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연재] 수카르노의 부인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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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수카르노의 부인들 (7)

기사입력 2025.08.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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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본지는 '수카르노의 부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기고자인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대표 집필자이자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의 저자이며, 오랫동안 재인도네시아 한인뉴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서방 언론에서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폄하되었던 20년 집권 독재자의 사생활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데일리인도네시아가 그 전모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7. 명승지 교토

 

마에다.jpg
1942년 마에다 다다시 제독 

 

1958년으로 추정된다. 수카르노가 도쿄 제국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의 은인’으로 불리는 마에다 다다시 제독이 입원해 있던 도쿄 시내의 한 병원이었다. 종전 후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건강까지 잃은 마에다는 병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수카르노를 맞았다. 그는 “인도네시아에도 이런 의리의 사나이가 있느냐?”며 눈물을 보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감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하늘 같은 일본 해군 제독이자 식민 지배자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수카르노 일행의 일본 체류 동안 18일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내를 맡았던 기노시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기노시타 산쇼(商社)는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에 설립되어 전전에는 만주, 전후에는 필리핀에서 철광석 등 제철 원료를 후지철강과 이와타 철강에 납품했다. 당시 상공차관은 훗날 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기시는 도조 내각에서 정무차관을 지냈고, 전후에는 잠시 기노시타 산쇼의 사장을 맡다가 1957년 수상에 올라 제1차 기시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기노시타의 안내를 받은 수카르노 일행은 고다마 요시오 조직원의 경호를 받으며 도쿄에서 하코다테까지 이동하며 일본 각지의 명승지를 순회했다. 그 여정에서 ‘교토의 밤’이 찾아왔다. 이때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도쿄에서 패션모델로 활동하던 24세 가나세 사끼꼬가 교토로 초청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수카르노의 초청으로 1958 11월 자카르타에 들어오는데, 일본인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위장한 입국이었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가나세는 부르기 쉽도록 ‘바수끼 부인(Nyonya Basuki)’으로 불렸다. 수카르노와의 결혼을 앞두고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살리꾸 마이사로(Saliku Maisaroh)’라는 인도네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수카르노 부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인 부인’ 하면 가장 먼저 데위 여사를 떠올리겠지만, 실제로는 데위보다 가나세가 먼저 수카르노와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화가와 까르띠니

 

이야기의 배경을 잠시 일제강점기로 되돌려보자. 일본 군정감부 선전부는 산하에 ‘계민문화지도소(啓民文化指導所)’를 설치해 인도네시아의 모든 문화예술 활동을 관리·감독했다. 이 조직에는 조선인 히나쓰 에이따로(한국이름: 허영)가 지도위원으로 있는 연극·영화부 외에 문학·음악·미술·공예 등 부서가 있었고, 그중 미술부에는 바수끼 압둘라, 에펜디, 오또 등 현지 출신의 유능한 화가들이 속해 있었다.

 

바수끼 압둘라는 당시 점령군사령관 이마무라 장군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사령부를 드나들며 수카르노와 함께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인연 덕분에, 일본 점령이 끝나고 수카르노가 대통령이 되자 바수끼는 궁중화가로서 큐레이터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까르띠니.jpg
화가 바수끼 압둘라가 그린 까르띠니 마노뽀.


어느 날, 수카르노는 새로 단장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다 한 인물화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수끼에게 물었다.

“이 그림 속 모델은 누구요?

“가루다 항공사 스튜어디스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모델로 부르곤 했지요. 이름은 까르띠니 마노뽀(Kartini Manoppo)입니다. 이름을 보니 마나도 출신인 듯합니다.

이에 수카르노는 “언제 한번 만남을 주선해 보시오”라고 말한다.

 

자신이 모델로 그려진 초상화를 계기로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까르띠니는 1959년 정식으로 수카르노와 혼인했다. 이로써 보고르궁의 하르띠니, 일본인 부인 가나세와 함께 중혼 관계가 성립되었다.

 

정치적 상황과 메가와띠

 

한편, 화뜨마와띠가 없는 대통령궁에서 이미 성년기에 접어든 큰딸 메가와띠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수카르노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 방문을 즐기고, 비동맹운동 결성을 위해 이집트와 알제리를 오갔으며,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찾아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와 나란히 서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외교 행보와 달리 국내 정치는 점점 경색되었고, 종신 대통령제 논의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1963 7월 국가 최고 의결기관인 국민협의회(MPR)는 수카르노를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계속-

 

[김문환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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