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 (53)] 라물루 이야기 (Kisah La Moelu)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무속과 괴담 사이 (53)] 라물루 이야기 (Kisah La Moelu)

기사입력 2022.12.22 16:3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인도네시아 무속문화와 전설 그리고 동화 등 옛 이야기를 소개해온 배동선 작가의 '무속과 괴담 사이'는 53회를 끝으로 시즌1을 마감합니다. 현지인들의 마음 속 또는 무의식의 저편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난 2년 간 매주 연재해주신 배동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1 술라웨시 동남부.jpg


옛날옛적 술라웨시 동남부 한 마을에 라물루(La Moelu)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이제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일은커녕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라물루가 생계를 꾸려야 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멀지 않은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일뿐이었습니다. 


어느날 라물루는 그날 따라 물고기가 좀 더 많이 잡히기를 기대하며 낚시밥 지렁이를 잔뜩 가지고 호숫가로 나왔습니다. 먹고 남을 만큼 잡으면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가 호수에 도착했을 때 물고기떼가 날뛰며 수면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큰 기대감에 낚시를 던졌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입질이 없어 해가 중천에 뜨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라물루는 크게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몰려다니는 물고기떼가 뻔히 보여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낚시줄이 팽팽해졌습니다. 조심스럽게 낚시줄을 당겨 보니 예쁜 물고기가 한 마리 잡혀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물고기였지만 너무 예뻐 라물루는 낚시바늘을 빼고 작은 통에 넣어 홀린 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집에 가져가 아버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물고기지? 너무 예쁘게 생겼구나.” 

그 물고기를 본 아버지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이 물고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차라리 네 동생 삼아 키워 보렴. 어차피 너무 작아서 요리해도 둘이 먹기 충분치 않잖아?” 


라물루는 아버지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 작은 물통을 들여다본 라물루는 깜짝 놀랐습니다. 밤 사이 물고기가 그 통을 꽉 채울 만한 크기로 자라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라물루가 조금 더 큰 절구통에 물을 채워 물고기를 옮겨 놓자 다음날 물고기는 또 다시 절구통 만한 크기로 자라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물고기를 더 큰 항아리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물고기는 항아리를 가득 채울 만한 크기로 자라버렸습니다. 라물루는 이제 물고기를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빠, 이제 물고기를 어디로 옮겨 키워야 해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집 옆에 물을 길어 놓는 큰 통에 물고기를 옮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물고기는 이제 그 큰 통마저 꽉 찰 정도로 자라나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넣어 키울 만한 더 큰 통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라물루에게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주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집에서 더 이상 키울 수 없는 걸 알겠는데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왜 바다에 풀어주라는 걸까요?


어쨌든 라물루는 아버지 말대로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풀어주며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물고기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지난데 뜨레몸봉아(Jinnande Teremombonga)야.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바닷가로 찾아와 줘. 먹을 것을 주려는 거니까.”

영리한 물고기는 알았다는 듯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넓은 바다에 풀어주자 자유를 만끽하게 된 물고기는 무척 기뻐 보였고 라물루의 마음도 흐뭇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라물루는 물고기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바닷가로 나가 물고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난데 뜨레몸봉아야!!”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라보게 더 자라난 지난데 뜨레몸봉아가 정말로 나타나 먹이를 먹은 후 한동안 라물루 주변을 맴돌다가 바다로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이제 라물루의 매일 아침 일과가 되었습니다.



1 laMoelu.jpg


어느 날 아침, 라물루가 여느 때처럼 지난데 뜨레몸봉아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뒤편 수풀 속에서 그 장면을 몰래 훔쳐보던 세 명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라물루의 사촌뻘 되는 친척들로 라물루가 커다란 물고기를 불러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곧이어 저 물고기를 잡아먹겠다고 야무진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들은 일단 라물루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나무에서 내려와 바닷가로 다가가더니 아까 라물루가 했던 것과 같이 물고기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난데 뜨레몸봉아~!”

물고기가 순식간에 바닷가에 나타났지만 이름을 부른 사람이 라물루가 아닌 것을 보고 곧바로 깊은 바다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마 사람들이 많아 물고기가 겁을 먹은 거라 생각하고 한 사람만 남기고 다른 두 명은 뒤쪽으로 물러나 몸을 숨겼습니다. 

다시 물고기를 부르자 지난데 뜨레몸봉아가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라물루가 아닌 것을 보고 역시 방향을 돌렸습니다. 청년들은 약이 올랐습니다. 


