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에세이]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에서 터를 닦은 그들을 기억하며…/조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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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에서 터를 닦은 그들을 기억하며…/조연숙

인문창작클럽 연재
기사입력 2018.10.1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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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하늘과 비와 나무만 있는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은 그의 일터였습니다. 깔리만딴, 빠뿌아, 수마트라… 숲이 있는 곳에는 그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국제선 항공기를 타고 홍콩을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한 뒤 국내선 항공기를 갈아타고 반자르마신이나 빵깔란분으로 갔습니다. 지방도시에서 출장소나 캠프로 갈 때는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항공기를 타기도 하고 스피드보트를 타고 바다와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빠뿌아 주 머라우께 시에서 아시끼 캠프로 가려면 나무의 바다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중간에 300개가 넘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개미가 진흙으로 쌓은 2~3미터 높이의 개미집이 널려 있는 초원을 지나서 밭에 양배추가 가지런하게 자라는 이주민촌을 지났습니다. 멧돼지와 캥거루, 사슴 같은 산짐승들이 그가 탄 차를 빤히 쳐다보던 장면도 생생합니다. 어떤 때는 자카르타에서 부임지까지 가는데 닷새가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깔리만딴 섬 남부에 위치한 반자르마신 시에 있는 출장소와 숲 속 캠프를 오가며 일했습니다. 그는 빠뿌아 섬 중부에 위치한 아시끼 본부와 머라우께에 있는 출장소와 숲 속 캠프를 오가며 근무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서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캠프에서 살았지만 더운 오지에서 외로움과 열악한 시설과 부족한 물자와 씨름하며 생활하는 아이들과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산 속에서는 근무일이 월화수목금금금이고, 휴무일은 비 오는 날입니다. 특히 우기에는 비 오는 날이 많아서 날씨가 맑으면 설날과 크리스마스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구하기 쉽지 않아서 멧돼지, 타조, 사슴 고기도 먹었습니다. 보신용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그는 매년 회사가 지급하는 작업복 2~3벌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숲 속과 비포장도로를 다니다 보니 옷도 신발도 흙투성이가 되기 일쑤이고, 빗물을 모아서 사용하거나 강물을 퍼서 빨래를 하다 보니 말끔한 옷은 기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12일 인작 칼럼.jpg▲ 이미지: 코린도 홍보 동영상 캡처
 
1979년. 그는 회의에 참석하거나 장비나 식품을 가져오기 위해서 캠프에서 스피드보트를 타고 출장소에 갑니다. 며칠 전에는 반자르마신 출장소에서 열린 동료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본부장님이 주례를 맡았고 출장소장님이 사회를 보셨고 부인들이 잔치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에 취업이 돼, 애인을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왔다고 하네요. 신부는 한국에서 웨딩드레스까지 챙겨왔더라구요. 

1997년. 그는 아시끼 본부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바로 도착한 직원부인이 다른 직원들을 초대해 한국에서 가져온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 소식도 전했습니다. 회식에 참석한 직원 중 한 명이 휴가 다녀오며 비디오 카메라를 사왔다고, 가족들에게 하는 인사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그 부인이 돌아가실 때 전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 사람씩 촬영을 하는데 찍히는 사람도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명이 지나고 그의 순서가 되자 그도 가족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며칠 뒤 부산에 있는 가족들이 동영상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고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가족들은 그에게 전화를 좀 자주하고 상냥하게 말하라고 하지만 국제전화를 하려면 차나 스피드보트로 서너 시간을 나가서 출장소에 가거나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특별한 업무 없이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에는 전화비가 너무 비싸고, 간단히 하려고 하니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서 내용이 연결이 안 됩니다. 가족들 목소리만 들어도 목이 메여서 이를 감추려다 보니 말소리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산 속에서는 한국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이 덜 신선해지고 더 중요해집니다. 그는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채 온 한국 드라마와 뉴스를 저녁마다 반복해서 봐서 대사를 외울 정도이고, 한 달에 한두번 몰아서 오는 신문은 다음 신문이 올 때까지 지난 기사를 읽고 또 읽습니다. 그는 한국 휴가 때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틈틈이 나무토막을 깎아 조각을 합니다. 서툴지만 함부로 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1997년. 자카르타에서는 루피아 환율이 폭등했고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가 파산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뭔가 들썩이는 데 그에게는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사상 최악의 가뭄과 산불이라는 보도가 더 와닿습니다. 싱가포르와 깔리만딴에서는 연무로 호흡기 환자가 급증하고 항공기도 결항하기 일쑤라고 했습니다. 빠뿌아 지역에서도 산불 영향으로 하늘이 뿌옇고 메케한 연기가 공기 중에 섞여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직원들과 한국인 거주지역까지 산불이 번질 경우 탈출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한국에서 그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갔고 딸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취직했고 딸은 시집을 갔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 월급을 관리해 달라고 보냈더니 동생이 사업한다고 다 써서 없다고 했습니다. 월급 모아서 집을 사고 관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아버지 명의로 했더니, 형제들이 아버지 명의 재산이라고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부인이 투자를 잘못해서 재산을 모두 잃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오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가 병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퇴직해서 집에 가니 가족들이 낯설고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에 왔습니다. 가족들 생활비, 아이들 학비, 부모님 병원비, 부부의 노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그는 산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1~2년에 한 번 한국에 휴가가면 너무 빨리 변해서 어리둥절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은 아무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떠나 왔을 때는 남북이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이제는 남북 정상이 교류하고 아시안게임에 단일팀이 출전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라고 하던 말들이 남녀차별이라고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관공서 업무도 은행 업무도 지하철 타기도 모두 디지털화되어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2018년.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이 살 기반을 마련했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들었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견인력이 됐습니다. 이제 그는 몸이 안 따라주고 그가 가진 기술과 지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인도네시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을 알고 그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끝> 



인문창작클럽(INJAK)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이강현)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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