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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칼럼8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 바타비아의 옛 시청
기사입력 2020.11.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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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박물관, 바타비아의 옛 시청

 

차정민 (민족사관고등학교 11학년 : 꼬따뚜아 연구팀) 

 

바타비아는 1809년까지만 해도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도시였다. 옛 자카르타, 꼬따뚜아에서 18세기 건물을 발견하게 된다. 바타비아의 수천 명의 거주인들이 살아왔던 역사가 서려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더치 언어로는 ‘시청’을 뜻하는 “스타두이스(Stadhuis)”로 불렸다. 이 건물 앞의 광장은 당시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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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시청. 300년 넘은 건축물.  170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10년에 완성된다. [사진=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이 2층짜리 건물은 1712년에 완공되었지만 낙성식은 완공되기 2년 전 남아프리카의 최고 도시인 케이프타운을 세운 잔 반 리빅(Jan van Riebeeck)의 아들인 아브라함 반 리빅(Abraham van Riebeeck (1653-1713)총독이 열었다.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새겨진 나무 조각이 보인다.

 

“이 시청은 예전의 건물을 허물고 1707년 1월 23일 쟌 반 혼(Joan can Hoorn) 총독의 재임기간 당시에 세워졌다. 1710년 7월 10일 아브라함 반 리빅 총독 때 완공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건물은 평평한 지붕으로 건설된 2대 시청(1627-1707)을 대체한 것이다. 당시 2대 시청의 모습은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입구에 대포를 배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이 지어진 당시 유명하고 부유했던 바타비아라는 도시로서는 매우 부족한 건축물로 판단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몇 번의 보수 작업을 거쳤으나 늘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체가 불가피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기존의 1대 시청은 1620년 깔리 버사르띠무르(Kali Besar Timur)의 땅 위에 대충 건설되었다가 6년밖에 유지가 안되어 잊혀졌다. 그리고 몇 년 간 2대 시청은 바타비아의 설립자인 얀 피에테르손 코엔(Jan Pieterszoon Coen)의 무덤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타비아를 향한 마타람 군대의 포위 공격이 진행되었던 1629년 당시 콜레라병으로 인해 죽게 되었다. 

 

최고의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인 실용적 고전주의 건축물

 

시청의 구조는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의 비율과 함께 매우 수수한 모습을 갖추었다. 체계도는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의 예술인들의 수장이었던 반 데 벨트(W.J. van de Velde-1721)가 그렸고, 독일의 브란덴버그의 건설업자였던 케머(J.F Kemmer)가 3년동안(1707-09) 이를 토대로 건설을 진행하였다. 그의 경험과 타고난 계산 능력으로 인해 동인도 회사의 신임과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금을 거둬들여 기존에 필요했던 비용의 2배 이상의 돈을 제공하여 중앙건물을 짓게하고 나머지 두개의 낮은 건물들은 신축하여 덧붙이고 고아원과 여성을 위한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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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물관 지하 감옥에 있는 쇠뭉치[사진=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시청의 전체적 레이아웃은 오늘날까지 사용될 수 있을만큼 매우 실용적으로 만들어졌다. 본관은 길이에 비해서는 폭이 좁은 편이다. 건물의 중앙에 팔각형의 전등과 길고 높은 이중 지붕 위를 덮고 있는  둥근 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돔의 꼭대기는 풍향계로 장식되어 있다. 기존에 있었던 2층 지붕창들은 이후에 2개가 추가되어 현재 상태로 되었다.

 

시청의 내부는 대칭적으로 지어졌는데, 앞쪽은 포르티코, 즉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2:1:2의 비율로 나누어져 있다. 1층 건물이 양쪽 날개부분의 두 건물들은(물론 서로 다른 길이의) 건물 전체가 좌우로 넓게 뻗어나가는 인상을 준다. 특히나 이 공간의 지붕들이 1850년 이전까지만 해도 본관의 벽까지 연장되고 나서 더욱이 그런 느낌을 준다. 

