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2)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2)

기사입력 2013.06.18 10:5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dailyindonesia.co.kr)

 지난 3월에 이어 인도네시아 역사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들을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2’로 연재한다. 이 글은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매리 하이두즈 저/ 박장식∙김동엽 공역)와 ‘동남아시아사’(최병욱/미래엔출판사)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 유럽인들의 초기 동남아시아 진출 동기는?
  오스만 제국이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후, 교역을 위한 아시아와 유럽의 육로가 막힌다. 향신료를 구할 수 없게 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한다. 포르투갈이 처음 인도 항로를 발견하고, 이어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순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 해상무역에 참여한다.  
  대항해를 연 유럽국가들이 동남아시아 진출 동기는 유럽 시장에 공급할 향신료를 구하고 동남아시아를 통한 중국과의 사치품 교역 아시아 땅 끝까지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선교사들의 의지 등이다.  

▅ 인도네시아에서 포르투갈의 흔적
  포르투갈은 16세기 초에 동남아시아에 도달, 1511년에 말레이 반도 남부에서 번창했던 항구 도시국가 말라까(Malaka) 술탄국을 점령하고 말라까 해협에 무역기지를 건설한다. 이어 당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정향, 육두구, 메이스 등의 향신료가 생산되던 인도네시아 동부의 말루꾸(Maluku) 제도로 세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점령지에서 부패와 잔혹함 그리고 무능으로 지배력을 상실했고, 이웃 이슬람 술탄국들의 도전을 받았다. 또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이 지배한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포르투갈의 주도권은 단명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1605년에 말루꾸에서 밀려난다. 이어 1641년에 말라까를 네덜란드에 양도하고 띠모르(현재 동띠모르) 지역의 일부에서만 지배권을 유지하게 된다.

▅ 인도네시아인들이 식민정부를 ‘회사’를 의미하는 ‘꼼빠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애초 꼼빠니는 인도네시아를 경제적으로 지배했던 연합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nie)를 지칭했다. 이후 VOC가 네덜란드 식민정부로 권력이 넘어갔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관습적으로 꼼빠니를 식민정부로 부르게 된다.
  네덜란드는 1602년 설립한 주식회사인 VOC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했다. VOC는 정복보다는 무역과 이윤 추구에 집중했다. 인도네시아 주재 VOC 지사장이었던 피테르준 코엔(Pieterzoon Coen) 총독은 자야까르따(현재의 자카르타)를 점령하고 유럽식 항구도시 바따비아(Batavia)를 건설해, 아시아 무역 시장이자 동남아시아의 VOC 본부로 성장시켰다.

▲ 자카르타 꼬따 지구에 있는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이 건물은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바따비아 시청으로 사용됐다.


인도네시아가 기독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지만 이슬람교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VOC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달리 기독교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교는 네덜란드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이 확 대됐다.
  또한 VOC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넓은 영토를 관리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데 VOC는 이윤 추구에 더 힘을 기울였다. VOC는 항구도시에 무역기지를 세우고 유지하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내륙 지역에는 전통 세력과 문화가 유지됐다.
  하지만 그들은 무역품의 독점을 위해 다른 무역업자들의 개입을 배제시켰고 이를 위해 선박에 중화기를 탑재하고 군대를 통하여 영토 분쟁 및 행정 관리에 관여했다.

▅ 네덜란드가 중국인의 정착을 장려한 이유?  
  네덜란드인이 바따비아의 주변 지역을 지배하는데 중국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중국인은 현지인과 언어가 통했고 지역 사정에 밝았으며 현지인을 다루는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적절한 노동력'이 부족한 자바섬에서 '부지런한' 중국인들은 무역에 필요한 환금 작물을 재배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인들의 식탁에 오를 채소와 아락(술)을 주조하는데 필요한 사탕수수 그리고 염료인 인디고 등을 재배했다. 중국인들은 선박의 화물 적재와 하역 작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운하, 가옥 및 도시 인프라의 상당 부분을 건설하는데 참여했다.
  중국인은 교역에서 현지인과의 통역을 비롯한 중개 업무를 맡았고, 조세징수도급(tax farming) 업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VOC의 대리인으로서 현지의 주민과 접촉하던 중국인은 고리대금과 입도선매 등의 방법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바따비아에는 중국인만이 사는 거리가 조성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의 독립된 사법권을 보장받으면서 세금 징수 업무를 대행하고 강제운반을 관리하는 실질적 실력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740년 중국 이민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자 VOC는 중국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여권이 상대적으로 강한 이유는?
  바따비아 초기에 네덜란드인과 결혼한 현지 여성들은 칙칙한 의상을 입은 네덜란드 여성들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했고, 공적으로는 유럽인 행세를 했지만 사적으로는 동남아시아인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네덜란드인이라기보다는 원주민에 가까웠다.
  인도네시아에 독신으로 온 네덜란드 남성은 현지 여성과 결혼해서 살다가 본국으로 귀임할 때 대부분 아들만 데려가고 현지인 아내와 딸은 두고 갔다. 충분한 부를 대가로 받고 높은 교육을 받은 일부 상류층 현지 여성들은 식민지에 토대를 둔 모계 가족사회를 형성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 유럽식으로 설계된 도시 바따비아
  네덜란드는 바따비아(현재 자카르타, 꼬따 뚜아)를 유럽식으로 설계했다. 바따비아에는 네덜란드 도시처럼 운하가 있었고, 건물은 대나무와 짚이 아닌 벽돌과 타일로 건축됐다.
  VOC 초기인 1710년에 완공된 시청사(현재 역사박물관)는 전형적인 네덜란드식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북유럽 건축물은 열대기후에 전혀 맞지 않아 나중에 네덜란드인들은 현지 환경에 보다 적합한 구조의 건축물을 짓게 된다.

▅ VOC가 인도네시아에서 쉽게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도네시아 통치자들은 내부 권력 투쟁이 발생하면 상대적으로 훈련이 잘된 유럽의 군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VOC는 이런 종류의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VOC는 그 대가로 새로운 영토를 요구하거나 이권을 취했다.

▅ VOC와 마따람 술탄국 충돌... VOC 파산, 마따람 붕괴
  VOC가 자신들의 선박과 정착지에 공급할 쌀과 각종 물품 그리고 자바섬 티크 삼림의 목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바섬 중부에 세워진 마따람 술탄국과 충돌했다.
  VOC는 18세기에 마따람 술탄과 충돌하면서 지배 영토를 확장했고, 결국 마따람을 패망시켰다. 마따람의 후예들은 족자카르타의 술탄과 수라까르따(솔로)의 수수후난(Susuhunan)으로 분리됐다.
  VOC는 마따람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입은 충격과 영국의 진출에 따른 무역망 위축 그리고 직원들의 착복으로 인한 부패 등으로 1799년 12월 31일에 파산하게 된다.
  네덜란드 정부가 VOC의 자산과 채무를 떠맡고, 다음 세기에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영토 지배권을 확대하게 된다. 

[데일리인도네시아 기자 dailyindo@gmail.com]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