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상균의 식물원카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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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식물원카페 9

기사입력 2019.06.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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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창비시선 125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26일 식물원카페 사진.jpg▲ [사진:김상균]
 

 오전 이른 시간부터 뜨거운 햇살이 닿기 전까지 아파트 베란다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날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불면(不眠)으로 또는 이른 시간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해 일찍 맞이한 하루. 까치 소리,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며 뿜어내는 이파리들의 푸른 내음, 바삐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까지 두루 살피다 보면 내가 여행자가 되어 출근 시간 무렵 길가에 앉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곤 합니다. 국외자(局外者)가 된 듯한 묘한 기분과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할지 하는 괜한 마음도 함께 자리합니다.
 요즘 산책길에 유기 묘의 갓 태어난 새끼들이 어미 곁에서 재롱을 부리는 걸 몰래 지켜보곤 합니다. 그리고 어둑어둑할 무렵, 우연히 어미가 도로를 가로질러 사료가 놓인 곳에 가서 허겁지겁 먹고는 두고 온 새끼들 걱정에 급히 되돌아가는 걸 보기도 합니다. 신생(新生)의 싱그러움, 모성(母性)의 위대함을 새삼 느낍니다.
 
 ‘못 위의 잠’에서 시인은, 새끼들로 가득 차 있어서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고 바로 그 옆,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아비) 제비”를 뜨겁게 응시합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 퇴근길 엄마를 마중 나온 세 아이와 실업 상태인 그 아비를 (아비) 제비와 오버랩시킵니다. 이어서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로 형상화된 존재는 좁은 골목길에서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합니다. 
 시인은 둥지 속에서 잠든 새끼들과 둥지를 감싼 채 잠든 어미 그리고 그 옆의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통해 아비의 입장과 처지를 공간적으로 입체화합니다. 이러한 아비의 모습과 위상은, 우리 문화에서 어쩌면 우리의 상식에서 볼 때, 자녀와의 관계에선 어미에 비해 항상 비껴서있는 존재로 여겨져 왔고, 들러리일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항상 그러해왔고 그러한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져 온, 어머니란 존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겉도는 존재로 규정되어왔던 아버지에 대해 시인은 안쓰러운 눈길을 줍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못 하나, 그 위의 잠” - 이러한 시인의 응시는 아버지(또는 아비)에 대해 낯설지만 따사로운,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늦은 장마가 이제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어서 다가올 폭염, 무더위, 열대야… 수월하지 않은 날들이 계속될 듯합니다. 그럴수록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Claude Debussy의 bergamasque 모음곡 중에서 Clair de lune(달빛),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김상균.jpg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90년대 초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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