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42)] 나가 바루끌린팅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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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42)] 나가 바루끌린팅 전설

기사입력 2022.07.2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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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사이 도입.png

 

 지난 라라먼둣 에피소드에서 술탄 아궁의 측근 끼 나야다르마가 스페인 갑옷을 입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를 쓰러뜨릴 때 사용한 똠박 바루끌린팅(Tombak Baru Klintin), 즉 ‘바루끌린팅 창’ 기원에 대한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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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1.png


 아주 오래 전 옛날에 드망 망이란(Demang Mangiran) 마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남자를 접한 적 없는 처녀가 임신해 아홉 달 하고도 하루 만에 어른 팔뚝 만한 뱀 한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그 처녀는 미을 촌장 끼 다망 딸리왕사(Ki Damang Taliwangsa)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딸이 뱀을 낳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마을 사람들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기를 갖다 버리라고 명했죠. 딸도 아버지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뱀으로 태어난 아기는 벌써부터 사람 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릴 것을 안 아기는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왜 날 버리려 해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아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어머니는 아기를 버리겠다는 마음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오히려 모든 것을 바쳐 아기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뱀 아기를 다른 인간 아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키웠고 마을사람들이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공공연히 내뱉는 험한 말들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끼 다망 딸리왕사도 결국 딸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아버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딸은 마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기를 집 안에서만 키웠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몸집이 엄청나게 커져 집을 온통 칭칭 휘감을 정도가 되었지만 뱀 스스로도 어머니의 말에 순종해 집 담장을 절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던 뱀이 어머니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이미 집채만큼 자란 큰 뱀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나가 바루끌린팅(Naga Baru Klinting)은 어떠니?” 

 나가(Naga)란 용이란 뜻이죠. 끌린띵(Klinting)은 ‘울리는 종’이란 뜻입니다. 아들은 그 이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자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어머니는 맑은 종소리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루끌린팅의 아버지

 한편 바루끌린팅은 다 자랄 때까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내 아빠는 누구에요? 아빠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아들에게 끼 다망 딸리왕사가 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루끌린팅은 끼 다망 딸리왕사가 어머니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란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루끌린팅이 계속 아버지에 대해 물었으므로 어머니는 결국 입을 열었습니다.

 “네가 채근하니 오래 전 일을 말해 주마.”


 바루끌린팅이 태어나기 전 드망 망이란 마을에 대대적인 정화의식이 있었고 그녀는 촌장의 딸로서 의식준비를 도왔습니다. 그때 촌장은 높은 도력을 가진 친구 끼 와나바야(Ki Wanabaya)를 찾아가 정화의식에 사용할 성유물을 며칠간 빌려오라고 딸에게 시켰습니다. 끼 와나바야는 온갖 신비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강력한 정화능력이 깃든 성유물 끄리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끼 와나바야가 그 성유물을 흔쾌히 내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 힘이 깃든 끄리스를 끼 다망 딸리왕사의 딸이 도중에 잃어버리거나 강도를 만나 뺏길까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성유물에 깃든 신비로운 힘이 생각지도 않은 더 큰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있었습니다. 끼 와나바야는 친구의 딸을 찬찬히 살펴보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의외로 순순히 끄리스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끄리스를 쥐어주면서 단검을 아무 데나 함부로 놓지 않고 특히 무릎 위에는 절대로 올려놓지 말라고 그녀에게 당부했습니다.


바루끌린띵 조형물.png
응에벨 뽀노로고 호수(Telaga Ngebel Ponorogo)에 만들어진 바루끌린팅 조형물

 

 

