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숙]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의 삶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오면 우리 국민에서 외국인이 되고, 다수자에서 소수자가 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잘 유지해 왔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영주하려는 한국인이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의 한국인들과 비교해
국적을 취득하거나 영주하려는 비율은 크게 낮다.
한국 해외 진출의
개척자이자 한국을 도운 재외동포라는 점은 인도네시아 한인의 큰 자부심이다. 인도네시아는 민간인이 한국
정부보다 먼저 진출한 국가로, 한인 사업가들이 성금을 모금해서 한국대사관 부지를 매입해 준 것을 포함해
진출 초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정부와 대사관을 지원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는 종목별로 동포 응원단을 꾸려서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한식을 대접하고
부족한 물품을 구입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때는 일본군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가 살고 있던 김만수와 유형배가 국교도 없던 대한민국의 선수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봉사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취업과 사업 등 경제 활동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왔다. 목재, 건설, 신발, 봉제, 전자, 중화학공업, 유통 등 산업을 중심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금융업과 인허가 관련 컨설팅업체, 한식당과 여행사 등이 순차적으로 생기면서 한국인의 활동 업종이 다양해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합해 한국계 기업은 2천 300여 개로 추산되며, 제조업을 기반으로 근면하게 경제활동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완충지대이다. 인도네시아는 남북 대사관이 동시에 설립된 아시아 최초의 국가이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장애인 아시안게임 때 남북한
공동 입장, 여자농구·카누·조정
등 일부 종목이지만 단일팀이 구성됐고, 현지 남북한 동포들이 공동응원도 했다. 개막식에는 이낙연 총리와 리룡남 북한 내각부총리가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은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해 평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반도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한국인이 쇼핑몰에서 마주친 북한 사람과 인사할 수 있고 북한 식당에 갈 수 있는 곳이 자카르타이다.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네시아어로 생활한다.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기도 하다. 네덜란드
식민지를 한 인도네시아는 영어권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같이 영국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에서는
외국인이 영어로 생활할 수 있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UI) 외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과정(BIPA)에는 20년 이상 한국인 학생
비중이 60~70%에 이를 정도로,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어를
적극적으로 배운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들은 종교단체, 동문회, 향우회, 문화·예술단체 등 활동을 통해 다른 한국인들과 교류하며 외로움을
달랬고, 한국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2세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는 한국인 이주 초기인 1976년에 설립돼 2세들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시작했다. 선교 활동의 일환이지만 선교사들은 현지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한국인들은
한국문화와 한식을 전파하는 디딤돌이었다. 한식을 먹어야 하는 한국인들은 한식당의 든든한 소비자였고, 인도네시아인에게 한식을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덕분에 2000년대 중반에 자카르타에 한식당 수가 100개를 넘겼다. 지금처럼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진출 초기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에 한국무용을 공연하고
다도 시범을 보이고 인도네시아와 한국 화가 교류전을 시작한 사람들도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인들이다. 인도네시아
소수 종족 가운데 하나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문자로 도입하게 된 배경에도 앞서 한국어와 한글을 소개하는 활동이 있었다.
한편으로 한류의
전파와 한국 정부가 인도네시아와 외교, 비즈니스, 문화 협력
등을 강화하고 있는 점은 현지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고 생활의 편의를 크게 개선했다.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고, 북한 사람이 아니고 남한 사람이라고 강조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인도네시아인이 먼저 한국인이냐고 물어주고 반가워해 준다. 현지인들이
한국 식품과 화장품 등을 소비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제품을 구입하기도 훨씬 쉬워졌다. 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관광공사, 농수산물유통공사
등 정부 단체와 그리고 민간단체들의 한국문화 행사는 인도네시아인만이 아니라 현지 한국인들의 삶에도 활력을 더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들은 폭동과 테러 같은 위기에 직면하면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지진과 화산 폭발 등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돕는 삶을 배웠다.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민주화 시위와 폭동 때 현장을 지킨 한국기업은 인도네시아인과 해외 바이어들의 신뢰를 얻어서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2004년 아체 쓰나미와 2019년 술라웨시섬 빨루 지역 지진 등
자연재해를 당했을 때 한국인들은 재해 현장에 들어가 긴급구호 활동을 벌였고, 자카르타 등 피해가 없는
지역에서는 구호 성금과 물자를 모아서 보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직접 펼치는 구호 활동 외에도 한국
정부와 기업 그리고 여러 단체의 지원을 인도네시아에서 필요한 곳에 도달하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해왔다.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은
위기에는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폭동 때 한국인을 지켜준 사람들은 평소에 잘 지내던 이웃의
인도네시아인들이었고, 한국기업을 지켜준 사람들은 현지인 직원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인도네시아인을 닮아간다. 특히 자바 예절은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고 갈등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화와
협상을 한다. 이슬람이 주류인 공간에서 기독교인으로 살려면 교회 안에서는 뜨거워도 교회 밖에서는 차분해야
한다. 인도네시아어를 생활어로 말하고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인 바틱 옷을 즐겨 입으면서 조용히 협상하는
모습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큰 목소리로 한국어로 말해야 속이 후련해지는 모습. 모두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안에 있는 모습이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들은 앞으로도 바틱 옷을 입고 나시고렝을 먹으면서 조용히 인도네시아어로 말하다가, 저녁에는 소주에
삼겹살을 먹으며 큰 목소리로, 한국어로 말하는 삶을 오갈 것이다. 조국이
어려움을 겪으면 돈이든 독립운동이든 대인도네시아 로비 등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것이다. 또
인도네시아가 어려움을 겪으면 역시 한국에서든 인도네시아에서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인도네시아인인
사람도 있고 한국인인 사람도 있고, 여기에 외국에서 공부해서 미국인이나 싱가포르인의 정체성까지 더한
사람도 한인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한인공동체는 어떤 모습이 될지?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하다. [데일리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