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시대를 앞서간 여성 ‘까르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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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여성 ‘까르띠니’

기사입력 2022.04.1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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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니

 

4월 21일은 ‘까르띠니의 날’(Hari Kartini). 매년 이날에는 인도네시아 전역의 학교와 기관에서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교육운동가인 까르띠니(Raden Adjeng Kartini)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은 까르띠니를 국가독립영웅으로 추대하고, 까르띠니의 생일을 국경일로 확정했다. 

   

까르띠니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인 1879년 4월 21일 중부자바 북쪽의 즈빠라(Jepara)에서 태어났다. 당시 수마트라 북부 아쩨 지역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맞서 아쩨 독립전쟁(Perang Aceh)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민족이란 개념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까르띠니의 아버지 소스로닝그랏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서 귀족 계층인 쁘리야이(priyai)라고 불리는 행정관료로 즈빠라 군수(bupati)였다. 유복하게 성장한 까르띠니는 쁘리야이 출신에게만 입학이 허용된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설립한 초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서구 사상을 접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까르띠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자바 귀족의 전통에 따라 12살 이후 결혼 전까지 집에서 격리생활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어가 유창했던 까르띠니는 격리생활을 하면서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읽고 네덜란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식민정부에서 윤리정책 책임자 아벤다논(J.H. Abendanon) 등 네덜란드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까르띠니는 조요디닝그랏 중부자바 렘방 군수의 정실부인이 아닌 4번째 부인으로 청혼이 들어왔고 결사 반대했으나 결국 결혼한다. 결혼 후 진보 성향의 남편의 후원으로 여학교 설립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25살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요절한다. 

 

까르띠니 사후에 친자매와 네덜란드인들의 후원으로 1911년 까르띠니의 편지들을 정리해 발간한 서한집 ‘어둠에서 빛으로(Out of Darkness to Light)’로가 발간되고, 까르띠니재단이 설립돼 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까르띠니는 인도네시아 여성 선구자로 다시 태어난다.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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