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김태정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허망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정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아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앞에 해우소를 두고서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구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얼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창비시선 237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남녘에는 동백꽃이 겨울을 밝히는 시간이 왔습니다. 동백이 피면, 그 붉은 꽃을 보면, 첫사랑의 아릿한 아픔처럼 기억되는 시인, 따스한 사람, 맑은 영혼, 그녀를 만납니다.
모두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조속히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Werner Thomas-Mifune의 ‘Jacqueline's Tears’입니다.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70년대 후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