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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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4)

기사입력 2020.02.1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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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뉴스.jpg▲ 한인뉴스 1999년 3월호 사진기사. 좌측 하단에 앙드레김 패션쇼 사진. [데일리인도네시아]
 
기억하라 1999: 혼란과 변화의 시기

글: 조연숙 한인100년사편찬위원.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인도네시아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5월 폭동과 수하르토 실각 등을 겪으면서 극심한 혼란기를 맞았고, 1999년 인도네시아 총선과 대선 그리고 동티모르 독립 등이 진행되면서 인도네시아인과 한국인들 모두 긴장을 놓지 못하고 살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인들이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외환위기 영향으로 사업을 축소하거나 폐업하고 귀국해 한인수가 줄어들었다. 이후 2000년 초반부터 봉제와 신발 등 일부 제조업이 활발해지고 국가 간 교류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한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인도네시아 진출해 초기 정착기를 지나서 한인공동체가 성숙해짐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게 된다. 재인도네시아 한인회는 1996년에 한인뉴스를 창간해 한국대사관, 한인회, 일반교민들이 소통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한다. 한인뉴스 보도는 개인차원에서 알음알음 활동하던 한인모임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했고, 이렇게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단체가 출범하게 된다.  

1997년 하반기부터 나타난 요동치는 환율, 급등하는 물가, 빈번한 정치집회와 민중시위, 홍수와 지진 같은 자연재해,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인도네시아 한인과 한국 정부의 입장 차이와 파병 등 사안은 인도네시아 시사뉴스와 한인소식에 대한 갈증을 키웠다. 여기에 항공 교통 발달과 세계화에 따른 인적교류 증가, 이동통신과 인터넷 발달에 따른 국내외 뉴스와 정보 교류 등은 다양한 한인 미디어 출현으로 이어졌다. 

1998년에 시미(SIMI)를 시작으로 인니일일동향, 데일리인도네시아(당시 스피드뉴스) 등이 창간해, 현지 정치와 경제, 사회 소식을 유료 뉴스레터로 만들어 팩시밀리로 발송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이메일을 열어서 파일을 다운로드 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인터넷 속도가 매우 느렸다. 한인업소 증가와 한인소비시장 성장에 따라 교민세계, 소망, 벼룩시장 등 광고지도 나왔다. 

1999년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이 교민들 안방으로 들어온 시기이다. 한국을 알리는 영어방송인 아리랑TV가 인도네시아에 방영되기 시작했고, 교민들은 파라볼라 안테나를 설치하거나 지역유선방송국에 가입해서 시청할 수 있었다. 교민 사업가가 설립한 아시아비전(PT Asia Vision)이 운영하는 KTV는 KBS, MBC, SBS 등 한국 메이저 방송국의 뉴스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을 케이블 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송출했다. 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개인용 컴퓨터(PC)를 이용해 다소 버퍼링이 있었지만 방송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원하는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는 비디오대여점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뉴스도 비디오테입으로 빌려서 봤다.

인도네시아에서 혼란기를 살았던 한국인을 포함해 외국인들은 1998년 5월 사태를 경험한 뒤 정치시위가 소요사태로 번질 것을 우려했고, 현지인을 자극할 수 있는 언행을 삼가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 1월호 신년사에서 승은호 당시 한인회장은 군중 데모와 폭동이 우려된다며 한인들에게 “△무엇보다 주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해야 합니다. △위험지역 출입을 삼가고 사치스런 소비생활을 지양하며 검소한 생활과 복장을 하도록 당부합니다. △대사관과 한인회가 공동수립, 1998년 11월에 배포한 ‘동포 신변안전 수칙’을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관과 한인회와 긴밀히 연락해서 정세 변화에 대한 대사관 정보와 전달 사항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한인뉴스는 1999년 초반만 해도 교민 자녀 돌잔치, 결혼소식, 한국에서 가족이 와 여행한 이야기 등 소소한 교민 소식을 사진과 함께 화보로 실었지만, 차츰 대사관, 한인회, 기업, 한인단체 등 소식이 늘어나고 사적인 교민 소식은 줄었다. 1999년은 한인공동체가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지만, 교민 수가 많지 않았고 교민들끼리도 한두 사람만 거치면 아는 사이여서 여전히 친밀하게 소통했다. 

