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 (33)] 동화편-루뚱 까사룽 전설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무속과 괴담 사이 (33)] 동화편-루뚱 까사룽 전설

기사입력 2022.03.16 15:4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1_루뚱 까사룽과 뿌르바사리 공주.jpg
루뚱 까사룽과 뿌르바사리 공주

 

 옛날옛적 뿌르바사리(Purbasari)란 이름의 공주가 살았습니다. 그는 빠시르바땅 왕국(kerajaan pasir batang) 쁘라부 따파 아궁(Prabu Tapa Agung) 왕의 막내 딸이었습니다. 뿌르바사리에게는 가장 큰 언니인 뿌르바라랑(Purbararang)을 비롯해 여섯 명의 언니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장녀 뿌르바라랑과 막내 뿌르바사리를 제외한 나머지 공주들은 모두 이웃나라 왕자들과 혼인해 궁을 떠났습니다. 


 뿌르바사리는 성격이 밝고 행동도 방정했습니다.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사람들 돕기를 좋아했고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나서 돕곤 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맏언니 뿌르바라랑도 빼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막냇동생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해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더욱이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가 무색하게 거칠고 오만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녀는 막내 동생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부왕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이미 왕위에 오래 머물렀던 쁘라부 따파 아궁은, 그래서 장녀 뿌르바라랑이 아니라 막내딸 뿌르바사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뿌르바사리의 성품이 더욱 왕재에 적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악랄한 장녀 뿌르바라랑이 여왕이 되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어느 날 고관대작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공식적으로 뿌르바사리에게 양위한다는 뜻을 밝히고 자신은 궁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둔의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뿌르바라랑은 막내 동생이 자신을 제치고 여왕이 된 것에 끓어오르는 시기와 질투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 인드라라야(Indrajaya)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인드라라야는 고관대작의 아들이었어요. 왕국 최고의 미남자로 알려진 인드라라야는, 그러나 뿌르바라랑 못지않은 음침한 성격의 소유자로 점술과 저주에 능했습니다. 그의 소개로 뿌르바라랑은 니론데(Ni Ronde)라는 사악한 마녀를 만나 뿌르바사리를 해칠 계략을 얻습니다. 마녀는 검정색 보레 (Boreh)를 뿌르바라랑에게 주었습니다. 보레는 검정색을 띈 식물성 연고 형태였고 치명적인 저주를 담고 있었습니다. 마녀는 그것을 뿌르바사리의 얼굴과 온 몸에 바르게 하라고 속삭였습니다.


3_발리식 보레.png
발리식 보레(boreh)

 

 인도네시아에는 룰루르(Lulur)라는 전통적이 피부관리방법이 있습니다. 얼굴과 몸의 각질을 제거할 목적으로 끈적끈적한 식물성 물질을 바른 후 마르면 씻어 벗겨내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때를 미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죠.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때밀이 효과의 10%쯤 됩니다. 뿌르바라랑은 뿌르바사리의 시녀를 매수해 그녀가 쓰는 룰루르 재료에 보레를 섞어 뿌르바사리의 온몸에 바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뿌르바사리에게 보기에도 흉측한 검은 반점과 역겨운 물집이 생겨나 온몸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태리 타올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주를 받아 역병에 걸린 사람이 빠사르 바땅 왕국 여왕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역병이 번지기 전에 당장 정글 속으로 유배해야 합니다.” 이제 뿌르바라랑은 뿌르바사리가 역병에 걸렸다며 왕위에서 쫓아내려 했습니다. 뿌르바라랑은 흉측한 몰골이 되어버린 뿌르바사리를 지목하며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뿌르바사리의 왕좌를 빼앗았습니다. 


