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30)] 영웅들의 일무삭티(Ilmu Sak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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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30)] 영웅들의 일무삭티(Ilmu Sakti)

기사입력 2022.02.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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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png


무속1_드막 왕국 지도.png
자바섬 북쪽 회색 지역이 드막 왕국

 

 인도네시아에서는 근대까지도 현재의 국경선에 근접하는 규모의 통일왕국을 이룬 국가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광대한 영토를 일구었던 국가는 1293년부터 1527년 사이에 자바섬을 중심으로 번성해 말레이반도까지 영향력을 미친 마자빠힛 왕국이었습니다. 그 마자빠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에 밀려 몰락해 발리로 쫓겨난 후 중부자바 지역에 드막(Demak) 왕국과 빠장(Pajang) 왕국이 일어나고 마침내 스노빠티가 마타람 술탄국을 건국하는 16세기의 인도네시아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탈도 시작되면서 수많은 전란이 벌어지고 걸출한 영웅들도 등장합니다.


 당시 영웅들이나 그들의 스승으로 소개되는 인물들의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전략이나 무위를 떨친 군사령관이나 무술의 달인보다는 산을 옮기고 폭풍우를 부르는 도사의 아우라가 번득입니다. 심지어 스노빠티는 빠랑뜨리티스 해안에서 훗날 마타람의 수호신이 되는 자바섬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로로키둘(Nyi Rorokidul)과 조우하기도 하죠. 그래서 어찌 보면 마타람 왕국의 건국(1587년)과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의 시작(1602) 사이 어딘가에서 인도네시아가 신화시대에서 곧바로 근대로 건너 뛰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1) 


 아더 왕의 검 엑스칼리버나 관운장의 청룡언월도, 전편에서 소개했던 말라카 왕국 항뚜아 제독이 지녔던 따망사리, 뿌룽사리의 끄리스처럼 16세기 자바의 영웅들도 특별한 이름이 붙은 무기를 휘둘렀는데 그것은 단지 무기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군주들의 반지들처럼 주인의 전투력이나 방어력을 증폭시키는 신령한 힘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도 명검들의 전설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도술을 닦다가 별의 정기를 담은 검을 얻어 바위를 잘랐다는 사인검(사인참사검), 도검불침 용의 후손 우왕을 벨 때 이성계가 사용했다는 전어도, 이순신의 쌍룡검,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까마귀털로 만든 오우관을 쓰고서 하늘에서 내려올 때 차고 있었다는 용광검 같은 것들이죠. 실존했던 것과 전설로 치부되는 것들이 섞여 있지만 적어도 모두 칼 이상의 의미, 즉 거대한 도력이 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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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기에도 찔리면 죽을 것 같은 끄리스 끼야이 세딴 꼬베르 단검

 

 뚜반의 대장장이 장인 음뿌 수뽀 만드랑이(Mpu Supo Mandrangi)는 많은 끄리스 명검들을 만들었는데 깐젱 끼아이 셍껠랏(Kanjeng Kyai Sengkelat), 깐젱 끼야이 노고소스로(Kanjeng Kyai Nogososro), 끄리스 끼야이 세딴 꼬베르(Keris Kiai Setan Kober) 같은 이름난 끄리스들이 그의 작품이었고, 그중 상당수를 드막 왕국 고위 귀족 출신 높은 도력을 가진 이슬람 전파자 수난 꾸두스(Sunan Kudus)에게 납품했습니다. 수난 꾸두스는 주로 왕가의 자식들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고 그중 뛰어난 제자들에게 명검을 하나씩 선사하곤 했는데 세딴 꼬베르 단검은 오늘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아리야 뻐낭상에게 주어져 이후 그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됩니다. ‘무덤 속 악령의 끄리스’라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가진 이 단검은 그 안에 내재된 뜨거운 속성으로 그 주인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졌고 그래서 아리야 뻐낭상의 냉혹하고 잔인한 일면이 이 단검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장창 끼아이 쁠레레드는 중부자바 찔라짭(Cilacap) 인근 지명인 쁠레레드(Plered)라는 단어를 담고 있어 아마 그 지역의 신령한 도사가 사용하다가 끼 아긍 빠머나한의 손을 거쳐 권능왕 스노빠티의 손에 들려 전장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게 되죠.


