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물열전25] “DJ는 나의 스승”이라고 말한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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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25] “DJ는 나의 스승”이라고 말한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

기사입력 2026.01.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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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두르.jpg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2월 10일 청와대에서 압두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한ㆍ인도네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국가기록물]

 

압두라만 와히드 제4대 인도네시아 대통령(1940~2009)은 김대중 대통령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칭하며 존경심을 나타냈다. 와히드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김 대통령이 강조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국정목표로 삼았다. 각별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김 대통령과 만날 때마다 서슴지 않고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와히드 대통령이 김 대통령을 스승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업적을 한 줄로 요약하면 △종교 관용 강조 △소수자 권리 보호 △중국계 차별 철폐 △군부 정치 개입 축소 시도 등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와히드를 구스두르(Gus Dur)라 불렀다. 이 이름은 특히 자바 끼아이-이슬람 지도자(Kiai-Islamic ulama)의 명예로운 아들이란 속뜻을 지녔는데, 즉 구스(Gus)는 이슬람 성직자의 아들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와히드는 그야말로 명망있는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끼아이 하지 하심 아샤리(Kiai Haji Hasyim Asyari)는 인도네시아 최대 무슬림 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NU)와 테부 이렝 퍼산트렌(이슬람기숙학교)의 설립자이다. 외할아버지 끼아이 하지 비스리 샴수리(Kiai Haji Bisri Syamsuri)도 데나냐르 퍼산트렌의 설립자이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가문 출신인 와히드는 1940년 8월4일 동부자바 좀방에서 아버지 와히드 하심(Wahid Hasyim)과 어머니 숄레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대 종교장관을 비롯해 1952년까지 장관직만 여럿 거칠 만큼 유명 인사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탄 말라카(Tan Malaka)는 와히드에세 칼 마르크스가 쓴 책을 선물했고, 이후 와히드의 독서열은 거의 광적이었다고 전해진다. 14살 되던 해 의사에게 눈을 조심하라는 진단을 받았고 도수 ‘마이너스 3’짜리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생전에 녹내장으로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하고 오른쪽 눈도 시력이 매우 나빠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대통령 직무를 수행했다.  

 

와히드는 철권 통치자 수하르토 대통령이 구축해온 비민주적인 인도네시아 정치와 사회를 처음으로 균열시킨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또한 인도네시아식 현대적이고 온건한 이슬람 해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분명 탁월한 전략가였으며, 레포르마시(Reformasi)라 불린 정치 개혁 운동과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 경제가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수하르토 체제가 무너질 때, 인도네시아 국민의 권한 강화를 향한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독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민주 정치와 온건 이슬람의 유산

 

와히드 정치적 유산은 개혁 운동의 핵심 지도자이자,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인도네시아 의회에 의한 선출과 이후 승계를 통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다리를 놓은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메가와티의 집권은 수하르토 시대의 종식과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졌다.

 

일각에서는 와히드가 1999년 10월, 메가와티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확보한 정당을 이끌고도 대통령이 된 것은 정치적 책략과 기회주의의 결과이며, 그로 인해 메가와티가 대통령 권좌에 오르는 게 다소 지연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또 다른 시각에서는 그의 개입과 1999년 10월부터 2001년까지의 재임 기간이 인도네시아 민주화 여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였으며, 그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인도네시아 군부가 개입해 민주주의의 싹을 초기에 짓밟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와히드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수하르토 시절 인도네시아 사회를 훼손해온 ‘금기’ 사안들을 척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아체(Aceh) 지역 반군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중국어와 한자, 중국 문화에 대한 금지를 해제했으며, 비록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도 모색했다.

 

다만 와히드 대통령은 임기 동안 정책의 일관성과 결단력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민주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인도네시아 입법부 상원 격인 국민협의회(MPR)에 의해 탄핵됐고, 2001년 7월 메가와티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줬다.

 

와히드는 개혁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온건 이슬람 정당인 국민각성당(PKB)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정치적 유산보다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르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의 현대적 온건 이슬람을 몸소 실천했다.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단체인 NU의 지도자로서, 와히드는 신앙이 국가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깊은 내면에 속한 것이라는 온건한 이슬람 해석을 설파하고 실천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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