 그는 궁정 신료들의 우두머리인 우왁 바타라(Uwak Batara) 재상을 시켜 뿌르바사리를 정글 속으로 내쫓았습니다. 올곧은 성품의 재상은 앞으로 뿌르바라랑의 치하에서 고통받게 될 왕국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뿌르바사리를 위해 짐승들의 공격과 추위를 막아 줄 오두막을 정글 속 아늑한 곳에 지어주며 최소한이나마 그녀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렇게 뿌르바사리가 정글에 유폐될 즈음 천계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구루민다 왕자(Pangeran Guru Minda)가 어머니 수난 암부(Sunan Ambu)의 명을 거역하고 어머니가 지정한 선녀와 혼인하길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어머니 수난 암부의 미모에 맞먹을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야만 혼인하겠다는 까다로운 의지를 내세웠습니다. 


 수난 암부는 외모만 따지는 아들의 여성관, 배우자관을 탄식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오직 지상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설득 했지만 구루민다 왕자는 미개한 지상에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얻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수난 암부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한 가지 조건을 달아 왕자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것은 지금의 멋지고 당당한 구루민다 왕자의 모습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루뚱 원숭이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루뚱(Lutung)은 긴 꼬리와 두꺼운 칠흑색 털을 가진 가진 영장류 원숭이의 일종입니다. 수난 암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떠보았습니다. 


 “네 이름은 루뚱 까사룽(‘길 잃은 원숭이’라는 뜻)이라 붙여주마. 그래도 꼭 지상으로 내려가겠느냐?”


 구루민다 왕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기어이 지상에 내려가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찾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했습니다. 수난 암부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내의 얼굴이나 파먹고 살 생각을 하는 자기 아들이 한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인간과 우주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태어난 천계의 왕자가 피부 껍데기의 미모에 그토록 연연하니, 그렇게 평가받는 게 어떤 것인지 이번에 너도 몸소 잘 배워 보거라.”


 수난 암부의 손짓 한 번에 지상으로 던져진 구루민다 왕자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몸에 털과 꼬리가 돋아나고 팔이 길어지면서 한 마리 루뚱 원숭이로 변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상에 내려온 후 얼마되지 않아 모든 루뚱 원숭이들과 숲에 사는 모든 유인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비록 루뚱 원숭이 형상을 하게 되었지만 그 알맹이인 구루민다 왕자의 힘과 도력, 그리고 지혜와 총명함은 그대로였으므로 맹수들도 그를 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한낱 야생원숭이로 여겨 인가에 다가올 때마다 이렇게 소리치며 돌을 던져 쫓아내곤 했습니다.

 “못생긴 원숭이!” 

 구루민다 왕자, 아니 루뚱 까사룽의 마음 속에 그 말이 상처가 되어 쌓였습니다.


3_손오공 아님.png
손오공 아님

 


 하지만 그의 정의감은 변함없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빠사르 바땅 왕국의 뿌르바라랑 여왕이 백성들을 상대로 펼치는 잔혹한 폭정과 악행을 듣고 정신 차리게 해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왕이 정글에서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잡아오라 했다는 것을 알고 뿌르바라랑 여왕의 사냥꾼들에게 순순히 잡혀 주었습니다. 그렇게 궁에 들어간 루뚱 까사룽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철장을 빠져나와 천방지축 날뛰기 시작해 빠사르 바땅 궁전을 엉망으로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력을 가진 원숭이 한 마리의 난동은 가히 가공할 만큼 파괴적이어서 궁전 안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들어 잡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루뚱 까사룽은 빠사르 바땅 왕국의 군사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군사들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본 뿌르바라랑 여왕은 이번에도 우왁 브라타에게 루뚱 까사룽을 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재상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을 제압할 특별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왕 바타라가 나서자 루뚱 까사룽은 그에게는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온순해져 별 저항없이 순순히 잡혀 주었습니다. 우왁 바타라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루뚱 까사룽은 우왁 바타라 재상이 뿌르바라랑 여왕과 달리 선하고 공의로운 마음을 가졌음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루뚱 까사룽은 우왁 바타라 재상의 진심이 자신과 왕국의 운명이 바꿀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뿌르바라랑 여왕은 우왁 바라타에게 뿌르바사리를 유폐한 그 정글로 루룽 까사룽을 데려가 풀어놓으라고 명했습니다. 뿌르바라랑은 사나운 루룽 까사룽이 자신의 눈엣가시같은 뿌르바사리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하길 원했습니다. 간혹 원숭이들도 맹수 못지 않은 잔혹함을 보이곤 하니까요. 


