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 (45)] 일곱 머리를 가진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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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45)] 일곱 머리를 가진 뱀

기사입력 2022.09.0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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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도입.png

 

  옛날옛적 남부 수마트라 벙꿀루(Bengkulu) 지역의 한 섬에 꾸테이루캄 왕국(Kerajaan Kutei Rukam)이 있었습니다. 그곳 비까우 버르마노(Bikau Bermano) 왕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전설엔 많은 수의 형제자매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제대로 소개되는 것은 역시 장남이나 막내 한두 명뿐이라 등장인물 운용의 가성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남이자 꾸테루이캄 왕국의 태자 가자머람(Gajah Meram) 왕자가 수까느거리 왕국(Kerajaan Suka Negeri)에서 온 뿌뜨리 징가이(Putri Jinggai) 공주와 혼인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혼례는 전통과 관례에 따라 왕궁에서 시작해 뗴스 호수(Danau Tes) 변으로 장소를 옮겨 집전되었고 왕실과 신료들은 물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축하했습니다. 


  혼례 막바지엔 가자머람 왕자와 뿌뜨리 징가이 공주가 함께 호수에 온몸을 담갔다가 나오는 아껫(Aket) 의식이 있었는데 물 속에 들어간 두 사람이 수면으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탄식과 웅성거림 속에 왕실 수비대가 급히 움직여 떼스 호수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일부는 물 속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했지만 가자머람과 뿌뜨리 징가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떼스호수.png
벙꿀루 소재 떼스 호수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가자머람 왕자와 뿌뜨리 징가이 공주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왕실 경비대장이 황망하여 그렇게 보고하자 비까우 버르마노 왕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순식간에, 그것도 가장 행복해야 할 혼인식 날, 태자와 태자비를 동시에 잃은 비까우 버르마노 왕의 번민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의 수염이 그 자리에서 온통 하얗게 새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총리대신! 신료들과 백성들을 궁 앞에 불러 모으시오!”

왕은 그렇게 불러 모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너희 중 태자와 태자비가 물에서 나온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하지만 왕이 애타게 원하는 대답을 해줄 백성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자 수까느거리 왕국을 대표해 참석한 나이 많은 뚠 뚜아이(Tun Tuai) 재상이 입을 열었습니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혹시 떼스 호수 바닥에 도술을 부리는 대왕뱀 무리들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까?”

그 말에 사람들은 더욱 술렁거렸습니다.

“머리 일곱 달린 용의 전설 말이죠?”

“호수 바닥에 가뿌라(Gapura)가 서 있는 뱀들의 마을이 있다는 옛날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뚠 뚜아이 재상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반응한 사람들은 절대 몰라야 하는 비밀을 깨우치고 만 것 같은 놀란 표정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 놈들 짓이야’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습니다.


“뱀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이미 100년이 되었으나 그 사이 더욱 높은 도력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떼스 호수의 대왕뱀 이야기는 저희 수까느거리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새벽 어스름의 안개 속이나 몰아치는 폭풍 속에 숨어 수면에 올라와 인간들을 살피며 물 밑으로 잡아갈 희생자를 고른다고 합니다. 대왕뱀은 도력이 뛰어난 영물입니다. 폐하! 그 동안도 떼스 호수 어부들이 종종 실종된 것도 필시 영악하고 잔인한 대왕뱀들이 잡아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뚠 뚜아이의 말에 왕은 더욱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대왕뱀들이 태자와 태자비를 잡아갔다는 말이요?”

“아까 태자마마와 태자비 마마가 사라질 때 호수 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습니다. 이토록 찾아도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는 대왕뱀의 소행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가자머람 왕자와 뿌뜨리 징가이 공주를 잡아간 대왕뱀들은 도술을 익혔으니 일국의 태자를 함부로 해하여서는 안된다는 인간의 법도도 모를 리 없을 터입니다. 아직 구해낼 여지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뚠 뚜아이의 목소리는 비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면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소? 당장이라도 태자와 태자비를 구하러 가야 하지 않소?” 왕은 뚠 뚜아이의 말에 격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폐하, 숨도 쉴 수 없는 호수 밑바닥에서 어떻게 두 사람을 구해낸단 말입니까?” 장교 중 한 명이 그렇게 물었습니다. 숨쉬긴커녕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물 속에서, 그곳에서 나고 자란 거대한 뱀들, 그것도 도력을 익혀 인간들을 아득히 초월한 거대한 신수(神獸)들과 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뚠 뚜아이의 말에 사람들이 호수 밑바닥 대왕뱀을 대적하긴커녕 물가에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왕뱀1.png