 그녀가 그렇게 끄리스 단검을 받아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왔는데 집 부엌에 온동네 처녀들과 아낙들이 모여 음식을 하느라 왁자지껄한 탓에 그들과 어울리다가 끄리스를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아무 생각 없이 끄리스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끄리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끼 와나바야가 경계하며 당부했던 이야기가 그제야 기억났기 때문이었어요.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성유물 끄리스를 잃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나 끼 와나바야가 알면 크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녀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고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온몸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끼 다망 딸리왕사가 깜짝 놀라 달려왔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몰려드는 난리법석이 벌어졌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딸이 어렵사리 자초지종을 말하자 아버지는 지체없이 끼 와나바야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드망 망이란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끼 와나바야가 도착하자 딸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가누기 어려운 몸을 일으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끼 와나바야는 한숨을 내쉴 뿐 딱히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아버지 끼 다망 딸리왕사를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이미 경계했지만 결국 벌어지고 만 이 일을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 그저 감수할 수밖에 없어. 내가 분명히 사전에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네 딸이 부주의하게 그 끄리스를 무릎 위에 놓았던 거야. 사라진 끄리스는 곧바로 자네 딸 자궁 속으로 들어갔네. 자네 딸이 처녀란 것을 알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닐세. 임신이 된 거야.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마을 사람들이 자네 딸을 손가락질하게 될 텐데 어쩌면 좋은가?” 


 그 말에 끼 다망 딸리왕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궁리하던 끼 와나바야는 자신이 남편이 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자신이 그 아기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곧바로 머라삐 산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는 끼 다망 딸리왕사 딸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끼 다망 딸리왕사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끼 와나바야의 말대로 한다면 최소한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터였습니다. 더욱이 끼 와나바야가 나이가 많지만 이름난 도인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고 간단한 혼인식도 가졌습니다. 그런 후 끼 와나바야는 머라삐 산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게 순조로웠어야 했는데 그녀가 뱀 형상을 한 바루끌린팅을 낳은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세상 밖으로 

 거기까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바루끌린팅은 자신의 아버지, 즉 끼 와나바야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머라삐 산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깊이 정든 자신의 아이가 이제 멀리 떠나려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집요하게 물었으므로 어머니는 결국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머라삐 산이란다.”

 어머니는 바루끌린팅의 거대한 머리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그날 밤 곧장 드망 망이란을 떠나 쁘로고 강(Kali Progo)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머라삐 산 중턱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운 장벽이 세워져 있기라도 한듯 바루끌린팅이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루끌린팅은 쁘로고 강변에 머무는 동안 몸집이 더욱 커져 이제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였고 안광도 무서울 정도로 형형했습니다. 그가 쁘로고 강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 그곳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았습니다. 바루끌린팅은 늘 그곳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되도록 조심해서 움직였지만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사람들에게 바루끌린팅은 어느날 외지에서 들어온 마물이자 재앙일 뿐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머라삐 산 정상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끼 와나바야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큰 뱀을 쫓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명상을 멈추고 머라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 끼 와나바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끼 와나바야는 자신과 큰 뱀의 관계를 아직 몰랐고 바루끌린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끼 와나바야에게 자신이 왜 이 지역에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그제서야 끼 와나바야는 바루끌린팅이 친구 딸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성유물 끄리스가 뱀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는 바루끌린팅에게 머라피 산 꼭대기에 그의 아버지가 명상에 잠겨 있는데 머리삐 산을 뱀의 몸으로 통째로 둘러 감싸 안으면 자연히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곧바로 머라삐 산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았는데 조금 길이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바뚜끌린팅은 혀를 쭉 내밀어 꼬리에 대면서 머라삐 산을 감싸는 미션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끼 와나바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끄리스 단검을 꺼내들어 뱀의 혀를 잘라버렸습니다. 혀가 급소란 것은 바루끌린팅 자신도 모르던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끼 와나바야만이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바루끈린띵와 아버지.png


 혀를 잘린 바루끌린팅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마치 마른 낙엽이 부서지듯 온몸이 순식간에 바스러지며 그 거대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단지 땅에 떨어진 바루끌린팅의 혀만 남아 한 자루 창으로 변했는데 그것을 후세 사람들이 똠박 바루끌린팅(Tombak Baru Klinting) 또는 끼아 바루끌린팅(Kia Baru Klinting)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래, 창이라면 더 이상 여인들 무릎 위에 놓이는 일이 없겠지.”