 특히 15-16세기는 자바에 이슬람 술탄국들이 들어서던 시기로 이슬람 전파자 왈리송오(Wali Songo)로 알려진 여러 인물들이 실제 역사에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죠. 당시 이슬람의 새로운 바람이 불던 자바 땅에서 술탄들과 영웅들이 고대의 신령함 또는 저주가 깃든 무기를 들고 전장을 누비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사뭇 생경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조코 띵키르(Joko Tingk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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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코 띵키르는 빠장 왕국을 세우고 1549~1582년 기간 중 재위한 술탄 하디위자야(Sultan Hadiwijaya)의 청년 시절 이름입니다. 그는 원래 ‘마스 까레벳’(Mas Karèbèt)이란 이름이었으나 10살 되던 해 수난 꾸두스가 아버지 끼 아긍 뼁깅을 드막 왕국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처형하고 어머니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절친 끼 아긍 띵키르의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습니다. 그가 조코 띵키르라 불리게 된 건 그때부터의 일입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엔 드막 왕국에 대한 애증이 뒤섞여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조코 띵키르는 거기서 무술과 도술을 익혔습니다. 그는 끼 아긍 셀라(Ki Ageng Sela)와 아버지의 큰 형 끼 아긍 반유비루(Ki Ageng Banyubiru)에게서도 궁극의 일무삭티(Ilmu Sakti)를 사사받았는데 당시 함께 수학했던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 끼 빤자위(Ki Panjawi), 마스 만짜(Mas Manca), 마스 윌라(Mas Wila), 끼 우라길(Ki Wuragil) 등은 훗날 모두 빠장 왕국의 요직을 맡게 됩니다.


조코 띵키르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보였습니다. 단지 여색을 심하게 밝히는 바람에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려 요즘 같으면 미투로 패가망신할 각이었지만 당시는 동서양 불문하고 영웅호색이란 말을 자랑스럽게 떠들던 시절이었습니다.



드막 왕국

 조코 띵키르는 동료들과 함께 뗏목을 타고 드막 왕국의 도성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스렝엥게 강(Sungai Srengenge) 깊은 곳에서 악어 떼의 공격을 받지만 조코 띵키르는 악어 떼를 제압하고 오히려 악어 40마리를 부려 뗏목 앞뒤좌우를 호위하게 하는 진풍경을 이루며 도성에 입성합니다.

 

 드막에 도착한 조코 띵키르는 삼촌인 끼아이 간다무스타카(Kyai Gandamustaka)의 집에 묵었습니다. 그는 왕궁 안의 이슬람 사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조코 띵키르가 넋 놓고 연못가에 앉아 있을 때 술탄 뜨렝가나(Sultan Trenggana)가 그곳을 지나자 간다무스타카 삼촌이 급히 소리쳐 조코 띵키르에게 비키라고 했습니다. 술탄의 길을 막는 것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불경죄입니다. 게다가 조코 띵키르가 있던 곳은 폭이 좁아 비켜설 공간이 없었고 연못 반대편으로 건너뛰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무삭티의 경지에 올라 있던 조코 띵키르는 간단히 연못 반대편으로 날 듯 건너 뛰어 술탄 행렬에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 장면에 감명받은 술탄 뜨렝가나는 조코 띵키르에게 드막 군대의 높은 자리인 루라 위라탐타마(lurah wiratamtama)라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술탄 뜨렝가나에겐 쯤빠까(Cempaka)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코 띵키르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요.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아 그가 은밀히 쯤빠까 공주를 유혹해 관계를 맺은 것이 들통나 격분한 왕에게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조코 띵키르는 집념과 끈기의 사나이였습니다. 어느 날 술탄 뜨렝가나가 가족들과 함께 쁘라워토 산(Gunung Prawoto)에 나들이를 나왔을 때 조코 띵키르는 끄보 다누(Kebo Danu)라는 이름의 크고 사나운 물소 귀에 진흙을 잔뜩 채워 넣고서 왕이 쉬고 있는 곳에 풀어놓았습니다. 만사가 불편한 물소가 미친 듯 날뛰면서 왕의 호위병들을 들이받기 시작했죠. 술탄 일행이 곤경에 빠진 순간 조코 띵키르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간단히 물소의 숨을 끊었습니다. 이게 다 조코 띵키르가 꾸민 일이란 것을 꿈에도 몰랐던 술탄 뜨렝가나는 그를 크게 치하하며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여 복권시켰고 급기야 쯤빠까 공주와 정식으로 결혼시켜 부마로 삼았습니다.

