽골이 그 왕국을 점령하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차가 들어가게 된 건 불교의 전파와 관계가 있다. 고대의 중국과 일본, 한국은 불교국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차 문화도 공유했다. 스님들은 차를 마시며 명상에 들었다. 차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초의선사도 그런 스님들 중의 한 분이었다. 스님들은 다도가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처럼 소수의 특별한 마니아들이 애지중지했던 차는 한 발 앞서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 열강에 의해 찻잔 속에 피식민지 노동자들의 땀과 피눈물이 차와 함께 담겼다. 1830년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강제경작제도를 시작한다. 차 재배가 호황을 누리자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약 30년 간 자체 농장을 운영했다. 그 기간에 현지인들은 2등급의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식민정부는 많은 수익을 얻었다.

거의 1세기 후인 1826년에 보고르 식물원(1817년 설립)에 차나무를 심음으로써 비로소 식물원은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인도네시아 일반 주민들은 1826년에 보고르 근처와 1827년 Garut에 차 나무가 심어졌을 때에 그 식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1877-1878년에 인도와 스리랑카(실론)로부터 신맛이 나는 차 종자를 인도네시아에 들여왔다. 1870년 농업법은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75년의 기한의 임차지에 차 재배를 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세계2차 대전까지 차 산업이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현재 세계 7위 차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강제작물제도, 아편전쟁,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한 혁명, 그 중독성은 어떻게 차가 지닌 영성과 보편적으로 관련될 수 있을까?

차는 오늘날처럼 대중화된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 그 잎맥보다도 더 복잡다단한 길을 역사와 함께 걸어 온 우여곡절의 산물이었다. 어쨌거나 겸손하고 평온한 마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차는 그대로가 아름다움이다. Pantjoran Tea House는 그 전부가 고스란히 아름다움이다.

간지 부부의 인정과 온기는 오늘도 Pantjoran Tea House 앞에서 8개의 찻주전자로 만날 수 있다. Tea House 대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주인, Lin Che Wei 씨의 경건하기까지 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고 찻집을 나선다. 국적이나 종족에 관계없이 화합된 사회를 위해서 차를 준비한 간지 부부처럼 ‘사람을 위한 차’, ‘화합을 위한 차’라는 철학을 지키고 싶다는 주인의 소신에 응원의 박수를 보탠다.

앞만 보며 달려온 바쁜 일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숨 고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멈춘 Pantjoran Tea House가 있어서 글로독은 한층 더 깊어 보인다.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오랜 사연들을 덧칠한 지난 세월 앞에서 까닭 모르게 겸손해진다.

‘오래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우리함께 차를 마셔요’- 이해인

*참고문헌: pantjoranteahouse.com, latitudes.nu


인문창작클럽(INJAK)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이강현)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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