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이성수] 폭설/오탁번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이성수] 폭설/오탁번

시 읽어주는 남자(48)
기사입력 2017.11.22 14:3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폭설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22일 방까섬 빠시르 빠디 해변.jpg▲ 수마트라 방까(Bangka)섬 빠시르 빠디(Pasir padi) 해변에 물이 빠지고 드러난 하얀 모래사장이 겨울 바다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처럼 보인다. [사진: 김태호]
 

시 읽기 ------------------------------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니다. 
남도에서도, 땅끝에서도 더 떨어진 외진 동네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 내린다.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이 모여 사는 들꽃 같은 동네에
눈이 내려 비루한 생계를 이어주는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축사가 무너진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이다. 
희망보다 고통이 더 가까이 있는 계절에는 고상한 말보다 상스러운 욕설이 더 찬란하다.

깨지고 무너지고 슬픔에 철퍼덕 쓰러져 끝나면 인생이 아니다.
다 무너져도 집집마다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친다.
그러니까 사는 거다. 
살다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거다. 가끔은 욕도 하면서 사는 거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 하지만 좋은 일은 열 달 후에 온다. 그러니까 사는 거다. 




이성수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에서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이 있다. 

김태호 사진작가는 
인도네시아 생활을 시작한 2002년 경부터 현재까지, 혼자 사진기를 들고 인도네시아 전 지역과 주변 국가들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2015년에 2인 사진전 " Through Foreign Eyesㅡ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인상"을 개최했다.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