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답하다6] 동남아시아에서 ‘뻐라나깐’의 역할과 의미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자카르타 구도심에 있는 유럽풍 건물에 중국식과 자바식을 섞은 인테리어, 해산물과 향신료를 많이 사용해서 중국식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을 ‘뻐라나깐’ 레스토랑이라고 부릅니다. ‘뻐라나깐(peranakan)’을 인도네시아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혼혈인’ 또는 ‘후손’이라는 뜻이 나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또는 ‘싱가포르를 포함해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 반도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과 현지 주민 사이에 형성된 혼합문화’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뻐라나깐의 정확한 의미는? 형성 배경은? 중국계 혼혈인만 부르는 호칭일까? ‘뻐라나깐’에 대해 책 <화교 이야기>(김종호 지음)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책>
제목: 화교 이야기. 중국과 동남아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저자: 김종호
출판사: 너머북스
출판일: 2021년 01월 29일
<묻고 답하기>
(묻다) 뻐라나깐은?
(답하다) 뻐라나깐은 외국(유럽, 아랍, 인도, 중국 등)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인과 그들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다. 뻐라나깐은 말레이어(멀라유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이(local-born)”를 의미한다. 뻐라나깐은 종족에 따라 중국계 뻐라나깐, 아랍계 뻐라나깐, 네덜란드계 뻐라나깐 및 인도계 뻐라나깐 등으로 부른다.
(묻다) 뻐라나깐을 중국계 후손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답하다) 동남아시아로 온 이주자 중 중국계 뻐라나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중요성 역시 가장 큰 까닭에 중국계 뻐나라깐을 가리키게 됐다.
(묻다) 혼혈이 아닌 중국계 후손도 뻐나라깐이라 부를 수 있나?
(답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꼭 혼혈이 아니더라도 2세대, 3세대에 걸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현지에 동화된 중국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묻다) 유럽국가의 동남아시아 진출과 뻐라나깐 그룹의 의미
(답하다) 유럽 국가의 동남아시아 진출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혼혈 그룹은 크게 유럽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 중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의 혼혈 등이 있다. 국적 혹은 종족이 다른 부모를 가진 혼혈인은 두 지역 모두에 속하면서 또 그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특징으로 인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각종 문명의 교차로였던 동남아시아 역사 속 혼혈 그룹은 그 다양성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묻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계 뻐라나깐의 역할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는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했다. 여기서 중국인 남성과 현지인 여성의 혼혈인 중국계 뻐라나깐 그룹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가 작용하는데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시 말해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 또한 중국계 뻐라나깐은 중국인 그룹과 말레이 현지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특징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 말라카, 페낭 등 영국 식민정부가 통치하던 항구도시에 살던 중국계 뻐라나깐들은 일찍부터 영국식 교육을 받아서 영어에 능통하고 혼혈의 특성상 중국어(정확히는 푸젠 지역 등 중국 방언)와 말레이어 모두 구사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묻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인이 중국인에게 요구한 역할은?
(답하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 정착한 중국인 이주자는 네덜란드나 스페인 상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고, 멕시코 은, 유럽과 서아시아산 물품, 동남아시아의 진귀한 물산(향신료 등)을 가지고 대륙으로 돌아가는 방식의 무역을 했다. 이를 위해 유럽인들은 유럽인이 장악한 도시와 도시에 공급되는 자원이 생산되는 현지 농촌에 중국인 이주자가 진출해 정착하길 원했다.
(묻다) 이주자가 현지 여성과 결혼을 통해 얻은 것은?
(답하다) 유럽인,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등은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무역을 행하면서 현지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현지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상업적 기회를 다양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중국인 남편을 둔 현지 여성은 외국인인 남편의 신분을 보장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직접 현지 사회와 남편 사이의 상업 협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고, 해외 교역과 같은 상업 분야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이후 그들 사이에 발생한 혼혈 그룹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았다.
(묻다) 중국인은 언제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나?
(답하다)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서 상거래를 한 시기는 당·송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 말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명 조정의 중앙권력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수천명 단위의 중국인이 상인을 중심으로 말라카, 바타비아, 마닐라 등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는 산업혁명 영향으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운영 방침을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진출하는 ‘무역’ 중심에서 내륙을 점령해 생산력을 늘리는 ‘착취’로 변경함에 따라 수만명 혹은 수십만명 단위의 중국인이 건너오게 된다.