 하지만 우왁 바타라는 루뚱 까사룽이 예사로운 원숭이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글 속 뿌르바사리의 처소 앞에 루뚱 까사룽을 풀어놓으면서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간곡한 부탁을 속삭였습니다. 


 “루뚱아, 네 앞에 저 공주님은 쁘라부 따빠 아궁 왕의 따님이시다. 누구보다도 공의로운 저 분은 마땅히 이 빠사르 바땅 왕국의 정당한 여왕이셔야 했지만 악독한 저주에 흉측한 모습이 되어 이곳에 유폐된 것이란다. 아무쪼록 네가 내 주인님을 잘 지켜 주렴.”


 루뚱 까사룽이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우왁 바타라는 놀라면서도 반가웠습니다. 루뚱 까사룽도 숲속 오두막에 사는 뿌르바사리의 흉측한 외모를 처음 보는 순간 움찔 놀랐지만 그 마음 속에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외모를 한 여인이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심성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못난 것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경멸하던 루뚱 까사룽이 웬일인지 뿌르바사리가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서 수난 암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날부터 루뚱 까사룽은 뿌르바사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그녀를 지켜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이 원숭이 답지 않게 진중하고도 친절하게 대하며 언제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뿌르바사리도 그간의 고독과 고통을 잊고 얼마간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숲 속 원숭이들에게 명해 뿌르바사리의 매일의 양식을 위해 음식과 나무열매들을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비록 원숭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지도력과 책임감,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인해 뿌르바사리의 마음 속엔 어느새 루뚱 까사룽을 사랑하는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움막으로 다가오는 곰과 호랑이 등 맹수들도 물리치며 진심을 다해 뿌르바사리를 보호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뿌르바사리 몰래 어머니 수난 암부에게, 늘 진물이 흐르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뿌르바사리가 목욕을 하고 상처를 씻을 수 있는 연못이 딸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로 간청했습니다. 수난 암부는 흔쾌히 휘하의 신들과 선녀들을 내려 보내 아름다운 연못과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짓도록 했습니다. 샘물이 솟아나는 곳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벽과 바닥은 단단한 대리석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신들의 축원을 담은 투명하고 깨끗한 물이 작은 샘에서 솟아나 연못으로 흘러 들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아름다운 정원에 잠반 살라카(Jamban Salak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3_잠반살라카 연못.png
잠반 살라카 (Jamban Salaka)의 연못

 