1999년은 한국부인회(당시 회장 박은경)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은 주로 가정주부 신분이었고, 취업허가와 언어 그리고 안전 문제 등으로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국부인회는 한인전화번호부를 발간하고, 장학금을 모아서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와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을 지원했다. 또 교민을 대상으로 인터넷, 꽃꽂이, 문예, 문화탐방, 유화, 째즈발레 등을 배우는 문화강좌를 운영했다. 교민행사에서 음식을 찬조하고 진행요원으로써 봉사하는 역할도 컸다.

인도네시아가 혼란을 겪는 시기에도 1999년 3월에 우리나라 패션계 전설 고(故) 앙드레 김의 '자카르타 자선 패션쇼'가 열려서 현지 언론과 현지 사회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한인뉴스에는 패션쇼 안내와 개최 후 화보 뉴스까지 자세히 실었다. 1999년은 한인문화예술단체들이 설립되기 전 시기로, 개인이나 소그룹 차원에서 교민 화가인 찰리고(한국이름 고광철) 자선 전시회와 월화차회 다례 시범 등이 개최됐고, 연말에는 한인미술협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 한인회 송년회, 동문회 송년회, 교회와 성당의 성탄절과 부활절 행사 등은 인도네시아 정치사회환경을 고려해 취소되거나 축소됐다.

이 시기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학과 고등학교 동문회를 중심으로 한 사교활동이다. 한인뉴스가 각급 학교 동문회 탐방 기사를 연재할 만큼 동문회 활동이 활발했다. 매월 또는 격월로 정기모임을 했고, 가족체육대회, 야유회, 송년회 등을 개최했다. 

한국인들이 특정 아파트에 몰려 살면서 한국인입주자협의회가 따로 구성되기도 했고, 아파트 내부나 주변에 한국계 상점과 식당이 생기기도 했다. 남부자카르타의 심푸룩 인다(Simpruk Indah) 아파트 한국인입주자협의회는 한인뉴스에 다달이 소식이 보도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한국계 부동산중개업소나 온라인 게시판 등이 거의 없었고, 아파트 입주정보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한인뉴스가 교민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의 장단점과 시세 등 관련 정보를 취재해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온라인 정보 검색이 활발하지 않았던 1999년에는 한창 인기가 있던 안쫄(Ancol) 유원지와 개발이 시작된 끄망 까페 거리, 빠사라야 백화점, 대형마트 마크로와 까르프 등을 소개하는 기사도 한인뉴스에 실렸다. 

1999년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인 활동 중에는 골프와 인도네시아 문화탐방 등이 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 사이에 골프가 대중화됨에 따라 골프 에티켓(성인용 한인회 수석부회장 기고문)과 인도네시아어 골프용어(안선근의 인도네시아어 지상강좌) 등을 소개하는 글이 한인뉴스에 실리기도 했다. JIKS 사회과 교사였던 사공경 현 한인니문화연구원 원장은 자카르타 박물관과 갤러리 등을 소개하고 한국부인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999년대 중반에 문화탐방을 시작했다. 

한인뉴스를 통해 당시 발생한 사건사고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대사관은 나이지리아 범죄조직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검은 잉크를 묻힌 달러가 화학용액을 떨어뜨리면 검은 물질이 사라지고 100달러 지폐로 바뀐다며, 잉크를 지우는 화학용액을 살 돈을 투자하라는 꼬임으로 사기를 친다며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대사관에 도움을 청한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99년에는 차량 도난 사고도 빈번했다. 길가나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잃어버리기도 했고, 고용한 운전기사가 차를 훔쳐가는 경우도 많았다. LG손해보험(LG SIMAS Insurance)의 신창훈 이사는 직접 고용한 운전기사가 차를 훔쳐갈 경우 도난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한인뉴스는 한국 부인 김정숙(당시 37세) 씨가 자가운전을 하다가 노상강도를 만나서 용감하고 지혜롭게 벗어난 사건도 보도했다. 길에 못을 깔아 놓고 지나가던 차량이 타이어가 터져서 내리거나 서행하면 도와주는 것처럼 다가와서 물품을 강탈해가는 수법이었다. 이 방식 외에도 신호대기 중인 차량의 사이드미러를 칼로 도려내거나, 손도끼로 유리창을 깨고 핸드폰이나 손가방 등 귀중품을 훔쳐가는 범죄가 흔하게 발생했다.

*다음호에는 2009년과 2019년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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