끼 와나바야는 그 창을 집어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고대의 비술을 체득해 영원을 사는 끼 와나바야가 큰 뱀의 혀를 자른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드망 망이란 마을 끼 다망 딸리왕사의 딸이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성유물 끄리스도 예전 어떤 거대한 뱀의 혀를 잘라 만든 것이었으니까요. 


 그의 손안에서 똠박 바루끌린팅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화를 내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바루끌린팅의 혼이 거기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 큰 한을 품고 더 크게 울부짖으렴. 마치 귀여운 작은 종이 귓전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감미롭구나.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땅의 영웅들 피를 너에게 먹여주마. 영웅들의 피를 뒤집어쓴 용의 혼을 그 누구도 당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럼 너도 좀 더 제대로 된 멋진 종소리를 내게 될 것이야.” 끼 와나바야는 껄걸 웃음을 터트리며 그 창을 어깨에 걸치고 머리피산의 비탈길을 올랐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똠박 바루끌린팅은 끼 아긍 뻐마나한이 갖게 되었고 다시 그 아들이자 마타람 왕국의 시조인 스노빠티를 거쳐 그 손자인 술탄 아궁의 손에 들어가면서 라라먼둣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에 투입되어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마시게 됩니다.


바루끌리띵 크리스.png
똠박 바루끌린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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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끼 와나바야에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하는 바루끌린팅의 이야기는 인간이, 그것도 거룩한 도인이 뱀보다 더 짐승 같은 마음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거의 신선이 되어버린 끼 와나바야에게 있어 바루끌린팅의 꿈과 희망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고 바루끌린팅의 삶 전체는 단지 성유물 끄리스가 큰 뱀의 모습을 거쳐 성유물 창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선의를 끌어모아 어머니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 바루끌린팅의 진심과 노력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바루끌린팅 전설은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거대한 용으로 성장해 가는 바루끌린팅에게서 폭력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버전에서는 그가 뗄로모요 산(di Gunung Telomoyo)의 한 동굴 속에 은거하는 아버지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Ki Hajar Salokantara)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증표로서 어머니가 준 종이 달린 목걸이를 보여주어도 아버지는 그가 자기 아들이란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뱀의 말을 믿은 사람은 에덴동산의 이브 밖엔 없습니다.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바루끌린팅에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이들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은 뗄로모요 산을 둘러 감싸고서 1년 동안 꼼짝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 미션을 성공하면 1년 후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는 뗄로모요 산을 감싼 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먼지와 낙엽이 무수히 쌓이면서 바루끌린팅은 점점 산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루끌리띵과 뿌뜨라자야.jpg


 그해 산 아래 마을에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풀과 나물을 캐고 사냥을 하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거대한 뱀이 산을 감싸고 똬리를 틀고서 아무리 건드리거나 상처를 내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뱀이 죽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칼로 마음껏 뱀의 살을 발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마을로 가지고 돌아간 뱀고기로 배를 잔뜩 채운 사람들은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산에 올라와 뱀의 살을 발라 가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뱀은 앙상한 뼈만 남은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흉년을 났습니다.


 1년 만에 동굴에서 나온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그렇게 백골이 되어 있는 바루끌린팅을 보고 흠칫 놀랐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그는 마을사람들이 자기 살점을 베어가는 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여기 왜 뱀 시체가 있지?”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루끌린팅에게 산을 감싸고 1년간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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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루끌린팅 전설의 수많은 버전들이 모두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부자바 라와 쁘닝(Rawa Pening)이란 늪지의 전설에도 바루끌린팅이 뗄로모요 산을 휘감습니다. 산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이 버전에서 바루끌린팅은 산을 감싸는 데에 성공하고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아버지도 끼 와나바야가 아니라 끼 하자르입니다. 


