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영화 [수까르노]로 본 인도네시아 독립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영화 [수까르노]로 본 인도네시아 독립

기사입력 2014.02.11 08:4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영화 '수까르노'로 본 인도네시아 독립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누군가의 삶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관객 입장에서 실망하기 쉽다. 필요 이상의 주관이 개입되고 여기에 극으로서의 재미와 완성도 등을 고려하다 보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공의 이야기 즉 픽션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입장에서 낯선 인도네시아 역사 특히 독립시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필자는 새해 첫날 오후 자카르타의 한 극장에서 영화 <수까르노: 인도네시아 독립>(Soekarno: Indonesia Merdeka)을 관람했다.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 독립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이라는 영웅의 이미지와 더불어 여러 명의 부인을 둔 여성편력, 공산쿠데타에 이은 실각 등으로 실패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영화 수까르노는 러닝타임 총 137분이며, 하눙 브라만띠오 감독, 벤 시홈빙 대본, 라암 뿐자비이 프로듀서 등이 참여했고, 아리오 바유가 수까르노 역을 맡았고, 제작사는 MVP 픽쳐스다.

▲ (자료사진) 영화 <수까르노> 포스터.


영화 줄거리

   이 영화는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이 네덜란드와 일본 식민통치시기에 독립투쟁을 벌이던 1927년부터 독립선언을 하는 1945년까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년 수까르노는 이슬람상인연합(SDI)을 결성하고 민중운동을 이끈 민족주의 지도자인 쪼끄로아미노또의 집에서 사숙하면서 1916년 네덜란드식 중등학교에서 공부한다. 이곳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다원주의, 이슬람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수까르노는 네덜란드 소녀 미엔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의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다.

   수까르노는 1927년 인도네시아국민당(PNI)을 설립하고 정치활동을 시작하지만, 1929년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체포되어 두 번째 부인인 잉깃과 동부누사뜽가라주(州) 엔데 지역으로 유배를 갔다가 수마트라섬의 벙끌루로 유배지를 옮긴다. 그는 벙끌루에서 이슬람단체인 무함마디야 계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15세 소녀 파트마와띠와 사랑에 빠진다.  
  
  1942년 일본 군대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침략해 쉽게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든다. 일본 정부는 수까르노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모하맛 하따와 수딴 샤흐리르 등 민족지도자들을 자카르타로 불러들여서 일본 식민정부에 협력하라고 위협한다. 하따는 일본에 협력하자는 수까르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샤흐리르는 거부한다.

   수까르노는 자국민에게 일본군에 식량과 광물을 제공하고, 군역과 노역을 자원하라고 설득하는 등 일본군에 협력한 대가로 자신의 민족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알릴 기회를 얻는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하자, “일본군이 내 딸을 잡아가요. 그들이 내 딸에게 매춘을 시켜요”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수까르노의 설득에 잠잠해지는 장면도 있다. 이에 일부 인도네시아인들은 그의 집에 ‘기회주의자, 겁쟁이, 살인자’라고 쓴 종이를 돌에 묶어 던진다. 일본군은 이슬람신자들에게 일왕에 대한 절을 강요했다가 반발하자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쏜다. 
  
   한편 수까르노는 잉깃과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파트마와띠를 그리워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꿈을 꾼다. 결국 잉깃은 일부다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수까르노와 이혼하고, 수까르노는 파트마와띠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던 수까르노와 하따는 히로이토 일왕에게 인도네시아 독립을 약속 받는다.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고, 필리핀을 미국에 빼앗기는 등 전세가 기울자,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도록 허락한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정치단체들이 수까르노에게 독립선언을 촉구하지만 그는 혼란을 우려해 거절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17일 일본의 후원 아래 간소하게 독립선언을 한다. 

실제 역사는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 역사책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매리 하이듀즈>을 통해 확인해보았다. 먼저 일본인들은 수까르노와 하따를 끌어들여서 국민들에게 노동력과 물자 동원을 촉구하게 함으로써 전쟁 수행을 지원하도록 했다. 일본은 젊은이들을 강제로 노동부대에 입대시켰고,,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약 3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됐고 이들 중 절반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강제노동자와 종군위안부를 뜻하는 단어인 ‘로무샤(romusha)’와 주군이안푸(Jugun Ianfu 또는 budak seks)는 일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이슬람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유명한 이슬람 지도자가 “무슬림은 일왕에게 절할 수 없다”라고 선언한 후 일본 식민정부는 무슬림을 탄압한다.

