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칼럼]수라바야 전투/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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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수라바야 전투/배동선

인문창작클럽 연재
기사입력 2019.11.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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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동선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저자)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원회인 PPKI는 바로 다음날인 18일 정부 기본조직을 발표합니다. 일본열도를 향한 연합군 반격이 말루꾸 최북방 모로타이 섬을 스치며 비껴가 온존한 전투력을 고스란이 보존한 일본군이 최후 발악을 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22일 순순히 패전을 인정하고 현지인들을 동원해 일본군 하부조직으로 만든 보조부대 헤이호(兵補)와 총알받이 자경단 PETA를 해산하자 수카르노는 다음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들을 국민치안단(BKR)으로 규합합니다. 그 달 29일엔 독립준비위원회 (PPKI)가 국가중앙위원회(KNIP)로 명칭을 바꿔 총선 전까지 임시의회 역할에 돌입했고 8월 31일엔 수카느로와 모하마드 하타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가 정식 출범합니다. 당시 해방 공간의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전광석화 같은 속도의 정부수립이었습니다. 

국민치안단(BKR)은 각 지역 부대들이 군벌 성격을 띄면서 중앙 지휘를 듣지 않아 군대라고 칭하기 어려웠습니다. 그해 9월 8일 연합군 선발대로서 영국군 공수부대가 끄마요란 비행장 상공에 흘뿌려지자 연합군에 맞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킬 무력수단이 절실했던 수카르노는 국민치안단을 국민치안군(TKR)으로 승격시켰고 총독부 군대인 KNIL출신으로 네덜란드에 충성맹세 전력이 있는 우립 수모하르죠 중장이 공석인 총사령관 대신 참모장으로서 군권을 잡습니다. 그것이 1945년 10월 5일.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국군의 날로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신생 인도네시아군이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사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속속 상륙한 연합군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바로 직전 태평양 전쟁 당시 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베테랑 영국군에게 실전 경험이 전혀 없던 인도네시아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수라바야에서 바로 그 영국군 1개 사단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그해 9월 18일 시내 야마토 호텔 승전 축하파티에서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한 유럽인들을 격분한 시민들이 공격, 살해하면서 짙은 전운이 드리운 수라바야에 셔먼 탱크 24대 등 신무기와 공습, 함포직원을 등에 업은 영국군 제5인디아 사단 25,000명에 맞서 인도네시아 공화국군 2만 명과 민병대 12만 명이 모여듭니다. 조국 수호전쟁이야말로 이슬람 최고 가치인 성전(聖戰)이라는 나들라툴 울라마(NU)의 성명과10월 22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붕또모(Bung Tomo)의 격정적인 항전독려연설을 듣고 각지의 젊은이들이 죽창을 들고 수라바야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훗날 ‘수라바야 전투’라고 불리게 되는 이 사건은 10월 2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수라바야와 그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교전을 말합니다. 전투 초창기에는 인도네시아군이 영국군 인디아 병사 200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리지만 독립전쟁의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어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던 수카르노는 하타 부통령, 아미르 샤리푸딘 등과 함께 황급히 수라바야로 날아가 10월 30일 영국군 사단장 호손 소장과 휴전을 맺습니다. 하지만 당일 휴전사실이 충분히 전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군 멜러비 준장이 일선부대 방문 중 습격받아 전사하자 전투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마침내 11월 10일 영국군은 항구와 주요 거점들을 맹폭격하며 시내로 짓쳐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군 일부는 현지 일본군 주둔부대에서 넘겨받은 야포와 탱크들도 보유했지만 운용법을 몰라 오로지 소총과 죽창으로 영국군을 맞았습니다. ‘알라후 악바르’를 외치며 죽어가는 무수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한 600명의 무슬림 인디아군이 무장한 상태로 전향해 인도네시아군에 합류했지만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습니다. 11월 10일 총공세 이후 영국군은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사흘만에 수라바야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인도네시아군은 3주를 더 버티며 끈질기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영국군이 600여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 인도네시아군은 그 23배인 16,000명의 목숨과 함께 전투력 상당부분을 수라바야에서 잃었습니다. 

궤멸적인 손실에 충격을 받은 인도네시아는 이후 소모적인 전면전을 피해 철저히 게릴라 전술을 도모했고 그와 동시에 서방이 우호적으로 여기는 항일투사 출신 수딴 샤리르를 총리로 기용해 외교협상으로 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영국군은 기껏 태평양전쟁을 끝내고서 이제 네덜란드에 대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즉 명분도 없이 손실만 발생하는 남의 전쟁에서 빨리 발을 빼기로 가닥을 잡습니다. 수라바야 전투가 한창이던 11월 12일 족자에서 열린 전군 사단장급 지휘관 회의의 투표에서 KNIL출신 우립 수모하르죠 중장을 꺾고 당시 29세의 교사출신이자 PETA 대대장 출신 제5사단장 수디르만이 공석이던 전군사령관에 선출된 것 역시 유럽군과 목숨 걸고 맞붙던 당시 상황에 영향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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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공세로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가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11월 10일을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매년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기념합니다. 우리의 현충일과 같은 개념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격인 자카르타의 깔리바타 영웅묘지도 그날이면 더욱 많은 참배객들로 북적거립니다. 

붕또모.jpg▲ 수라바야 전투의 아이콘 붕또모
 
물론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제가 인도네시아에도 있습니다. 수라바야 전투의 아이콘 붕또모는 해방된 인도네시아에서 1955년 8월 국무장관이 되었다가 불과 8개월만인 이듬해 3월 옷을 벗습니다. 천상 반골인 그의 쓴소리를 수카르노가 좋아했을 리 없죠. 그는 수카르노를 끌어내리고 등장한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에 처음엔 환호하지만 곧 긍지있는 언론인 출신답게 잘못된 정책과 부정부패를 비판하다가 체포당하는 고초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정권에 대한 쓴소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1981년 메카 순례 중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시신이 인도네시아로 운구되지만 평소 그의 유지에 따라 깔리바타 영웅묘지가 아닌 수라바야의 일반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생전에 ‘가짜 영웅’들이 잔뜩 묻힌 영웅묘지에 그들과 함께 눕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인도네시아의 영웅묘지엔 식민종주국의 주구로서 독립군을 때려잡다가 건국영웅으로 신분세탁한 김창용, 노덕술 같은 이들이나 쿠테타를 도모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도망가서도 연금 꼬박꼬박 타먹는 기무사령관같은 이들은 묻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끝)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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