그때 막내아들 가자머릭(Gajah Merik) 왕자가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아버님, 제가 가서 형님과 태자비 마마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놀라 할 말을 잃었습니다. 가자머릭 왕자는 이제 막 13살이 된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한국의 14세 미만 촉법소년들은 무모한 잔혹함과 밑도 끝도 없는 이기심으로 어른들의 세상에 도전하지만 고대 인도네시아의 13세 소년은 그냥 어린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왕자의 그런 패기가 왕으로서는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정말 대왕뱀을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부왕의 질문에 가자머릭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아버님, 거뜬히 이길 것입니다.”. 

“아들아, 네 용기는 가상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네 형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과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아버님!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10살 때부터 꿈 속에 나타난 한 할아버지로부터 줄곧 무술과 도술을 배워왔습니다. 그것이 다 오늘 이 일을 대비한 것이었나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자머릭 왕자의 말을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워했습니다. 왕은 막내아들을 믿고 싶었지만 그 역시 막내가 꿈 속에서 배웠다는 도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형들 중엔 부왕이 귀여운 막내아들을 절대 사지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 믿고 가자머릭이 이 기회에 점수를 따려 거짓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썩은 풀뿌리라도 붙잡아야 했던 왕은 결국 막내아들의 자신감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잘 알았다. 네가 태자와 태자비를 구해 오거라. 하지만 조건이 있다. 우선 내일 아침 반다르 아궁(Bandar Agung)에 가서 선조들의 성유물 끄리스를 먼저 얻어야 한다. 성유물의 신령한 힘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것이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 만일 가자머릭이 정말 태자 부부를 구해올 능력이 있고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거라면 반다르 아궁에 잠든 왕실 선조들의 혼령들도 반드시 그를 도울 터였습니다. 왕의 말에 가자머릭은 크게 고개를 숙이며 왕명을 받았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다음날 가자머릭 왕자는 떼삐 호수 가까운 머람붕 마을과 바뚜 꾸닝 사이의 반다르 아궁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곳은 선왕들의 무덤이 있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령한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가자머릭 왕자는 그곳이 자신이 꿈속에서 수련을 받던 곳과 너무나 흡사해 낯이 익었습니다. 그가 매일 밤 꿈 속에서 이곳을 찾아온 거라면 그에게 도술을 가르치던 도인은 이곳에 묻힌 선조 중 한 사람일 터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명상에 들어 7일 밤낮으로 선조들의 혼령을 만났습니다. 물속으로 끌려들어간 형님과 태자비 때문에 마음이 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익사했을 시간이지만 도술을 부리는 대왕뱀들이 신비로운 방법으로 잡아간 만큼 오히려 물 속 어딘가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급하다고 준비도 없이 물 속에 뛰어들 수는 없었습니다. 대왕뱀들을 제압할 대책이 있어야만 태자 부부를 구해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일곱째 날 명상 속에서 자신을 둘러 싼 선조들의 혼령으로부터 한 자루의 끄리스 단검과 한 폭의 슬렌당(여성의 몸에 두르는 스카프 용도의 천)을 얻었습니다. 명상에서 깨어나 보니 정말 끄리스와 슬렌당이 그의 두 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끄리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만으로 물 속에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내는 신비한 힘이 있었고 부드러운 슬렌당은 주인의 명에 따라 한 자루의 날카로운 장검으로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가자머릭이 성유물들을 가지고 궁전에 돌아오자 꾸테이루깜 왕국와 수까느거리 왕국의 병사들이 도열해 그를 맞았습니다. 이미 많은 시간을 소비해 마음이 급한 가자머릭은 부왕을 알현하지도 않고 곧바로 아이르 끄따후안 강(Sungai Air Ketahuan)을 타고 떼스 호수로 향했습니다.

그가 물 속으로 들어가며 끄리스 단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지자 물 속에 길이 생겨 그는 마치 지상을 걷듯 물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은 단 한 방울도 그의 몸을 적시지 않았습니다.