   일본은 필리핀과 미얀마에는 독립을 부여했지만 천연 자원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을 암시하는 말조차 조심스러워했다. 1945년 초 일본군의 패배가 눈앞에 가시화되자 일본은 수까르노와 하따를 베트남 사이공에 있던 일본군 사령부로 불러 일본이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독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한다.

영웅보다는 인간으로 묘사된 수까르노 

   인도네시아인들은 수까르노가 많은 결점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본 영화 속 수까르노는 의구심이 많은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하눙 브라만띠오 영화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까르노의 삶 속에서 내적 투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많다. 엔디 바유니 자카르타포스트 편집장은 ‘수까르노를 폄하하는 영화’라는 제목의 칼럼(자카르타포스트. 2013년 12월 29일)에서 수까르노처럼 위대하고 복잡하고 논란이 되는 인물을 2시간 조금 넘는 영화에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줄리아의 지하드’의 저자이며 칼럼니스트인 줄리아 수르야꾸스마는 ‘수까르노 전기영화의 관전포인트: 논쟁을 시작합시다’라는 제하의 칼럼(자카르타포스트. 2014년 1월 8일)에서 인도네시아 대통령 7명 중 가장 화려하고 카리스마틱한 인물이 수까르노인데, 2개월 정도의 준비만 가지고 만들다 보니 졸속 영화가 됐다고 비판했다. 
  
   줄리아는 영화 수까르노가 기본적으로 초대 대통령을 바람둥이, 일본 협력자 심지어 아첨꾼이라고 묘사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은 일본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바유니는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수까르노가 유부남임에도 여학생과 연애를 할 정도로 여색을 좋아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하는 일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전적으로 일본에게 협력할 정도로 어리석으며 △수까르노, 하따, 샤흐리르가 독립 투쟁 전략을 위해 지적인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장면에서는 수까르노가 다른 두 사람보다 지적으로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바유니 편집장은 수까르노가 1920년대와 30년대에 쓴 칼럼을 읽어보면 당시 어떤 인도네시아 젊은이보다 그의 지적인 수준이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수까르노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구속됐을 때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만큼 연설을 잘했고, 독립준비위원회 회의에서 한 빤짜실라(Pacasila)를 골자로 한 연설은 지금도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로 꼽힌다며, 영화 수까르노의 수까르노 폄하를 비판했다.  

   수까르노의 가족과 이슬람단체들은 영화가 실제와 다르다며 개봉 전부터 항의하고 영화 수까르노의 상영을 저지하겠다고 협박했다. 수까르노의 차녀이자 수까르노교육재단(Yayasan Pendidikan Soekarno) 이사장인 라흐마와띠는 영화 대본이 자신들이 합의했던 것과 다르고, 수까르노 역을 맡은 배우 아리오 바유도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영화 제작회사 MVP 픽쳐스, 하눙브라만띠오 감독 등과 소송을 벌였다. 무함마디아와 이슬람수호전선(FPI) 같은 이슬람 단체들은 영화 속에서 독립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이슬람 대표들이 샤리아법을 주장하며 소란을 피운 장면이 잘못됐다고 항의했다. 

논쟁을 시작합시다

   영화 <수까르노>는 시작부터 혼란을 준다. 영화 시작 전 관객들에게 모두 일어서서 국가를 부르라고 하고, 영화 장면 속에 과거 영상기록을 수시로 삽입해 다큐멘터리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실제 사건과 인물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으나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묻게 된다.

   줄리아는 수하르또 신질서 정부가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초대 대통령의 존재감을 축소하기 위해 만든 탈수까르노화가 이 영화에 반영됐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이 영화가 정말 수까르노를 폄하하기 위해 만든 영화일까?라고 반문했다. 오히려 그는 영화 <수까르노>를 정리되지 못한 개념과 가짜 민족주의를 삽입하면서 메시지가 뒤섞였다며, ‘수까르노 장사!’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상업영화일 뿐인 <수까르노>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줄리아는 “역사는 끝없는 논쟁”이라는 네덜란드 역사가 피터 기엘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존 인물 수까르노를 스크린에 소환해 그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게 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줄리아는 “권력이 전파하는 역사적 신화에 대해 반하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줄리아는 수하르또 전 대통령이 32년 간 통치하면서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방적인 역사관을 주입했다며, 당장은 어려운 일이지만 1998년 이후에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수하르또의 역사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끝>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