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상균의 식물원 카페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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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식물원 카페 64

기사입력 2020.09.0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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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실천문학의 시집 60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1989

식물원카페.jpg▲ 사진 김상균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 타인(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

세 차례의 태풍이 지나가고 맞이하는 9월의 밤입니다.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어느덧 무덥고 힘겨운 여름은 가버리고, 잠자리에선 홑이불을 곁에 두어야 하는 때가 찾아왔습니다.
자욱한 풀벌레 소리 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찬찬히 돌이켜보는 하루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조속히 코로나19 극복과 수재 복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소향의 ‘시간을 거슬러’입니다.



김상균 시인.jpg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90년대 초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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