 끼 하자르는 바루끌린팅에게 똬리를 풀고 뚜구르 언덕(Bukit Tugur)이란 곳의 동굴에 들어가 명상을 하라 명하는데 오랜 명상을 마친 바루끌린팅은 인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전설이 여기서 끝났으면 딱 좋은데 곧바로 빠똑(Pathok) 마을의 잔치 이야기가 후속편처럼 이어집니다. 빠똑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위해 산과 들에서 음식들을 가져왔는데 산에 간 사람들 중엔 동굴 속에서 명상에 잠긴 큰 뱀이 꼼짝도 안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살을 잘라와 잔치음식으로 제공합니다. 바루끌린팅이 아직 명상을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죠. 무아지경의 명상 속에서 바루끌린팅은 살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도 비명 한 마디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시작된 잔치의 흥청거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몸에 상처를 입은 한 소년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바루끌린팅이 인간으로 변한 모습이었어요. 그의 상처는 사람들이 살을 잘라가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잔치음식이 넘쳐나는데도 음식을 나눠주거나 상처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남루한 옷차림에 역한 냄새를 풍기는 바루끌린팅을 거지처럼 업신여기며 내쫓았습니다. 니라뚱(Nyi Latung)이라는 늙은 과부만이 바루끌린팅을 불쌍히 여겨 마을 어귀 산비탈 높은 곳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주고 간호했습니다.


 기운을 차린 바루끌린팅은 니라뚱에게 얼마간 먹을 음식을 준비해 뒷산 더 높은 곳에 가 있으라고 당부한 후 자신은 큰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다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잔치가 한창인 마을 한 가운데에 그는 나뭇가지를 바닥에 깊이 박아 놓고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마을의 그 누구도 땅에 박힌 그 나뭇가지를 뽑을 수 없을 것이라고요. 


 사람들과 마차가 지나야 하는 마을 큰 길 한 가운데에 나뭇가지를 박아넣은 바루끌린팅에게 핀잔을 주면서 소년이 박은 것을 어른들이 빼지 못할 리 없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마을사람들이 앞다투어 나뭇가지를 뽑으려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끝까지 보고 있던 바루끌린팅이 의아해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돌아와 나뭇가지에 손을 댔습니다.

 “여러분들 중 뱀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사람들은 신의 가호를 받을 것이오. “ 

 아무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그의 손에 간단히 뽑혔고 그것이 박혀 있던 구멍에서 물이 세차게 솟아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당황했습니다. 물이 너무 빨리 차오르며 마을이 잠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허둥지둥 높은 곳을 찾아 달아났지만 순식간에 늘어난 물길에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마을사람들 중 바루끌린팅의 살을 먹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루끌린띵이 뒷산 높은 곳에 피해있던 니라뚱을 다시 만났을 때 마을은 이미 큰 호수로 변한 후였습니다. 그 호수가 오늘날 라와쁘닝(Rawa Pening)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잠시 인간의 모습을 했던 바루끌린팅은 인간세상에 환멸을 느껴 다시 큰 뱀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라와쁘닝의 물 속에 살며 그 호수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라와쁘닝.jpg
라와쁘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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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버전 속 끼 와나바야가 바루끌린팅의 혀를 잘라 얻은 저 똠박 바뚜끌린팅 창이 족자 술탄국이나 수라카르타(솔로) 수난국 보물창고 속에서 마타람의 역사를 머금은 다른 유물들 사이에 함께 보관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라와쁘닝 호수 전설에 나타난 소년은 바루끌린띵일 리 없죠. 


 지팡이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 호수를 이루었다는 아류의 전설들이 많은데 가룻 군 바유레스미의 시뚜 바건딧(Situ Bagendit) 호수도 거지도인의 지팡이를 뽑은 구멍에서 솟아난 물로 마을이 잠겨 호수가 되었다는 생성고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와쁘닝의 경우 그 전설을 만든 사람들이 아마도 바루끌린팅의 유명세를 빌려쓰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바루끌린팅 전설은 무심한 도인 끼 와나바야에게 혀를 잘려 죽을 때까지 가장 선하게 살아온 큰 뱀의 안타까운 삶과 그렇게 탄생한 성유물 바루끌린팅 창이 16-17세기 중부자바의 전장에서 쁘라골로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과 전사들의 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원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설과 민화 속엔 큰 뱀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바루끌린팅은 그들 중 단연 가장 훌륭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도, 못지 않은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인도네시아 전설 속 착한 뱀들을 좀 더 찾아가 볼까 합니다. (끝)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번역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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