 

아리야 뻐낭상 (Arya Penangsang)

 조코 띵키르는 이후 많은 공을 세워 아디빠티 하디위자야(Adipati Adiwijaya)라는 작위를 받고 빠장(Pajang)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546년 술탄 뜨렝가나가 세상을 떠나면서 드막 왕국엔 골육상쟁의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드막 왕국의 족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은 1505년 라셈(Lasem)에서 수로위요토 왕자(Pangeran Surowiyoto)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수로위요토 왕자는 당시 라덴 끼낀(Raden Kikin)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라야 뻐낭상은 자바 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에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잔인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명실공히 수난 꾸두스(Sunan Kudus)의 총애를 받은 제자였고 진실 수호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조코 띵키르의 아버지 끼 아긍 뼁깅을 처형한 것이 수난 꾸두스였으니 조코 띵끼르와 아리야 뻐낭상은 처음부터 악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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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막 왕국 족보

 

 

 라덴 빠따의 장남 빠띠 우누스는 1521년 말라카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공격하다가 전사해 왕권 경쟁은 수로위요토 왕자와 뜨렝가나 사이의 각축전으로 좁혀졌습니다. 그러자 뜨렝가나의 아들 라덴 묵민(Raden Mukmin)이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금요일 낯 기도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던 수로위요토 왕자를 라셈의 한 강변에서 살해합니다. 말하자면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정적들을 척살한 이방원 역할을 한 것이죠. 그렇게 살해된 수로위요토 왕자는 ‘강물 속에 스러진 꽃잎’이란 의미인 ‘스까르 스다 잉 르뻰 왕자’(Pangeran Sekar Seda ing Lepen)라는 아련한 감성이 담뿍 담긴 이름이 붙어 위 족보에 실리게 됩니다. 


 이때 라덴 묵민이 수로위요토 왕자를 죽일 때 사용한 것이 바로 끼아이 세딴 꼬베르(Kyai Setan Kober)란 이름의 끄리스 단검이었습니다. 원래 아리야 뻐낭상의 소유였던 이 단검이 이때 왜 라덴 묵민의 손에 들려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전투의 혼전 속에서 아리야 뻐낭상이 떨어뜨린 이 단검을 라덴 묵민이 집어들어 수로위요토 왕자를 찔렀을 것이라 보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아리야 뻐낭상은 세딴 꼬베르 단검을 늘 차고 다니며 그 손잡이를 쓰다듬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술탄 뜨렝가나가 1521년 드막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형인 빠띠 우누스의 유지를 받들어 포르투갈을 공격하다가 그 역시 1546년 시뚜본도(Situbondo)의 빠나루깐(Panarukan)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들 라덴 묵민이 드막 왕국의 네 번째 왕이 됩니다. 그가 수난 쁘라워토라고 불리게 된 것은 수도를 쁘라워토로 옮겼기 때문인데 1546~1549년 드막 왕국도 드막 쁘라워토(Demak Prawoto)라고도 불립니다. 

 

네임드 웨폰스(Named Weapons)

 하지만 수난 쁘라워토의 치세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1549년 아리야 뻐낭상이 랑꿋(Rangkud)이란 자객에게 그 한맺힌 끼아이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을 들려 보내 수난 쁘라워토를 죽이고 자신이 드막 왕국의 다섯 번째 술탄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수난 쁘라워토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하지만 그 대신 자신의 단검을 보내 원수의 심장을 꿰뚫은 것은 그의 깊은 원한을 투영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아리야 뻐낭상의 아버지 수로위요토 왕자와 그를 죽인 수난 쁘라워토, 두 사람 모두 끄리스 끼아이 세딴 꼬베르(Keris Kiai Setan Kober)라는 한 개의 단검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 단검은 다시 우여곡절을 거쳐 아리야 뻐낭상에게 돌아옵니다.


 그는 왕국의 수도를 자신의 원래 영지인 지빵으로 옮겼으므로 1549-1554년 시기의 드막 왕국은 드막 지빵이라 불렸습니다.


 아리야 뻐낭상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척결했는데 그 중엔 즈빠라의 영주 빵에란 하디리(Pangeran Hadiri)도 있었습니다. 그는 수난 쁘라워토의 누이 라뚜 깔리냐맛(Ratu Kalinyamat)의 남편이었죠. 아리야 뻐낭상은 조코 띵키르마저 죽이려고 빠장에 자객들을 보냈으나 조코 띵키르가 자객들을 회유, 전향시켜 후한 선물까지 내리면서 오히려 아리야 뻐낭상에게 굴욕감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조코 띵키르는 아리야 뻐낭상에게 직접 손을 쓰는 것을 꺼렸습니다. 아리야 뻐낭상은 드막 왕가의 일원이기 이전에 수난 꾸두스의 직계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수난 꾸두스는 아버지를 처형한 수난 꾸두스가 조코 띵키르에겐 불구대천지 원수였지만 지금도 인도네시아 이슬람 전파에 크게 기여한 아홉 명의 포교자 왈리 송오(Wali Songo)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만일 그의 제자 아리야 뻐낭상을 직접 건드리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사람들은 오직 조코 띵키르만이 무술과 도력에서 아리야 뻐낭상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평정할 큰 잠재력의 용사가 다음 세대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조코 띵키르는 연통을 돌려 아리야 빠낭상을 죽이면 빠띠(Pati)와 먼따옥(Mentaok)/마타람(Mataram)의 영지를 상으로 주겠다고 공지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아리야 뻐낭상을 제거하려 한 것이죠. 이에 응한 사람들 중에는 조코 띵키르의 스승인 끼 아긍 셀라의 손자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과 끼 빤자위가 있었습니다. 