 그 연못에 뿌르바사리가 몸을 담그자 보레(boreh)가 씻겨 나가면서 그녀의 얼굴과 몸에 서려 있던 악독한 흑마술 저주가 서서히 풀리더니 원래의 아름다운 자태를 되살아 났습니다. 루뚱 까사룽도 뿌르바사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란 사실을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뿌르바사리의 아름다움은 루뚱 까사룽의 어머니 수난 암부의 미모를 넘어설 지경이었습니다. 뿌르바사리의 그런 모습에 루뚱 까사룽은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의 찬란한 미모를 되찾은 후에도 루뚱 까사룽을 사랑하는 뿌르바사리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없었습니다. 아니, 그 사랑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습니다. 이제 루뚱 까사룽은 보잘 것 없는 원숭이 모습을 한 자신을 뿌르바사리 같은 절세의 미녀가 왜 여전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지 의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뿌르바사리가 원래의 미모를 되찾았다는 사실은 숲 속을 다니는 사냥꾼들의 약초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뿌르바라랑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뿌르바라랑은 그 소문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흑마술사 마녀 니론데에게서 얻어 뿌르바사리에게 바른 보레의 저주는 가장 독하고 악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뿌르바라랑은 연인 인드라라야에게 직접 가서 사실인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숲속으로 들어간 인드라라야는 뿌르바사리가 정말로 미모를 되찾은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뿌르바사리는 예전의 미모를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선녀보다도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녀 니론데에게서 받아온 독을 연못에 풀고 오두막 근처에 위험한 함정들을 만들었지만 루뚱 까사룽이 그런 모든 시도를 사전에 무력화시켰으므로 인드라라야는 뿌르바사리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뿌르바라랑은 다시 아름다워진 뿌르바사리가 왕좌를 되찾으려 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나 왕국 전체에 동생의 저주가 풀렸다고 소문이 난 마당에 여론에 떠밀려 뿌르바사리를 더 이상 정글 속에 방치해 둘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뿌르바사리를 왕궁에 불러들였고 루뚱 까사룽도 그녀를 따라 궁에 들어왔습니다. 일전에 궁전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전력도 있는 터라 그 누구도 루뚱 까사룽을 환영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뿌르바사리 곁에 악명높은 깡패 원숭이 루뚱 까사룽이 맴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오직 우왁 바타라 재상 만이 루뚱 까사룽을 반겼습니다. “고맙다. 루뚱아. 주군을 잘 지켜 주었구나.” 재상은 그렇게 속삭이며 감격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한낱 원숭이 모습을 한 자신을 그토록 신뢰하는 우왁 바타라 재상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천상의 수난 암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이제 뿌르바라랑은 뿌르바사리를 어떻게 하면 다시 떼어내 버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습니다. 떼어낼 바에 이번엔 영원히 없애겠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그러나 치명적인 내기가 걸린 시합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첫 시합은 요리경연이었습니다. 뿌르바라랑은 뿌르바사리가 질 경우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뿌르바라랑에게는 넘쳐나는 음식재료와 수백 명의 하녀들이 있었지만 뿌르바사리는 누구도 돕는 사람없이 자기 혼자였고 음식재료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이를 본 신료들과 백성들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누구도 감히 나서 뿌르바사라를 돕지 못했습니다.


 루뚱 까사룽은 이번에도 어머니 수난 암부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천상의 수난 암부는 또 다시 미소를 지었죠. 그날 뿌르바사리의 처소엔 천상의 선녀들이 음식재료를 가지고 내려와 산해진미를 만들었고 해자 지자 흥청거리기 시작한 연회에 내놓았는데 뿌르바라랑이 준비한 음식들보다 양이나 맛에서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뿌르바사리가 준비한 음식에 몰렸고 그 광경에 눈이 뒤집힌 뿌르바라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내기시합을 제안했습니다. 


 이번엔 머리카락 길이를 비교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뿌르바사리의 머리칼이 자신보다 짧으면 왕국의 사형집행관에게 목이 잘리는 조건으로요. 뿌르바라랑은 뿌르바사리보다 10년은 더 나이가 많았고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머리를 자른 적 없었으므로 뿌르바사리의 머리카락이 절대 자기보다 길 리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몰라 그는 다시 마녀 니론데를 불러들였습니다. 

 

 “무슨 수를 쓰던 밤새 뿌르바사리의 머리칼을 싹둑 잘라 버리거라.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 네 목숨은 없어. 머리칼을 자를 수 없다면 머리라도 잘라 오거라!” 그날 밤 니론데가 불러낸 마물들이 날카로운 손톱을 번득이며 뿌르바사리 처소의 땅바닥에서 스믈스믈 올라오더니 잠든 뿌르바사리의 방으로 아무도 모르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신의 가호를 받는 뿌르바사리의 목숨을 건드릴 수 없었던 마물들은 머리칼만을 싹둑 잘라 니론데에게 가져왔습니다. 니론데가 내놓은 머리칼을 보고 뿌르바라랑은 궁전이 떠나가라 소름돋는 웃음을 웃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뿌르바사리는 목 위로 짧게 잘린 머리칼을 보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루둥 까사룽은 황급히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런, 이런…..” 수난 암부는 그렇게 혀를 차며 아들의 요구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관료들과 귀족들이 도열한 궁전에서 뿌르바라랑은 종아리까지 떨어지는 머리칼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했습니다. 이제 뿌르바사리의 목을 자를 일만 남았으니까요. 그런데 머리를 감싼 천을 푼 뿌르바사리의 머리칼은 신들의 권능을 힘입어 어느새 발뒤꿈치를 감출 정도까지 자라 있었습니다. 뿌르바라랑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했습니다. 그날 밤 뿌르바라랑은 수하들을 보내 마녀 니론데를 찢어 죽였습니다.