호수 가장 밑바닥에서 대왕뱀들의 보금자리가 보였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이 옛날이야기로 들었던 가뿌라가 세워진 뱀들의 나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동굴들 입구가 있는 물속 계곡에 인간이라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인간 마을의 것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가뿌라(GAPURA)가 세워져 있어 그곳이 대왕뱀들 사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가자머릭이 가뿌라에 다가가자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뿌라.jpg
여러 형태의 가뿌라(Gapura)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용감하구나. 하지만 더 이상은 가지 못한다!” 

뱀은 이렇게 말하며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가자머릭은 겁먹지 않았습니다.

“난 가자머릭이다. 내 형님과 태자비 마마를 모셔가려 왔다!”

“아, 네가 그 겁쟁이들의 동생이구나. 용기가 가상하지만 넌 이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

더 이상 대화가 의미 없다고 생각한 가자머릭은 걸치고 있던 슬렌당을 풀어 손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슬렌당이 시퍼런 장검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그 검으로 뱀과 결투를 벌였습니다. 초반엔 뱀이 일견 우세해 보였지만 막판에 마구 밀어붙인 가자머릭이 결국 뱀을 두 동강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후 가자머릭은 호수 밑바닥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관문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매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또 다른 거대한 뱀이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치열한 싸움이 반복되었지만 가자머릭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뱀들을 차례차례 물리치며 전진했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째 관문을 열었을 때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하하! 인간 아이가 여기까지 오다니 내가 널 잡으러 갈 수고를 덜었구나! 대단한 도력이 느껴지는데 널 잡아먹으면 내가 당장 승천하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가자머릭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명색이 대왕뱀이란 놈이 뭐가 무서워 숨어있는 거냐? 말싸움을 하자는 것이냐? 당장 모습을 보여라!” 

그러자 대왕뱀은 기분이 상한 듯 쉿~ 소리를 냈습니다. 물 속에서 초록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대왕뱀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관문의 대왕뱀들보다 몇 배는 될 거대한 덩치를 보니 이 해저 어드벤쳐의 보스몹이 틀림없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놀랍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이란 족속은 감히 내 궁전에 발을 들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그렇게나 내 먹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냐?” 대왕뱀이 물었습니다.

“내 형님과 형수를 돌려다오! 순순히 말을 들으면 독니 한 쪽 부러지고 비늘 몇 개 벗겨지는 정도로 끝내 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가 궁전이라 말하는 이 뱀소굴을 완전히 박살내 주마!” 가자머릭은 오히려 대왕뱀을 위협했습니다.

“하하하! 그래 좋다. 내가 말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킬 능력이 있다면 네 형과 그 부인을 돌려주마!” 착각인지 몰라도 대왕뱀은 왠지 가자머릭이 마음에 든 듯했습니다. 

“좋아! 조건을 말해 봐!”

“첫 번째! 네가 이미 죽인 내 부하 뱀들을 다시 살려내 봐! 못하겠지?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두 번째 조건은 나를 이겨야 한다는 것인데?” 대왕뱀의 목소리는 가자머릭을 조롱하는 듯했습니다.

“그래? 겨우 그게 네 원하는 거라면 바라는 데로 해주마!” 

가자머릭이 꿈속에서 배운 도술은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가자머릭이 눈을 몇 번 꿈뻑이는 것만으로 그가 아까 죽였던 각 관문의 문지기 뱀들을 모두 살아났습니다. 

“꽤 흥미로운 능력을 가진 꼬마로구나. 하지만 두 번째 조건만은 영원히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날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어!” 대왕뱀이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넌 도대체 도술이 센 거냐? 아니면 말빨이 센 거냐?” 

가자머릭이 대왕뱀을 도발하자 화가 머리 끝끼지 치밀어 오른 대왕뱀이 꼬리를 휘둘러 공격해 왔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가자머릭은 그 첫 번째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흘리며 곧바로 반격을 가해 둘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싸움은 7일 밤낮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가자머릭이 살려낸 다른 뱀들도 최종 보스 대왕뱀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 가자머릭에게 함께 달려들자 그 장면은 정말 머리가 일곱 개 달리 뱀과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가자머릭은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대왕뱀들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가자머릭은 그들의 공격패턴을 읽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왕뱀 등 뒤의 문이 달린 동굴들을 주목했습니다. 그곳 어딘가에 큰형과 태자비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왕뱀들이 온갖 술법으로 가자머릭을 죽이려 했지만 가자머릭의 도술은 그들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곱 마리의 뱀들은 모두 탈진해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된 후 가자머릭은 유유히 대왕뱀 보스몹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뱀들은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가자머릭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모, 목숨을 살려준다면 당신에게 충성을 다하겠소.”

