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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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

기사입력 2011.11.2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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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오면(Come September) 그녀는 님을 기다리며 작고 소박했던 마음을 황금물결로 일렁이는 들녘 한가운데 바람으로 풀어 놓았듯이’, 매년 자카르타에도 9월이 찾아오면 필자는 ‘한국문화주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3년째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그들이지만 매년 다른 자태를 품고 등장하는 신선함은 우기와 건기로만 반복되어 단조롭기 그지없는 이곳 교민들의 일상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주며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연예인들에게 열광하는 현지인들에게는 축제의 한 마당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잠시 생업 속의 시간을 쪼개어 행사의 개막 팡파레가 울리는 ‘대사배 태권도대회’ 식전행사인 태권도시범을 관람하였다. 두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높이에 장검의 끝에 꽂혀있는 빨간 과일을 향해 정확하게 발차기로 가격하여 박살내는 고난도 기술은 관람객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사과를 자신의 아들 머리 위에 얹어놓고 화살로 관통시키는 윌리엄 텔(William Tell)의 전설이 잠깐 머리를 스치기는 하였지만 바로 코 앞에서 전개되는 실제상황의 전율 앞에 곧 소멸되었다.

세계태권도연맹 소속의 이들 시범단은 이틀 후에 열린 개천절 및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똑같은 묘기를 선보였다. 이 자리에는 두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다수의 전.현직 인도네시아 각료들과 외교사절단이 참석하여 ‘다이나믹 코리아’의 역동성을 세계만방(?)에 그대로 보여준 행사였다. 뒤이어 무대에 등장한 여성 6인조 드럼켓의 공연 또한 여성의 힘을 아름다움 속으로 정제시켜, 때마침 금년도 노벨평화상을 아프리카와 중동국 여성지도자 3명이 공동 수상한 경사와 보조를 맞추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성의 화두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날 파티장을 찾은 7명의 현직 각료 중 3명이 여성장관들이었으니, ‘여성의 날’ 행사로 착각할 정도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35명의 각료 중 여성 장관은 총 4명이니, 보건부장관만 빼고 전원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는 뜻이다. 이날 행사의 백미라면, 인도네시아 정부를 대표하여 단상에 오른 핫따 라자사(Hatta Rajasa) 경제조정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이었다.

그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자신도 학창시절에 태권도에 입문한 인연을 꺼내며 한국예찬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완공한 자고라위 고속도로의 완벽성을 칭송하며 그 역사(役事)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였으며, 삼성전자, LG전자의 성공사례와 최근 투자를 실현한 포스코, 한국타이어, 롯데그룹의 상호를 정확히 거명할 정도로 양국 경제교류의 현 주소를 그대로 적시하였다. ‘국가 위상’ 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과 같은 금자탑은 하루 아침에 쌓아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 자고 일어나면 터지는 한국진출기업의 노사분규로 인해 이곳 식자들로부터 3등 국민이라고 지탄을 받던 시절이 바로 20년 전 일이나, 우리는 어느새 이러한 오명을 다 씻어내고 최대 외국인 커뮤니티라는 양적 팽창과 더불어 기업투자의 급신장이라는 질적인 향상도 도모하였다. 일본정부는 재빨리 자국 특별기를 띄우고, 미국은 발리섬에 함대를 들이대며 대탈출(Exodus)을 시도하던 1998년 5월 사태 당시, 자경단을 구성해 우리의 회사와 가족은 우리 스스로가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뭉쳐진 당시 한국인의 용맹성은 이곳 현지인은 물론 외국인 사회에 강한 인상을 심은 바 있다.

2006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며 정부는 경제교류와 함께 문화인프라 구축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영사관계를 수립한 1966년도에 3명 규모의 공관이었던 우리에 비해, 공관원 50명의 집단체로써 거만한 외교 파워를 과시하던 북한은 몇몇 안되는 우리 교민들을 회유하기도 하였으며 한국공관으로 가자고 택시를 타면 북한대사관으로 안내하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언론계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의 실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치적이 북한의 몫으로 변질되어 오도되어 나오는 언론기사를 보고 분통을 터뜨리던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지인들을 대할 때마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

한국대사관이 매년 주최하는 국경일 행사에 인도네시아 주무장관인 외무부장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으며, 경량급 장관 한 두 명만 참석해도 감지덕지하였다. 이날 참석한 8명의 현직 각료 외에도 전직 정.부통령인 메가와띠와 유숩 깔라까지 참석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라는 단어 그대로가 아니겠는가.

소녀시절 자카르타를 찾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김일성화’를 헌정하는 역사적 현장의 증인으로서, 남북문제에 관한 한 해결사임을 자임하며 바로 얼마 전인 9월 중순에 평양을 다녀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메가와띠의 자태는 지존적인 풍모를 풍겼으며, 전직 부통령인 유숩 깔라도 다변가답게 행사장 맨 앞자리에 서서 4~5명의 현직장관들과 담소를 나누기에 바빴다.

축하 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무대로 나온 장관들의 면면은 그 어느 강대국 국가의 파티 행사에서도 볼 수 없는 드문 장면이었다. 금년 11월이면 유도요노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는 핫따 경제조정장관을 비롯하여 뿌르노모 국방부장관, 히다얏 산업부장관, 마리 빵에스뚜 무역부장관, 하산 산림부장관 외에 뒷전에서 관망하고 있는 아구스 국군사령관(PANGAB), 공군참모총장, 알리샤바나 국가기획원장관, 린다 여성부장관과 그녀의 남편인 아굼 구멜라르 전 교통부장관의 두터운 그림자는 지금 한국과 인도네시아간에 무슨 일어 전개되는지를 대략 짐작케하고 있다.

이날로부터 불과 11일 후에 열린 중국의 건국일인 쌍십절행사에 참석한 인도네시아 정부 각료는 아궁 락소노 사회복지 조정장관, 엔당 보건부장관, 그리고 중국계인 마리 무역부장관에 불과한 사실과 비교하면 격상된 한국의 위상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전례없이 많은 각료들이 우리의 국가적 행사에 참석하였음은 양국 외교사에 기록될만한 사건이며, 우리가 늘 아쉬워했던 베니 무르다니 장군 같은 진정한 지한파 인사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도 갖게 한다.

글 : 김 문 환 칼럼니스트

<상기 글은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 발행하는 2011년 11월호 '한인뉴스'에 게재된 내용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전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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