 뿌르바라랑은 이번에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백성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자신이 절대 질 리 없는 마지막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누구의 약혼자가 더 잘생겼는지를 비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뿌르바사리의 약혼자가 자신의 약혼자보다 못생겼다면 뿌르바사리의 목을 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뿌르바사리가 루뚱 까사룽을 사랑하고 있고 그녀의 성품대로라면 절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원숭이가 인간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뿌르바라랑의 약혼자 라덴 인드라라야는 자타가 공인하는 왕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뿌르바사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뚱 까사룽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루뚱 까사룽의 손을 잡았습니다. “루뚱 까사룽,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이 나의 신랑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뿌르바사리의 양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루뚱 까사룽도 뿌르바사리의 손을 맞잡고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뿌르바라랑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원숭이가 네 약혼자라고?“ “맞아요. 루뚱 까사룽이 바로 내 약혼자입니다.” 뿌르바사리의 대답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만장한 신료들과 백성들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흘렸습니다.


 뿌르바라랑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사형집행인에게 뿌르바사리의 목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 순간 루뚱 까사룽이 갑자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수난 암부에게 용서와 도움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인가를 처절하게 깨달은 그는 뿌르바사리를 꼭 도와달라고 빌었습니다. 천상의 수난 암부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 연기가 루뚱 까사룽의 온 몸을 감쌌습니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자 거기엔 못생긴 원숭이 루뚱 까사룽 대신 그곳엔 건장하고 늠름한 구루민다 왕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 만장한 백성들은 이 기적 같은 징면에 하나같이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구루민다 왕자는 뿌르바라랑의 약혼자 인드라라야와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잘생기고 품위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 신의 권능이 무지개처럼 빛났습니다. 구루민다 왕자가 백성들 앞에서 빠사르 바땅 왕국의 진정한 여왕은 뿌르바사리라고 천명하자 백성들은 여왕 만세를 외쳤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변하자 이제 대신들도, 귀족들도, 백성들도 더 이상 뿌르바라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뿌르바라랑이 뿌르바사리의 목을 치기 위해 준비해 둔 집행관을 시켜 뿌르바라랑의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뿌르바라랑은 약혼자 인드라라야와 함께 무릎을 꿇고 그간 저지른 악행에 대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뿌르바사리는 다시 왕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백성들도 즐거워하며 여왕의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그날은 그들이 비로소 뿌르바라랑의 폭정에서 해방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가진 뿌르바사리는 뿌르바라랑과 인드라라야를 끝내 용서해 주었지만 그들은 성난 백성들을 피해 도망치듯 왕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뿌르바사리는 구루민다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3_루뚱 까사룽 아트 모음.png
루뚱 까사룽 아트 모음

 

--------------------------


인도네시아 최초의 영화는 1950년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 우스마르 이스마일이 민든 <피와 기도(Darah dan Doa)>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인도네시아인 감독이 인도네시아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영화이고 인도네시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는 1926년에 자바 필름 콤파니(NV Java Film Company)의 허펠도르프(L. Heuveldorp)가 감독한 무성 영화 <루뚱 까사룽>입니다. 그만큼 루뚱 까사룽의 전설은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1926년 12월 31일부터 1927년 1월 6일까지 엘리트(마제스틱)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가장 큰 욕은 개를 뜻하는 ‘안징(anjing)’과 함께 원숭이란 뜻의 ‘모녯(monyet);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이 도래하기 전 인도네시아에서 원숭이의 위상은 발리 께짭 댄스에 등장하는 힌두 신화의 원숭이 장군 하누만(Hanuman)처럼 정의의 화신 같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3_하누만.jpg
힌두 신화 속 원숭이 장군 하누만(Hanuman)

 

이쯤 되면 이 연재에 대한 고민이 좀 생깁니다. 

귀신 얘기는 언제 다시 시작하나…..? (끝)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