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상균의 식물원 카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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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식물원 카페 6

기사입력 2019.06.0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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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기론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기론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영언문화사, 1984
                                                                           『정진규 시선집』 책만드는집, 2007


식물원카페.JPG▲ 사진: 김상균
 

그땐 그랬다. ‘연필로 쓰기’는 종이 아껴 쓰는 버릇과 함께 만들어져 내 습작 시기 내내 이어졌던 오랜 습관이었다.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기론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쩔 수 없이 볼펜이나 만년필로 쓸 때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었고, 고쳐 써야 하는 경우에는 적혀있는 표현 때문에 자꾸만 생각이 갇히게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연필로 쓰고, 다시 고쳐 써서 완성된 글은 만년필로 원고지에 옮겨 적곤 했다.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점차 만년필이 아니라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컴퓨터로 기기를 바꾸어가며 마무리된 글을 출력해서 정리해 두게 되었다.

1993년이었다. 학교 전체에 컴퓨터가 2~3대만 있었을 무렵이었는데, 시집을 낼 생각으로 프린트한 원고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보며 수정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만년필로 원고를 고쳐 쓰고, 디스켓에 다시 저장한 다음, 새로 출력한 것을 원고 사이에 갈아 끼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번거로워서 노트북 컴퓨터를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부터 종이 없는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푸른색 감도는 흑백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심상(心想)을 풀어놓다가 고쳐 쓰기 위해 쓴 글을 지워버리게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당혹감을 느끼며 앞에 내가 썼던 표현을 기억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기도 했지만, ‘적혀있는 표현에 갇힐’ 필요 없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가 디지털 세계에선 이미 구현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컴퓨터로만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의식과 내면까지도 이미 디지털화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의 세상이 연상되며 불안해진다. 아날로그적인 것은 추억 속에만 남아있는 것일까?

시인은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처음 이 시를 접했던 20대 무렵에는 시인의 심정에 공감하기도 하였지만, 나름 연륜이 쌓여가면서 드는 생각은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조차도 괜스럽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시인의 바람처럼 “연필로 쓰기”가 아니라 아무리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들 이런 바람이 이뤄질 순 없을 터, “잘못 간 서로의 길”에 대해 “지워드리”거나 고쳐볼 생각을 하기보단, 애틋한 눈길로 지나가버린 그때, 서로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하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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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초입, 오늘 밤도 세상의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김상균.jpg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90년대 초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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