 

건물 속 커다란 창문들은 대들보를 가지고 있다. 지붕과 창의 수직의 선들은 튼튼하게 지어진 입구인 포르티코와 만나면서 더욱 강력한 인상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입구 위의 삼각형 부분인 페디먼트는  2층 건물 모두가  밀고 지지한다. 이 입구에 여러 가지 변화들이 가해졌다. 이를테면 박공, 포르티코의 지붕, 그리고 중앙의 창문들이 굴곡된 형태로 바뀌어졌다. 포르티코는 여섯 개의 고전주의와 어우러진 도리스 양식의 기둥 위에 별다른 장식도 없이 얹혀 있다. 건물에는 원래 정의를 상징하는 여성의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957년 이후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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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창문을 열고 총독은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여러가지 지시 사항을 말하였다. [사진=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바타비아 시청건물은 네덜란드 왕궁(royal Paleis op de Dam-1648)으로 알려진 암스테르담의 옛 시청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약 반세기 전 반 캄펜(J. van Campen-1637)이 고대 로마 신전의 건축풍인 팔라디오 건축물의 성향을 벗어난 장식이 없는 바로크 양식으로 이 궁전을 지은 적이 있었다. 반 캄펜은 이후 바타비아 시청을 만든 반 데 벨트( van de Velde)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암스테르담의 시청은 이후 부만(Boumann-1755)이 포츠담 시청을 건설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전적이지만 매우 수수한 프러시아의 바로크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반 데 발 박사(Dr. V.I. van de Wall)의 분석에 따르자면, 더치의 식민지적 건축물의 대표적 예로서 바타비아 기존의 시청을 들 수 있다고 하였다. 내부 구조는 매우 선명하면서도 꾸밈없이 수수하고 실용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오직 폭넓은 계단 난간만이 붉은 색으로 치장되어 있다. 

 

시청의 역할과 오해 

 

광장에 서서 박물관을 바라보면 무려 2세기에 걸쳐 여러 분야의 사업으로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이를 테면 혼인신고를 하러 오는 사람들, 일요일마다 더치어, 말레이어와 프랑스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법정에서 권리를 위한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 고아를 위한 보호를 쟁취하려는 사람들, 더러운 감옥을 들어가거나 증인의 역할을 하라는 명을 받고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 고문을 받은 사람들, 입구 부근에 사형을 당한 사람들 등을 생각할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옛 건물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시청은 오랜 역사에 걸쳐서 여러 용도로 쓰여 왔다. 중요한 회의들이 진행되어 온 탓에 이 건물은 “말씀의 집”(Gedung Bicara-그둥비짜라)로도 불려왔다. 호키엔 방언으로는 그동비짜로(Gedong Bi-cha-lo)로 불리웠다.


옛 시청에 대한 두 개의 분석이 있다. 첫째로는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가 이 곳을 본관 헤드쿼터로 사용했다는 설이다. 그것은 오류이다. 시청은 오직 바타비아의 행정 업무를 맡아 보는 데에 사용된 시청의 역할만 해왔다. 둘째는 시청이 옛 교회이자 기독교 성직자들의 거주지였다는 오해이다. 이것도 잘못된 사실이다. 1622년과 1640년 사이에만 2대 시청의 일부 공간이 교회(현 와양박물관)의 준공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쓰였을 뿐이다.

 

시청은 여러 가지의 위원회들을 진행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혼인 신고나 고아복지와 관련된 단체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것들은 사법권을 지녔던 행정장관들의 모임(Bench of Magistrates/College can Schepen)과 사법 재판소(Court of Justice)였다.

 

그리고 시청 앞 광장의 중앙에 자리한 팔각형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우물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글로독의찔리웅 강에서 비롯된 배관을 통해 시민들은 생수를 얻곤 했다. 꼬따 기차역(Kota Railstation)과 만디리 은행(Mandiri) 사이의 지하도가 2006년에 건설되었을 당시에 이 배관의 잔존물들은 발견되었다고 한다. 1712년에는 본관의 양쪽에 두 하단의 구간들이 추가되었다. 아래층에 있는 방들은 감옥들로 쓰여졌고, 위층의 것들은 감시원들의 기숙사 및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시청건물의 고풍스러운 자태를 보고 있자면 바타비아의 이국적인 도시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낭만이 느껴지는 듯 하지만, 사실 시청에서 스러져간 많은 목숨들과 그들이 겪었던 잔인한 형벌들이 난무했던 시절을 상상하자면 마냥 이국적인 분위기만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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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앞 광장에는 관광객을 위한 자전거 대여소와 기념품 노점들이 있다. [사진=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참고문헌 및 번역: A.Heuken SJ, [Historical Sites of Jakarta]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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