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수카르노의 부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기고자인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대표 집필자이자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의 저자이며, 오랫동안 재인도네시아 한인뉴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서방 언론에서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폄하되었던 20년 집권 독재자의 사생활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데일리인도네시아가 그 전모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8) 일본 정경유착 세력간 각축과 여섯 번째 부인 데위
앞서 기노시타의 후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수카르노는 일본 여행에 매료되어 다시 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청구권 자금 2억 2,300만 달러가 12년에 걸쳐 무상으로 지급되기로 하면서, 이를 집행할 구체적 계획 수립이 필요해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금 사용의 적절성을 확보하기 위해 1959년 8월 ‘국가기획위원회(Dewan Perancang Nasional)’를 설립했고, 이 기구는 훗날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하는 국가개발기획청(Bappenas)으로 발전한다.
1959년 6월, 수카르노의 일본 재방문 일정이 잡혔다. 이번에 등장한 ‘물주(物主)’는 기노시타가 아니라 도니치 보에키(東日貿易)를 이끌던 쿠보 마사오였다. 기노시타가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후원을 받는 중견 사업가였다면, 쿠보는 기시와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고, 자민당 내 거물 원로인 오노 반보쿠와 고노 이치로와 연결돼 있었다. 게다가 야쿠자 보스 고다마 요시오의 이름까지 회사 등기부에 올려놓았다. 이는 곧 자민당 내부 양대 파벌의 힘겨루기와 다름없었다.
쿠보 마사오는 이번 2차 방문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쥘 기회를 얻었다. 그 뒤에는 전설적 인물 세지마 류조가 소속된 이토추 상사가 든든히 버티고 있었다. 공식 방문이었기에 경호 문제 등은 전보다 덜 민감했지만, 수카르노를 끌어들여 기노시타에게 빼앗긴 영향력을 되찾는 것이 쿠보의 급선무였다.
쿠보는 1년 전 ‘교토의 밤’을 잊지 못하는 수카르노의 심리를 꿰뚫고, 승부수를 도쿄 시내 중심에 있는 최고급 클럽에서 띄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 무대에는 아름답고 영리한 접대부 네모토 나오코가 있었다. 네모토는 도쿄 출생으로, 여고 중퇴 후 낮에는 보험판매원, 밤에는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일하며 전후의 어려운 삶을 묵묵히 견디던 평범한 청춘이였다.
정·재계 거물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던 네모토는 쿠보의 지시에 따라 온갖 교태를 부렸고, 무대에 올라 인도네시아 전통 대중음악 장르인 끄론쫑(keroncon)으로 유명한 노래 ‘벙아완 솔로(Bengawan Solo)’를 불렀다. 일본 엔카와 닮은 선율로 노래하는 네모토의 모습에 수카르노는 단번에 매료됐다. 수카르노의 귀국일, 쿠보는 네모토의 손을 잡고 하네다 공항 승·하차장에서 배웅하게 했고, 수카르노의 마음에 아련한 잔영을 남겼다. 이 순간이 네모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고, 그 여파는 훗날 일본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물론, 인도네시아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수카르노는 네모토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연정을 담은 편지를 써 주일인도네시아대사관을 통해 네모토에게 전달했고, 발리에서 보름간 휴가를 보내자는 초청장을 함께 보냈다.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확인한 쿠보는 크게 기뻐하며 네모토를 설득했다. 그는 네모토에게 매월 20만 엔을 생활비 명목으로 지급하고, 모친과 남동생을 위한 주택 구입비와 여행경비까지 제공하며 초청 수락을 종용했다. 당시 일본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이 1만 엔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959년 9월 15일, 쿠보는 네모토를 데리고 자카르타를 거쳐 발리로 향했다. 두 명의 일본 여성을 직원으로 위장시켜 동행시키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발리 체류를 마치고 자카르타로 돌아온 네모토는 수카르노의 설득 끝에 멘뗑 지역에 장기 거주지를 마련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수카르노의 여섯 번째 부인 데위 여사(Ratna Sari Dewi)이다. -계속-
[김문환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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