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鏡 - 시가 있는 목요일
안녕하세요. 박정자입니다.
똑같이 정당하게 보이는 두 개의 원리나 결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율배반이라고 하지요. 생각과 행위의 중간에서 난감할 때 우리의 갈등은 너무나 큽니다.
흔히, 위험한 데 가지 말고 의심받을 짓 하지 마라는 아버지 말씀도 맞고 평온하게 살지 마라 무슨 짓인가 해라는 내 안의 말씀도 맞을 때, 그런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길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한 믿음이 최우선이겠지요.
나의 자식들에게 / 김광규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
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대로 집에만 있으면
양지바른 툇마루의 고양이처럼
나는 언제나 귀여운 자식이었다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람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인생이 힘들 것 무엇이랴 싶었지만
그렇게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수양이 부족한 탓일까
태풍이 부는 날은
집안에 들어앉아
때 묻은 책을 골라내고
옛날 일기장을 불태우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꾸 찢어버린다
이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짓을 못하게 되어도
누군가 나를 기억할까
어쩌면 그러기 전에 낯선 전화가
울려올지도 모른다
지진이 일어나는 날은
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
아무 짓을 안 해도 의심받는다
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평온하게 살지 마라
무슨 짓인가 해라
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
무엇인가 남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