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채인숙]매혹의 인도네시아 7-스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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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매혹의 인도네시아 7-스마랑

기사입력 2019.04.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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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어야 하는가, 나는 살아있는데 – 천 개의 문, 라왕 세우(Lawang sewo)
글,사진: 채인숙(시인)

스마랑(Semarang)은 중부 자바의 북쪽에 면한 항구 도시다. 15세기 명나라 시대에 세계를 항해했던 정화가 바람을 따라 처음 자바에 상륙한 도시였고, 네덜란드 통치 시절에는 인도네시아 향료를 수출하는 대표적인 무역항이었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유난히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인도와 아랍, 유럽 문화까지 한데 녹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다. 그래서일까. ‘스마랑’을 발음할 때마다 자바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것 같다.

처음 스마랑에 갔을 때, 물을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라왕 세우(lawang Sewu)였다. 네덜란드가 1904년부터 3여 년에 걸쳐 건설하여 1942년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철도회사로 사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의 합동 전장지였던 곳이다. 패전 이후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들이 인도네시아군에 저항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5일 간의 ‘스마랑 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많은 시민들과 군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그때부터 목이 잘린 귀신들이 건물 안을 떠돌아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건물 지하 감옥은 네덜란드 통치 시절부터 죄수들의 시체를 방치하거나 수로를 통해 자바해로 떠내려 보낸 과거가 있었으니,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혼들이 슬픔과 한을 지닌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라왕 세우1.jpg
 
세월이 흐르면서 라왕 세우는 한때 호텔로 변신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공사 중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 탓에 끝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흉물스럽게 방치된 채 스마랑 구도심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화위복이랄까. 지금은 오히려 인도네시아 귀신들의 본거지라는 명성을 달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고, 2007년에는 ‘라왕 세우’라는 제목을 그대로 달고 공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방학을 맞아 모험을 즐기려던 학생들이 라왕 세우를 찾았다가 한 명씩 차례로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는 스토리로 영화는 큰 흥행을 거두었다고 한다. 

라왕 세우2.jpg
 
하지만 귀신 이야기를 제쳐놓고 본다면, 라왕 세우는 매우 독특한 구조를 지닌 네덜란드식 고딕 건물이다. 길 쪽으로 툭 튀어나온 모서리처럼 보이는 건물 입구는 팔각형의 돔 모양을 띤 두 개의 붉은 탑과 세 개의 둥근 원통 모양 문이 있다. 그리고 왼편과 오른편 탑을 어깨죽지 삼아 하얀 날개를 펼치듯 니은 자 형태의 건물이 길게 뻗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종착지에 멈춰 서 있는 기차를 연상시키는 좁고 긴 나무 문이 끝을 보이지 않고 줄지어 서 있어서, 이 건물이 ‘천 개의 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 준다. 문지기 아저씨는 그저 문이 너무 많아서 막연히 ‘천 개의 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지금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 슬픔으로 가득 찬 귀신들의 울음만 지하 계단을 오르내리는 집. 천 개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오랜 영혼들의 울음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바해의 바람 소리만 밤의 복도를 서성거리는 집. 라왕 세우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귀신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선뜻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쩐지 망연한 기분에 휩싸여 한동안 입구에 서 있었다. 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얼굴을 잃어버린 채 울었을 것인가. 천 개의 문은 천 번을 울다가 지쳐 돌아선 그들의 슬픈 어깨인지도 모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하실 바닥의 검은 얼룩을 보며 마치 눈물 번진 눈동자와 마주친 것처럼 가슴이 저렸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날은 여전히 찌는 듯 더운데 늑골 사이로 서늘한 울음이 고이는 것 같았다. 

라왕 세우3.jpg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문 안쪽의 방들을 흘낏거리며 천천히 복도를 오가는데 갑자기 정원에서 하늘거리는 반주와 함께 당둣 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흥겨운 당둣 리듬에 끌려 큰 나무 아래로 춤을 추러 모여들고 있었다. 원한에 가득 찬 영혼들이 목이 잘린 채 밤을 배회하는 집이라는 설명이 허탈한 농담으로 들릴 만큼 밝고 경쾌한 풍경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부르는 낮의 노래와 죽은 자들이 내뱉는 밤의 울음이 제멋대로 섞여 있는 이 비현실적인 괴리의 공간. 그러나 라왕 세우 어디에서도 죽은 영혼들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날마다 천 개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지내는 제사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산 자들은 천 개의 문을 열고 정원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기억하리라. 나는 섬광처럼 떠오르는 이브 본푸아의 시를 읊조리며 뭔가에 이끌리듯 정원 쪽으로 걸어 나갔다. 

 ‘왜 증오하고 왜 울어야 하는가, 나는 살아있는데 / 계절이 깊어가고 여름날은 나를 안심시켰다.’


라왕세우4.jpg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도네시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에서 활동한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격주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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