다른 대왕뱀 한 마리가 동굴의 닫힌 문 안에서 가자머람 태자와 뿌뜨리 징가이 공주를 데리고 나와 가자머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거대한 공기방울 속에 갇힌 그들은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태자 부부를 데려온 것은 인간세계의 다음 왕이 될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을 뿐이요. 하지만 얘기를 하려할 때마다 놀라서 까무러쳐버리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 말하지 못하고 고귀한 태자 부부를 몰래 납치하는 무례를 저지른단 말인가?”

“제발 용서해 주시오. 우린 당신과 당신 왕국에 절대 피해를 주지 않겠소. 오히려 앞으로 당신의 수하가 되어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겠소!”

“그 말이 거짓이라면 내가 다시 돌아와 너희 뱀들은 물론 동굴 속 실지렁이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도륙해 버릴 것이다!”

가자머릭은 그렇게 말하며 칼을 거두었습니다. 대왕뱀도 명색이 호수 속 모든 뱀들의 제왕. 그런 존재가 거짓맹세를 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대왕뱀들을 놓아주었습니다.


한편 왕국에서는 비까우 버르마노 왕을 비롯한 모든 신료와 백성들이 가자머릭 왕자의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왕은 군사들에게 가자머릭을 따라 우선 뜨빳또뻬스(Tepat Topes)라는 곳에 진을 치고 언제라도 호수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는데 그때 마침 떼스 호수를 지키던 경비병이 급히 궁으로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폐하! 가자머릭 왕자님이 가자머람 태자 부부와 함께 궁으로 돌아오고 계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자 머릭, 가자머람과 뿌뜨리 징가이가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그 모습에 모든 신료들과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왕은 기쁨에 겨워 7일 밤낮으로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들의 귀환을 환영했고 연회의 말미에 가자머람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가자머람은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이번에 왕위를 물려받을 능력을 증명한 것은 막내 가자머릭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모든 백성들 앞에 보여주었고 저와 뿌뜨리 징가이 공주를 구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왕위에 대한 권리는 가자머릭에게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가자머릭아, 너는 우리의 왕이 될 준비가 되었느냐?” 

이번엔 왕이 가자머릭에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명이 있고 형님이 양보하신다면 기꺼이 왕국과 백성들을 위한 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냐?” 왕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제가 왕이 되면 저 대왕뱀 무리를 왕국의 장수로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장내가 술렁거리며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에 수군거렸지만 한참을 생각하던 왕은 가자머릭의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그래 잘 알겠다. 그리 하거라.”


  그리하여 대왕뱀 보스와 다른 대왕뱀들은 모두 꾸떼이루깜 왕국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도술을 가진 가자머릭의 치세에 늘 순종했고 호수를 지나는 왕국 어부들을 더 이상 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홍수나 산사태 같은 재난이 닥치거나 다른 나라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호수 밑바닥에서 올라와 왕국을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레봉 사람들은 떼스 호수 밑바닥에 수호신 대왕뱀이 살고 있다고 믿어 호수를 건널 때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혹시라도 불경한 말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다른 버전에서는 가자머릭 왕자가 정말 일곱 개 머리를 가진 뱀과 싸우기도 하지만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이란 이 버전에서와 같이 일곱 개의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나타난 일곱 마리의 뱀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대왕뱀 아트 모음.png
일곱 머리 대왕뱀 아트 모음

 

이 민화는 인도네시아에서 그리 흔치 않은 해저 스팩타클 액션 장르입니다.

아쩨의 용들과 큰 뱀들은 인간들에게 살갑게 지내고서도 종국엔 죽거나 쫓겨나지만 남부 수마트라 벙꿀루 지역에선 사람들을 해친 악명높은 뱀들마저 포용하는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건 두 지역 사람들의 평균적 성품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전설과 민화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도술로 안되는 게 없습니다. (끝)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번역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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