결국 그들 중 한 명이 물고기를 부르고 다른 두 명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작살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 작전을 짰습니다. 그 작전은 보기좋게 성공해, 물가로 다가왔던 지난데 뜨레몸봉아는 청년들이 던진 작살에 꿰뚫려 죽고 말았습니다. 청년들은 즉석에서 물고기를 토막내 각각 나누어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토막으로 나누었지만 워낙 물고기가 커서 세 사람이 각각의 가족들과 몇 끼를 함께 먹고도 남을 정도로 큰 덩어리였습니다. 그들은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라물루는 다음날도 먹이를 가지고 바닷가로 나와 지난데 뜨레몸봉아를 불렀지만 물고기가 나타날 리 없었습니다. 라물루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불러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바닷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물고기를 불렀지만 결국 만나지 못해 수심에 가득 차 집에 돌아간 라물루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며 눈물을 떨궜습니다. 

“어쩌면 그 물고기가 친구들을 만나 먼 바다로 나간 건지도 모르겠구나.”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날 밤 라물루는 무거운 마음으로 마을을 배회하다가 그 세 청년 중 한 명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집 안에서 가족들이 커다란 생선 요리를 식탁 한 가운데에 놓고 떠들썩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불현듯 지난데 뜨레몸봉아가 떠올랐습니다. 

“설마 내 지난데 뜨레몸봉아를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예의가 아닌 걸 알았지만 라물루는 다급하게 그 집 문을 두드리며 물고기를 어디서 잡았는지 물었습니다. 가족들의 시선이 물고기 토막을 가져온 아까의 청년에게 쏠리자 그는 허둥대다가 라물루의 집요한 질문에 결국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오히려 라물루를 도발했습니다.

“아침에 바다에서 잡아온 거야. 왜? 너도 알던 물고기잖아? 한 조각 맛보고 싶어? 어미도 없는 불쌍한 놈아!” 

그는 언제나처럼 라물루를 업신여기며 조롱했습니다.


저 생선요리는 지난데 뜨레몸봉아가 틀림없었습니다. 라물루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청년은 집에 가서 먹으라며 파파야 잎에 음식을 싸주었지만 그 안에 발라낸 가시와 뼈만 들어 있었습니다. 라물루는 그나마 어딘가에 묻어줘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슬픔에 가득 차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집 앞 뜰에 물고기의 뼈를 묻고 밤새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라물루가 일어나 보니 지난데 뜨레몸봉아의 무덤에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무덤 위에 식물이 자라나 있었는데 몸체는 금으로 되어 있었고 은으로 된 잎파리와 다이아몬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불러 그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란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묻자 라물루는 어제 벌어졌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신의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난데 뜨레몸봉아의 무덤에서 솟아난 마법의 식물을 잘 가꾸었고 소문이 퍼지자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식물을 보기 위해 라물루의 집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식물은 쑥쑥 자라났습니다. 마치 매일 몰라보게 자라던 물고기 지난데 뜨레몸봉아처럼 말입니다. 라물루는 식물의 열매와 잎사귀를 조금씩 따서 팔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라물루와 그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초심을 잃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늘 관대하게 대했고 예전 라물루의 물고기를 잡아먹었던 그 세 청년에게도 똑같은 공평함으로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라물루는 그 마을에서 오래도록 존경받으며 살았습니다.


1 라물루 아트 모음.jpg
라물루 아트 모음

 

--------------------------------


‘술라웨시 떵가라’(Sulawesi Tenggara)라 불리는 술라웨시 동남부주(洲)에서는 똘라끼(Tolaki)족과 부기스(Bugis)족이 반반쯤 섞인 인구구조를 보이지만 남부 술라웨시의 마카사르(우중빤당)의 부기스 족들은 세력이 커지고 교통이 발전하면서 술라웨시 전역으로 퍼져 나간 측면이 크니 이 전설이 구전되던 당시엔 아직 부기스족 유입이 적어 똘라끼족이 대세를 이루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라물루 이야기가 어쩌면 똘라키족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걸까요?


참고 견디는 착한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는 기조의 스토리이지만 라물루가 한 것이라곤 물고기를 잡아 키운 것뿐이고 실제로 특별한 것, 기적을 일으킨 것은 모두 지난데 뜨레몸봉아라는 이름의 물고기였습니다. 이 물고기가 용왕의 아들이었다거나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해 라물루와 혼인했다면 친숙한 다른 전설들과 유사했을 텐데 죽어서 주인에게 복을 가져온다는 전개가 특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라물루가 키우는 물고기였다 해도 공유지인 바닷가에 풀어주었고 딱히 누가 주인이라고 표시하는 목줄이나 인식칩도 달지 않았으니 그걸 본 청년들이 힘을 합쳐 큰 물고기를 잡은 것은 어쩌면 언제든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방생하여 야생으로 돌려보낸 순간, 인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끝)


♣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번역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