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월 "조국의 영광, 양국의 우호, 회사의 번영"
투철한 애국심과 진정한 글로벌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해외자원개발의 선구자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발행인 / 한인뉴스 논설위원
'조국의 영광, 양국의 우호, 회사의 번영'은 한국남방개발㈜(KODECO/코데코)의 사훈이다. 매우 독특한 사훈에는 코데코 창업자 최계월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에 폐허가 된 조국이 영광을 되찾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 간 우호 관계를 통해 회사의 번영을 이루겠다는 최 회장의 소망을 사훈에 담았다.
평생 해외자원개발에 매진해온 최계월 회장은 2015년 11월 향년 96세로 일본에서 별세했다. 최 회장의 삶은 애국, 대승적 기업관, 글로벌 기업가정신, 한·인니 민간외교의 선구자,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초석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잘살아 보겠다는 용기를 낼 무렵인 1963년 최 회장은 한국남방개발을 설립해 우여곡절 끝에 1968년에 대한민국 최초 해외투자 기업을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외화보유액이 5천 달러를 밑돌았을 때, 코데코는 외환보유고의 10% 규모인 450만 달러를 빌려 인도네시아에서 산림개발에 투자했다.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고 남부 칼리만탄주 바뚜리찐(Batu Licin) 지역에 27만㏊를 개발해 모국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지금도 현지 간선도로의 이름이 '잘란 라야 코데코'(Jalan Raya Kodeco)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나온 최 회장은 183㎝의 우람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에 운동으로 다져진 강인한 신체. 보스 기질과 배짱, 유머 감각 등을 두루 갖췄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부터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수하르토 대통령 등 정관계 고위급 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개발 초기인 1968년 인도네시아에 대한민국 해병대 상륙사단 출신 부사관 120명과 함께 맹수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원시 정글에 들어가 원목개발을 했다. 임상조사와 위급환자 후송 등 목적으로 1969년 한국인 최초로 경비행기를 구매하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길 만큼 생각과 행동이 보통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최 회장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애국자이다. 동서냉전기인 1964년 북한은 인도네시아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대한민국을 압도했고,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는 한국 친선방문단을 거부할 만큼 우리와의 관계 구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은 1962년 2월 도쿄에서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수카르노 대통령 간 만남을 주선해 막혔던 한-인니 외교의 물꼬를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앞서 1960년대 초 이리안자야(서파푸아) 지도자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위해 일본 정부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정·재계와 돈독한 인맥이 있던 최 회장은 외교 수완을 발휘해 네덜란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귀속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고맙게 여긴 수카르노 대통령은 1962년 최 회장을 인도네시아에 특별 초청했고, 최 회장의 산림개발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코데코는 대한민국 1호 해외투자에 이어 1981년 ‘해외 유전개발 제1호’라는 새 역사도 썼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중동발 오일쇼크로 한국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원유 확보와 새로운 유전 개발에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최 회장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최측근인 베니 무르다니 장군의 인맥을 통해 서부 마두라 광구 유전개발 사업을 성사시켰다. 베니 장군은1969~1973년 기간에 주한 총영사로 근무했던 지한파로 양국 관계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최 회장은 1970년대 석유파동 때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부탁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으로 가던 유조선 뱃머리를 돌려 한국에 공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1년 한국인 최초로 해외 유전개발사업에 뛰어든 서부 마두라 해상유전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수익이 나지 않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코데코의 사세가 기울었다.
초대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맡은 최계월 회장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유치원, 학교 등을 지어주는 등 현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 우리 기업 진출 초창기인 1976년 자카르타에 한국학교 설립(현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JIKS)을 위해 당시로써는 거금인 13만 달러를 쾌척했다. 최 회장의 유전사업을 이어받은 아들인 정필립 코데코에너지 대표는 2020년 1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큰 금액의 장학금을 JIKS에 기부하고, 교내 나래홀 강당 앞에 최계월 회장 흉상을 설치했다.
최 회장은 국내에서는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안에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나가면 산다”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이후 해외자원개발에 매진해온 고인 삶의 궤적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한-인니 관계가 지금과 같이 뿌리 깊게 발전할 수 있는 데에는 최 회장의 기여가 적지 않다. [데일리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