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개척 첨병 ‘마인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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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개척 첨병 ‘마인어과’”

기사입력 2019.10.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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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호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명예교수 인터뷰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편집자주] 이 글은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을 위한 사료로, 한인들이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첨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인뉴스를 비롯한 여러 한인 미디어에 게재합니다.  이 글 주제와 관련해 사진과 기록물 등 다양한 자료를 제보해주시면, 스캔 또는 사진촬영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한인사에는 편집을 거친 사료를 전체 분량을 고려해 일부만 사용할 계획입니다. 인도네시아 한인사의 주역인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안영호.jpg▲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마인어과 동물들의 활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안영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2019년 9월 25일  [데일리인도네시아]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졸업생들은 초기 원목사업으로 진출한 한국남방개발(코데코)과 인니동화(현 코린도) 등 원목개발회사에 취업해, 전입미답의 원시림에서 무더운 기후와 열대 풍토병과 싸우고, 현지 직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회사와 자신의 삶의 기틀을 마련했다.” 

안영호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이하 마인어과) 명예교수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과의 인터뷰에서 현지어의 중요성에 대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게 최우선은 현지인과의 의사소통이었다. 1960~1970년대 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 초창기에는 거의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1964년 한국외대 마인어과 1회 입학생인 안 교수는 이어 당시 현지에서는 일부 해외에서 유학한 고위급 공무원이나 지식인들이 영어를 사용했지만 일반적인 소통수단은 아니었다. 특히 1967년 집권해 32년간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대통령은 국가통합의 기치 아래 화교들의 중국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인도네시아어 사용을 강제했던 만큼 인도네시아어라는 첨단무기(?)를 가진 마인어과 졸업생들은 필수요원이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안영호 한국외대 명예교수와의 일문일답   

- 한국외대 마인어과에 대해

한국외대 마인어과는 1963년 문교부(현재 교육부) 설립 인가를 받아, 1964년에 인도네시아어과로 출발했다. 1960대 초 당시 우리 정부는 대외관계에 있어 북한이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있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비동맹중립국 진영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장차 강대국의 잠재력이 큰 인도네시아의 중요성을 일찍이 감지하고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주자카르타 총영사관을 1966년 12월에 개설했고, 1973년 9월 한-인도네시아 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양국 외교관계 수립 이전인 1964년 인도네시아어과 개설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가 북한의 단독 수교국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학과로 출발하는 것에 대해 사회 전반에 걸친 공감대를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1966년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로 학과명이 변경되었다.      

- 초창기 마인어과 출신들의 활약은
 
마인어과 출신들은 1968년 ‘한국 해외 투자 1호’ 한국남방개발과 이듬해 진출한 인니동화 산림개발회사에 취업해 밀림에서 무더위와 풍토병, 향수병과 싸웠다. 1973년 ‘대한민국 1호 해외공장인 미원인도네시아(현 대상그룹)가 설립됐고, 1964년 학번들이 이 회사에 마인어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취업했다. 당시 미원의 판매전략은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는 판매영업전략을 구사했다. 트럭에 미원이 생산한 조미료 제품을 싣고 섬과 산간지역 등 인도네시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활동을 펼쳐, 인도네시아 시장을 선점한 현지 업체인 ‘사사’와 일본 기업 ‘아지노모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70년대에는 대림산업과 삼환기업 등 건설업체들도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 특히 현대건설이 1973년에 착공해 1978년 완공한 인도네시아 최초의 고속도로인 자카르타와 보고르를 잇는 자고라위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동문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 1988년 이후 한국기업 투자가 인도네시아에 쇄도하면서 마인어과 출신도 대거 진출하는데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산업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섬유·봉제와 신발 등 노동집약업체들이 대거 인도네시아에 진출하였고, 1990년대 LG전자와 삼성전자가 현지에 공장을 가동하는 등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 기업의 대인도네시아 투자가 급증하면서 한국외대뿐만 아니라 부산외대와 영산대 등 인도네시아 관련 학과 출신들이 현지에서 활약을 펼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기업은 석유화학, 금융, 유통, IT, 제약, 한류 관련 화장품과 외식업 등 투자업종이 다양해졌고, 내수시장의 잠재력을 기대하는 기업들이 인도네시아 시장에 속속 진출하면서 인도네시아어과 졸업생들은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 초창기에 진출한 여한종 대사와 부인 장평화 여사에 대해

독립운동가이자 최초 인도네시아 한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장윤원 선생의 막내딸 장평화 여사는 한인사회 초기에 한국총영사관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974년 여한종 대사와 결혼해 2016년 별세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작고한 여한종 전 파푸아뉴기니 대사는 앞서 주인도네시아대사관 공사를 역임한 마인어과 1964년 학번이다. 

장윤원 선생은 일본 동경제국대학 상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은행에서 일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은행원 직책을 활용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다가 발각됐다.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도주, 1920년 당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부 고위관리의 권유로 자카르타에 망명했다. 장윤원 선생은 당시 총독부에서 일본어 담당 수석 고문관으로 일했다. 일제는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마자 장 선생을 체포해 형무소에 가뒀다. 장 선생은 1945년 8월 종전으로 출옥한 뒤 재자바 조선인민회 출범을 뒤에서 돕는 등 조선 동포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 마인어과 비전은 

마인어과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양국을 주축으로 싱가포르와 브루나이를 포함, 3억명에 달하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해양부 지역을 연구하는 학과이다. 지역 연구의 기본이 되는 전공언어의 습득은 물론, 이 지역의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등 지역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어 명실상부 전공 지역의 글로벌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국내 굴지의 대기업, 외교 및 정보 분야 등 정부기관과 금융계 언론계 등의 분야에서 동문의 활약이 돋보인다. 또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 간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교류가 급증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으며, 교내에서도 타과학생들의 마인어과 이중전공자가 크게 늘어, 지원자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마인어과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도전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글로벌 시각을 갖춘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교육하고 지원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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