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어, 현지인처럼 못해도 괜찮아요”
언어가 삶이 될 때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김미소 에세이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022년 03월 30일 출간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수카르노하타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들려온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덩어리와 알파벳이지만 읽어지지 않는 글자를 보면서, 이런 게 ‘문맹’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를 보호해 주던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내 세계가 나를 둘러싼 몇몇 한국인으로 축소된 느낌이 들었다.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세계는 인도네시아어가 들리는 만큼 조금씩 열렸지만, 그때부터는 내가 인도네시아와 한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붕 뜬 존재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20대’ ‘여성’ ‘외국인’ ‘교수’
책 <언어가 삶이 될 때>는 일본에서 ‘20대’ ‘여성’ ‘외국인’ 교수로 살아가면서, 저자 김미소가 그 나라의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기도 하지만, 어느 나라와 문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면서 언어와 함께, 언어로 세계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저자 김미소는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응용언어학 박사를 취득하고, 일본 다마가와대학에서 '공통어로서의 영어 센터' 전임 교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베트남 출신 새어머니와 함께 다문화 가정에서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고, 정규교육에서 이탈해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으로 1년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며 영어를 가르쳤고, 지금은 일본에서 비원어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없는 시간을 짜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답답함, 어떤 자료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는 막막함, 똑바로 말을 못 해서 오해받는 것 같고, 왠지 모르지만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쁨,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저자가 일본어 초보자가 되어 일본에 갑자기 뚝 떨어져 겪은 심정인데, 인도네시아에 갑자기 오게 된 한인들도 한두 가지는 겪었을 감정이다.
저자는 해외 이주에 대해 ‘다수 속의 소수로 사는 경험’이라고 정의하며, 스스로 새 나라에서 새 언어로 삶을 꾸려가면서 이주여성, 유학생, 이주노동자 등 여러 가지 위치에 서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환경에서 언어에 능숙해지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면서,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언어가 어떻게 삶이 되는지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편안한 모국어의 품을 떠나 낯선 단어와 음성 사이를 헤엄치며
저자는 “외국어 공부도 해외 생활도 경계를 넘어 다니는 일입니다. 편안한 모국어의 품을 떠나서, 낯선 단어와 음성 사이를 헤엄치며, 뭐든지 떠 있는 것을 잡아서 수면 위로 올랐다가 또다시 가라앉고 좌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입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언어, 정체성, 다양성, 차별 등을 경험한 이야기를 하며, 외국에서 현지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성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외국어 배우기를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것에 비유하고,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언어를 정복하거나 완성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모국어, 외국어, 외국인라는 표현도 쓰지만 제1 언어, 제2 언어, 비원어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외국어 학습을 책 속의 지식을 단순히 뇌 안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수준까지 가지 않아도 돼요”
외국어 완성 기준에 대해, 저자는 원어민처럼 말하는 수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외국어를 배워서 새로운 곳에서 자신이 만들어가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그 안에서 기쁘게 여행할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목표를 원어민처럼 말하기가 아닌 ‘해당 언어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냐’에 두어야 한다는 것.
외국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새로운 사회에 생존하고 동화되기 위해서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에서 오롯한 인간으로 서 있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주한 국가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수록 그리고 이주민 커뮤니티와 멀어질수록 현지 사회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언어는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은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미국에서 영어로 안 되는 전화라도 일단 준비해서 걸어보고, 실수하더라도 부딪쳐보고, 없던 취미 생활이라도 만들어서 사람을 만나고, 움츠러들더라도 저자가 하려는 말을 계속했다고 회상했다.
저자는 2019년 2월에는 취업도 계속 실패하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에도 계속 떨어지던 시기에도 “나는 반드시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 거야. 이렇게나 많은 실패를 쌓아왔으니까”라고 생각할 만큼 낙천적이다.
“완벽한 영어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저자는 “완벽한 영어 같은 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한다. 영어에는 완벽함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규칙이 없고, 용례가 쌓여서 규칙이 만들어지고, 규칙 역시도 새로운 용례가 쌓이면서 계속 바뀐다는 것. 또한 영어 용례는 원어민이 쌓는 것보다 비원어민이 쌓는 경우가 훨씬 많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기도 하므로, 정확한 규칙을 지키기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해 상대와 협력하여 의미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한 사람이 처한 위치도 그가 언어를 배우는 데 고려할 점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이 환대받는 위치에 있는지, 멸시받는 위치에 있는지.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 더듬더듬 말을 건넸을 때 해당 언어를 쓰는 주변 사람들이 친절히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것 같은지, 혹은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거나 듣지 않으려 할 것 같은지. 말을 잘하지 못하거나 문화를 몰라서 무례를 저질러도 주변 사람들이 상냥하게 알려주거나 이해해 줄 것 같은지, 아니면 찬바람을 쌩쌩 풍기며 “너희 나라 애들은 다 그래?”하고 비웃을 것 같은지.
저자는 한국인이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하지만, 영어로 ‘경험’을 쌓은 적은 드물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언어로 쌓은 경험만큼 언어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영어를 배운다는 건 전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익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저자가 영어와 일본어에 대해 한 말을 인도네시아어로 대치해보고 싶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운다는 건 인도네시아인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익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 문화와 한국문화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내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 책을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 하지만 방향을 못 잡고 있거나 실패한 사람들에게 권한다. [데일리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