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99년 전 인도네시아 '첫발' 장윤원 선생…"그는 한국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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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전 인도네시아 '첫발' 장윤원 선생…"그는 한국인입니다"

기사입력 2019.09.2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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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원.jpg▲ 장윤원 선생과 중국인 부인, 자녀들 [재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
 
한인회 100년사 집필하며 발자취 추적…매년 9월 20일 기릴 것 

"조 준 엔(CHO JUN EN)은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닙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처음 정착한 한국인 장윤원입니다"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가 '한인 100년사' 집필을 계기로 1920년 9월 20일 자카르타에 도착해 뿌리내린 장윤원(張潤遠·1883∼1947) 선생을 집중 조명하고 나섰다.

재인도네시아한인회 박재한 회장과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 등 10여명은 21일 장 선생이 살았던 집터와 주변, 일제에 고문당하고 수감됐던 곳, 묘비, 아들이 세운 대학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종일 탐방했다.

한인회는 장 선생이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100년 되는 내년에 9월 20일을 '재인니 한인의 날'로 선포하고 매년 기릴 계획이다. 

◇ 장윤원, 독립운동 자금 지원 후 망명 =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장 선생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장석찬의 외아들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상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은행에서 일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은행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장 선생은 독립자금 지원 사실이 발각돼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도망, 1920년 당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 총독부 고위관리의 권유로 자카르타에 망명했다.

1910년대에 조선의 인삼 상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다녀가기도 했으나 이곳에서 결혼해 정착한 한인은 장 선생이 최초이다.

그는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중국 여성과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장 선생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총독부 일본어 담당 수석 고문관으로 일했다. 

일본은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마자 장 선생과 장남을 체포해 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한 뒤 형무소에 가뒀다. 

장 선생은 1945년 8월 종전으로 출옥한 뒤 재자바 조선인민회 출범을 뒤에서 돕는 등 조선 동포들을 위해 뛰었으나 고문 후유증 등으로 1947년 11월 65세를 일기로 자카르타에서 생을 마감했다.

장순일.jpg▲ 장순일 선생과 부인 코 시옥 판 여사 1989년 바오르 2세 교황은 인니 방문 직후 장순일 선생에게 실버메달 훈장을 수여함. [아뜨마 자야 대학교 제공]
 
◇ 인니 '최초 한인' 자리 찾아주기 = 이날 탐방단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카르타 뽄독인다의 장 선생 묘소였다.

그의 묘비에는 '장윤원'이라는 한자와 함께 일본식 발음 '조 준 엔(CHO JUN EN)'이 새겨져 있다. 병으로 요절한 딸과 부인도 합장돼 있다.

탐방단은 이어 장 선생의 차남 장순일이 네덜란드 유학 후 사업에 성공해 1960년 설립한 가톨릭계 대학 아뜨마 자야(ATMA JAYA)를 방문했다.

장순일은 12명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초대 공대학장과 재단 부이사장을 지냈기에 공과대학 건물에는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하지만, 장순일 역시 일본식 발음인 '준 이치 조'로 알려져 있기에 건물 명패에 'J.P.CHO'(준이치 파울 조)로 적혀 있다. 파울은 세례명이다.

아뜨마 자야 대학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 강혜원·최형윤·조인정씨는 이구동성으로 "이 대학에 한국과 관련한 역사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왔다"며 "지금이라도 알게 돼 자긍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 대학 부총장을 만난 박재한 한인회장은 "파울 조는 사실 파울 장이고, 그의 부친 장윤원은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설명했다.

재인니 한인회와 한국대사관은 공과대 건물 명패의 일본식 이름 표기를 '장순일관'으로 바꿔 달도록 대학 측과 협의하기로 했다.

류완수 영사는 "후손들의 의사가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아뜨마 자야 대학 건물 명패에 설립자가 한국인임을 표시하는 방안을 한인회와 함께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시옥판.jpg김창범 주인니 한국대사와 코 시옥 판 여사 [한인포스트 제공]
 
◇ 후손들, 한인사회 교류 없었던 이유 = 그동안 장윤원 선생의 후손들은 한인사회와 거의 교류가 없고 지금도 나서는 것을 꺼린다.

막내딸 장평화는 한국총영사관 직원으로 채용돼 1971년 한국을 방문하고, 1974년 한국인 외교관과 결혼해 2016년 숨질 때까지 한국에서 살기도 했다. 남편은 여한종 전 파푸아뉴기니 대사다. 

하지만, 3대 후손들은 조용히 살길 원하고 한국계라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고 살았다.

장윤원 선생의 부인이 중국인인데, 인도네시아에서 화교가 탄압받았던 역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 선생의 행적이 문서로 남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부분에 대한 서운함도 섞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사관은 지난 15일 장순일 선생의 부인 코 시옥 판(92) 여사 등 가족 6명을 관저로 초청해 한인 100년사 집필진 등과 만나도록 오찬 자리를 마련했다.

오찬에 함께한 정선 한인포스트 대표는 "장윤원 선생이 왜 인도네시아에 처음 정착한 한인인지 그 이유와 중요성을 설명하고, 100년사 집필을 위한 자료 등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이날 탐방단을 이끈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 원장은 "장윤원 선생이 자카르타에 왔을 때는 조국이 없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냐"며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한인들이 자긍심을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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