(묻다) 뻐라나깐으로 대표되는 중국인 구이민자는?
(답하다) 대량 이민 이전, 중국 상인은 청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수가 동남아시아 땅에서 현지화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스페인의 식민정책 변화에 발맞추어 서구 제국이 조성한 플랜테이션 농장 및 광산을 대리 경영하거나 고리대금업을 동족인 중국인 혹은 원주민(말레이인 및 필리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면서 부를 쌓아서, 이들을 징세청부업자(Tax-farmer)라 부른다. 이 시기에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은 주로 푸젠성과 광둥성의 상인이다.
(묻다) 또똑이라 불리는 중국인 신이민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중국인들이 광산과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수만명 또는 수십만명 단위로 이주한다. 이들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또똑(Totok)이라 불렀고, 영국령 말레이와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 등지에서는 이들을 싱커(Singker)라고 불렀다. 또똑은 중국에서 출생한 사람들로 미처 현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묻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해양부 동남아시아에서 외국인 공동체 운영 방식은?
(답하다) 해양부 동남아시아는 유럽인이 진출하기 전부터 동서교역을 잇는 중요한 지역으로 해상교역이 활발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지역에 대규모 교역항이 설립됐다. 또한 다양한 지역에서 온 상인들은 천년이 넘는 매우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들만의 관행에 따라 교역을 했다. 각 항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인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머물다가 떠나기도 하고 정착하기도 하면서 외국인 공동체가 형성됐고, 이들은 각 공동체의 내부 규범에 따라 통제됐다. 예를 들어 이슬람 왕국이더라도 항구에서 교역하는 중국 상인, 힌두 상인, 불교 상인은 외부 활동은 이슬람 율법을 따라야 하지만, 각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각각의 내부적 관행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고, 이를 위해 각 공동체는 내부의 장을 뽑아서 운영했다.
(묻다) 까삐딴(kapitan) 시스템은?
(답하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급증한 신이민자를 통제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공동체의 대표인 까삐딴을 임명했다. 중국인 공동체의 경우는 무조건 그 그룹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가 까삐딴으로서 권력을 갖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까삐딴은 주로 뻐라나깐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뻐라나깐은 대부분이 일찍부터 정착하여 돈이 많고, 각종 언어에 능해 중개자로서 기능을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묻다) 구이민자와 신이민자의 관계
(답하다) 뻐라나깐으로 대표되는 구이민자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언어에 능숙하며 식민정책에 깊이 관여하여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이민자의 고용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신이민자의 경우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득권을 상징하는 뻐라나깐·구이민 그룹과 피고용인으로서 주로 중국인 공동체에서 빈곤계층을 이루어 있던 신이민자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골은 20세기 신해혁명과 중일전쟁, 공산주의 열풍 등의 격변을 거치며 충돌해, 말레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화교공동체 내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묻다) 뻐라나깐의 그늘은?
(답하다) 중국계 혼혈 즉 뻐라나깐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은 20세기 해양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여 건국하는 과정에서 보였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강력한 반화교·화인 정서의 근간이 됐다.
(묻다) 동남아시아 지역 항구도시들은 어떻게 건설됐나?
(답하다) 유럽에서 온 상인들이 항구에 도시를 건설하고 무역을 행했다. 유럽인들이 지배하던 대표적인 도시는 바타비아, 말라카, 마닐라 등이다. 향신료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각종 천연자원 및 경작물이 유럽과 아시아 각 지역에서 인기가 많았다. 이에 16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이후 18,19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앞서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들이 무역을 하고 있었고, 여기에 유럽인이 참여하면서 경쟁이 극심해졌다.
(묻다) 싱가포르에 유럽계 뻐라나깐들이 모여 살게 된 이유는?
(답하다)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유럽인(네덜란드와 영국)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유라시안(Eurasian)이라고 부르며,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유럽 국가가 동남아 진출한 이후 건너온 직원, 선원, 군인과 현지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은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다가, 19세기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에게 살기 편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면서, 싱가포르로 대거 모여든다. 이들은 혼혈로서 동남아 지역사회에 깊이 적응하고 있었지만, 주로 유럽 제국주의 식민정부 아래에서 생존해 온 그룹으로 친서구적 특성을 꾸준히 유지했다. 유라시아인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네덜란드가 형성한 연합군에 소속되어 인도네시아인과 전쟁을 벌였다. [데일리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