 빠장 군대가 지빵의 꼬타라자(Kotaraja – 도성)에 쳐들어 간 것은 아리아 뻐낭상이 40일간의 금식을 막 마치던 때였습니다. 그는 빠마나한과 빤자위가 자신의 마구간지기를 납치해 귀를 자른 후 그의 손에 도전장을 들려 보낸 것에 격분해 동생 아리야 마타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각 리망(Gagak Rimang)이라는 명마를 타고 전장 한복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빠장 군대를 휘몰아쳐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아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 강을 건너 쇄도하다가 빠장 군대의 장수 수타위자야와 격돌합니다. 


 수타위자야는 끼 아긍 뻐마나한의 아들로 훗날 마타람 술탄국의 시조가 되는 스노빠티의 청년 시절 이름입니다. 그는 당시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창 똠박 끼아이 쁠레레드(Tombak Kiai Plered)를 휘두르며 놀라운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가 휘두른 창이 아리야 뻐낭상의 배를 찢은 것입니다.


 가히 치명적인 부상이었지만 삭티 도술을 익힌 아리야 뻐낭상은 흘러내린 창자를 쓸어 모아 자신의 허리에 찬 예의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 손잡이에 칭칭 감고서 더욱 무섭게 상대를 공격해 마침내 수타위자야를 궁지에 몰아붙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단검 손잡이에 자기 창자를 감아 놓았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타위자야의 숨을 끊으려고 끄리스 단검을 세차게 뽑아드는 순간 거기 감긴 창자가 끊어지면서 아리야 뻐낭상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세딴 꼬베르 단검이 주인인 아리야 뻐낭상의 목숨마저 삼켜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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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 뻐낭상의 배를 찢는 수타위자야(왼쪽), 끄리스를 뽑다가 절명하는 아리야 뻐낭상(오른쪽)

 


 조코 띵키르의 수학동문 끼 주루 마르타니는 수타위자야의 고문으로 당시 전투를 참관했는데 쁠레레드 장창에 찢겨 쏟아져 내린 창자를 단검 손잡이에 감고 싸우는 아리야 뻐낭상의 강인하고 의연한 모습에, 비록 그가 적이었지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아들들이 결혼할 때면 사슬매듭이나 자스민꽃 묶음을 허리에 두른 후 그 끝을 신랑의 허리춤 끄리스 단검 손잡이에 묶어 당시 흘러나온 창자를 안고서도 전장에서 기염을 토하던 아리야 뻐낭상을 기념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지빵의 재상 끼 마타훈(Ki Matahun)도 전사했고 오직 아리아 뻐낭상의 동생 아리야 마타람과 그의 아내만이 멀리 수마트라의 빨렘방으로 도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리야 뻐낭상을 무찌른 조코 띵키르는 1549년 왕국의 수도를 빠장으로 옮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시점부터 드막 왕국은 빠장 왕국이라 불리게 됩니다. 조코 띵키르는 빠장 왕국의 첫 번째 왕 술탄 하디위자야(Hadiwijaya)가 됩니다. 


 아리야 뻐낭상과의 결투에서 수타위자야가 휘두른 장창 똠박 깐젱 끼아이 쁠레레드(Tombak Kanjeng Kiai Plered)는 아직도 남아 족자 술탄국 깊은 유물창고 어딘가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이 창의 이름을 따, 마타람의 후신 까르타수라 수난국(Kesunan Kartasura)의 끄라똔(Kraton) 중에 끄라똔 쁠레레드(Keraton Plered)라 이름붙은 곳도 있었습니다.


 사실 16세기에 사용되었던 이러한 무기들은 따밍사리와 꾸룽사리의 끄리스 같은 이전 세대의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어느 시점에 대부분 유실되어 사라져버렸지만 지금도 끼아이 세딴 꼬베르나 똠박 끼아이 쁠레레드라고 이름붙은 끄리스 단검과 3미터 짜리 장창들을 온-오프라인에서 두꾼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거기 담긴 도력은 아리야 뻐낭상이나 수타위자야가 휘둘렀던 원래의 물건들과는 비교할 바 못되지만요. (끝)

 

주(1) 실제로는 역사기록이 남기 시작한 7세기 스리위자야 왕국 시점에서 인도네시아 역사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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